소설리스트

113. 당신 때문에 가슴이 터지겠어. (113/146)


#113. 당신 때문에 가슴이 터지겠어.
2023.04.24.



“제…… 제가 가족, 아, 아니 그 가족같이 사랑하는! 아니, 그게 아니라!”

눈을 꾹 감고 토해내듯 소리치다가 혼자 잔뜩 당황한 슈가가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앙브흐는 그런 아이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내렸고 아이작은 숨을 헐떡이는 슈가의 눈을 한 손으로 가렸다.


“자아, 천천히 들이쉬고. 그렇지. 잘했어. 이제 내쉬어.”

호흡이 진정된 슈가는 언제 준비한 건지 아이작이 건넨 딱 적당히 식은 차를 조금씩 마셨다.

찻잔이 반 정도 비었을 무렵.


“제가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할 때 낙인이 아파요. 그리고 아프고 난 후에 낙인이 희미해지고.”

슈가는 찻잔을 구명줄로 꼭 잡은 채 머뭇거리지도 더듬지도 않고 하려던 말을 끝까지 빈틈없이 해냈다.

본인 딴에는 의연하게 등을 곧게 펴고 있었지만, 얼굴은 곧 물러터질 토마토가 되었고 어깨도 금방이라도 혼이 날 아이처럼 안으로 굽기 시작했다.

이상……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실까? 가족이라니.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전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속으로 생각하고 티만 내지 않는다면 무슨 생각을 하건 누가 알고, 누가 상관할까.

물론 아무도 모른다기에는 전에 나눈 대화 때문에 황녀 전하께서는 제 ‘가족’을 눈치채셨을 수도 있지만…….

정말로 대놓고 이렇게 사랑이라느니 가족이라느니 행복을 입에 담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당사자들 앞에서.

밀려오는 부끄러움은 둘째치고 제멋대로 가족이라며 칭한 자신을 어떻게 볼지…….

가뜩이나 작은 슈가가 몸을 옹송그리면서 더욱 작아지는 사이, 멍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던 앙브흐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가족?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행복하다고?”

토끼눈을 뜬 앙브흐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외쳤다.


“가족이라니. 너무 기뻐! 역시 슈가도 나랑 같이 사는 게 좋았구나!”

그녀에게 끌어안긴 슈가의 곱아 들던 어깨에서 힘이 풀렸고, 아이작은 눈 사이를 좁혔다.

그렇게 말하면 지나치게 어린 신랑을 들인 몹쓸 사람 같이 들린다니까.

속으로 딴지를 건 아이작은 슈가의 말을 듣고 비웃지도, 질색하지도, 그렇다고 나도 그렇다며 앙브흐처럼 안아주지도 않았다.

그저 제 턱을 툭툭 두드리며 여상히 물었을 뿐.

다만 앙브흐는 아이작의 조금 빨개진 귀 끝을 볼 수 있었기에 몰래 웃음을 삼켰다.


“그러니까 가족……크흠. 어쨌건 낙인에서 통증이 느껴지면서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고?”

“네? 네.”

“확실히 희미해지긴 했어요. 미미하긴 하지만.”

슈가를 품에 낀 앙브흐가 거들자 아이작은 슈가의 낙인이 있는 옆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른세수를 했다.


“이건 제대로 보고해야겠는데.”

낙인은 그 주인님을 옭아매고 있는 고대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아이작은 곧 숨이 막혀 죽을 듯한 슈가를 앙브흐의 품에서 구해주며 물었다.


“혹시 수상한 사람이 접근한다던가 그런 경우는 없었고?”

“네. 없었어요.”

빨갛게 물든 슈가가 고개를 흔들었고, 익히 예상했던 답에 아이작은 더 묻지 않았다.

슈가에게 직접 묻기 전에 이미 주변을 전부 훑었기 때문이다.

크라이어의, 정확히 말하자면 올리비아의 명령에 따라 슈가를 감시하는 동시에 보호해야 하니, 아이작이 타렌저를 방앗간에 참새 드나들 듯 오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습관적으로 슈가의 머리를 헤집어 놓던 아이작은 배슬배슬 웃는 아이의 낯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뭐 어쩌겠나. 주인님과 가……족으로 묶이는 게 아이의 행복이라는데.

어차피 주인님 말대로 도망갈 곳도 없고, 애초에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려고 자진해서 섬기기로 했지 않나.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한 아이작이 곧 깊게 생각하기를 멈추고, 당장 해야 할 일을 위해 일어났다.


“황녀 전하께서 부르셨다면서.”

“네. 내일 오전이요.”

“그럼 그때 보자. 그리고 아픈 이유가 그 이유 때문이라면, 음.”

이유는 알았지만, 현재로서는 해결할 도리가 없다.

아이작이 침음하자 슈가가 저보다 훨씬 크고 거친 손을 덥석 잡았다.


“아픈 건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낙인이 희미해지고 있잖아요! 그리고 황녀 전하께 꼭 도움이 되고 싶어요.”

짙은 안개가 낀 길을 아무런 이정표도, 빛도 없이 헤매던 이들이 서로를 발견한 후,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있었다.

고대신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길이 아닌 그 주둥이를 후려칠 수 있는 길로.

***

-툭. 툭툭.

오늘도 변함없이 서류가 산을 이루는 황녀의 집무실에 손끝으로 펜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

올리비아는 케슬란의 방문 이후 가열차게 서류를 처리하다가도 한 번씩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도 올리비아 앞에 있는 서류는 뒷장으로 넘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펜 끝만 노려보며 숙고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바로 곁에 앉아 있던 크라이어가 기척 없이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턴가 볼셰이크의 역사서를 뒤지는 대신 그녀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내미는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기에 그의 자리도 조금 떨어진 일인용 소파가 아니라 올리비아의 책상과 맞붙은 곳이 되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긴 했지만, 눈앞에서 그림자가 지는데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이어가 손을 뻗었다.


