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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보나 마나 황녀님을 만나러 가셨겠네. (108/146)


#108. 보나 마나 황녀님을 만나러 가셨겠네.
2023.04.06.


얼굴이 붙잡힌 채 신음하며 버둥거리던 남자가 힘이 빠져 축 늘어질 때쯤 아이작이 밭은 숨을 가다듬으며 돌아왔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 지옥 같은 훈련을 견딘 이후 이렇게 숨이 차도록 달린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사용인 한 명이 죽었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진 즉시 크라이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황녀 궁의 사용인이 죽을 일이 무어가 있을까.

지난 정원에서의 사건처럼 치정 싸움이나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의심스러운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이미 알고 있다면 꼬리에 불과한 그자부터 시작해서 몸통을 잡아낼 수 있잖아. 내가 미끼를 놓지 않아도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할 자가 있으니 일이 한결 편해지겠지.’

과연. 죽은 사용인이 올리비아가 말했던 꼬리였던 건가.

하지만 왜 그 사용인을 죽인 거지? 첩자로 쓸 사용인을 황녀 궁에 연속해서 심는 건 아무리 하인데르 후작이라 해도 힘들 텐데.

심지어 이런 식으로 사용인이 죽어 나가면 황녀 궁의 감시는 더욱 삼엄해진다.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아이작이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면 하인데르 후작이 사람 보는 눈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어떤 수상한 부스러기도 남기지 않은 첩자 노릇을 하던 사용인이라니.

설사 그 사용인이 어떤 흔적을 남겼더라도 그를 완벽하게 침묵시킨 놈이 철저하게 은폐했겠지.

비록 그놈이 제 손에 형편없이 잡히기는 했지만, 올리비아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 자연재해에 가까우니 하인데르 후작의 사람 보는 눈을 폄하할 수는 없었다.

잠시 앞뒤를 가늠하던 크라이어는 첩자를 이용할 계획을 이리저리 구상하며 즐거워하던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박하는 사이 그는 그녀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명분은 ‘첩자가 갑자기 제거되었다.’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였지만, 진실을 고하자면 그저 보고 싶었을 뿐.

그는 음습한 욕심을 그럴듯한 명분 아래 숨겼다.


“일단 둘 다 처리해.”

어느새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간 남자를 툭 내려두며 아이작을 향해 눈짓했다.

크라이어의 명령에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앞에 널브러진 놈이라면 몰라도 사용인의 시체는 왜 굳이?

황녀 궁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안 되지 않나?

하지만 그런 의문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자의적으로 판단해야 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다.

아이작은 지금은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때임을 생존 본능으로 알아차렸고, 의문을 밖으로 내는 대신 몸을 움직였다.

그가 흔적이 남지 않도록 뒷정리를 하는 사이 크라이어는 모습을 감추었고, 궁의 복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약한 바람만 맴돌다 사라졌다.

아이작은 크라이어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한 후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보나 마나 황녀님을 만나러 가셨겠네.”

만날 사람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만날 사람’을 생각하는 순간 어째서인지 분홍색 머리카락이 아른거렸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흔들어 지워버린 후 작업을 재개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요한 두 명분의 죽음을 뒤로한 채, 그 밤.

집무실에 있던 서류를 침실까지 끌고 와 눈이 벌게지도록 처리하던 올리비아는 뜻밖의 동료를 얻었다.

물론 펜이 움직이는 시간보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치는 시간이 조금 더 긴 밤이었다.

***

그레타는 티슨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없다고?”

“네. 명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해당 사용인의 용모와 일치하는 자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보니타가 황녀 궁에 심었다던 사용인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평범하게 일을 그만둘 만한 사람을 뚜렷한 목적을 가진 첩자로 포섭했을 리는 없고.


“황녀 궁에서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제거된 거잖아.”

그레타는 미간을 구기며 황녀 궁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당연히 그 사용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이 담긴 시선은 아니었다.

보니타에게 황녀 궁에 첩자를 심으라고 했을 때 그레타는 뭔가 거창한 일을 도모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보통 첩자를 심는 목적은 몇 가지가 있다.

중요한 서류를 빼돌리거나, 그 세력에 속한 다른 이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특정한 사람의 동태를 주기적으로 보고하거나.

하지만 보니타가 황녀 궁에 심은 첩자는 특정하게 어떤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

그 첩자는 언젠가 딱 한 번, 소식을 전해주는 용도로 쓸 예정이었으니까.

머지않은 미래, 크라이어가 황녀의 목을 자르고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피를 황궁에 뿌리는 순간을 전할 메신저로.

물론 크라이어는 올리비아를 죽이겠다고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제국에 온 그레타와의 불쾌하지만 필요했던 만남에서 다른 말을 하긴 했다.


‘노르덴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크라이어는 전쟁을 일으켜 온 대륙을 피바다로 만든 후 고대신을 불러 정화하려던 본래의 계획을 덤덤히 철회했다.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는 통보에도 그레타는 당연히 그가 대륙 전쟁에 준하는 피와 불을 불러올 거라 믿었다.

그래야만 고대신을