“응?”

올리비아는 제 미간을 문질러 살살 편 후, 뺨에서 흔들리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는 손길에 그가 곁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초점이 맞지 않던 푸른 눈에 그제야 자신이 들어차자 크라이어는 그녀를 냉큼 안아 올렸다.

높아진 시야에도 올리비아는 익숙하게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발을 까딱댔다.

발을 다친 이후 크라이어에게 안겨 다니는 일이 잦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적응해버린 탓이다.

하얀 발목을 감고 있던 붕대는 풀었지만, 크라이어는 품에서 놓을 생각이 없었다.


‘내려줘. 이제 다 나았다잖아.’

‘그래.’

‘아니, 입으로만 답하지 말고 내려달라니까?’

올리비아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항의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에 불과했다.


‘이러다 혼자 못 걷게 될 수도.’

‘그거 반가운 소리군.’

들으라고 한 혼잣말이 아니었건만, 돌아오는 답에 섞인 웃음기에 올리비아도 농담처럼 넘기며 웃고 말았다.

물론 답의 의미까지 웃어 넘길 만한 건 아니었지만, 깊숙한 바닥부터 진득하게 차오르는 크라이어의 진심을 올리비아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는 지나치게 능란한 사냥꾼이었고, 올리비아가 절대 달아날 수 없다고 확신하기 전까지 이를 드러낼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뭐야, 갑자기?”

“조금 쉬었다가 해라.”

“그건 알겠는데, 왜 소파에 내려주질 않고.”

올리비아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저를 안은 그대로 소파에 앉았으면서, 뭐가 문제냐는 듯 그의 눈썹 한 올도 움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상하게 되묻기까지 했다.


“딱딱한 게 문제인가.”

“그야 당연히 딱딱하지. 아니 그게 진짜 문제가 아니 잖……. 당신 내려줄 생각 전혀 없지.”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자 크라이어의 입매가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그 무언의 긍정에 그녀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 이내 그의 가슴에 툭 기댔다.

머리도 복잡한데 아무려면 어때. 뭐, 편하기도 하고.

아니, 그렇다고 막 마음껏 편하지는…… 않은가?

쿵, 다시 쿵 하고 울리는 그의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한없이 편하다가도 불현듯 제 심장이 고장 나서 지나치게 빨리 뛰곤 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일에 전혀 집중을 못 했나.”

“두근거린다고.”

골몰하던 문젯거리에서 벗어나 다른 의미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탓이었을까.

그녀의 허리를 감아 조금 더 바싹 품으로 당긴 크라이어의 속삭임에 올리비아는 대뜸 엉뚱한 답을 해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엉뚱하다 못해 전혀 감도 잡을 수 없는 답에 뭐? 라고 되물었겠지만, 크라이어는 보통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올리비아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시선을 뗀 적도 없었고.

그는 대단히 태연하게 그녀의 머리 위에 가볍게 입 맞추며 낮게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더운 숨결과 함께 흘러나온 짙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올리비아는 제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았다.

귀 끝이 벌게진 그녀는 눈을 꾹 감으며 악문 잇새로 중얼거렸다.


 


“당신 때문에 가슴이 터지겠어.”

“그것도 환영이고.”

그냥 말을 말자. 이러다 진짜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르겠어.

살아남으려고 온갖 발버둥을 쳤는데 허무하게 갈 순 없지.

올리비아는 이제 제 관자놀이에 입술을 내리는 크라이어를 내버려 둔 채 이제껏 고민하던 문젯거리를 꺼냈다.


“그 호위 검붉은 눈이라고 했지?”

“나와 정확히 같은 색이라고 했지.”

케슬란은 몇 번이나, 정말로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제 기분 탓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정확히 같은 색입니다.’

황실 기사가 황녀를 앞에 두고 그렇게나 여러 번 똑같은 거짓을 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 눈동자가 희귀한 색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듣고 보니 검붉은 눈을 본 적이 없긴 해.”

올리비아가 크라이어의 눈가를 살며시 매만지자 푸른 눈동자에 검붉은 시선이 느릿하게 차올랐다.


“슈가를 제외하면.”

덧붙인 말에 크라이어의 미간에 미미하게 금이 갔다.

혹시 아들 아니냐던 아이작의 헛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따끈하고 보드라운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늘어놓고 보면 결국 고대신과 관련이 있는 놈들뿐이군.”

“그렇지.”

가장 피하려던 가정이었지만, 그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사냥제에서 일어났던 작은 소란의 배후가 그레타라는 사실은 뻔히 알고 있었다.

몰랐던 건 그런 연극을 대체 무슨 목적으로 했던 건지, 그리고 연극이 끝난 후에 왜 보상으로 고작 호위 하나를 들이려고 했던 건지였을 뿐.


“호위 운운하기에 무슨 속셈인가 했더니. 빌어먹을 고대신의 노예를 불러왔다는 말이 잖…….”

올리비아는 말을 하다 말고 주춤했다.


“아니 당신이 노예라는 말은 아니고. 수족이라고 하자. 수족. 이것도 아닌데? 인질? 포로?”

“노예건 수족이건 낙인이 있는 이상 본질은 같다.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크라이어는 진실로 상관없다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손장난을 치며 답했지만,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냉큼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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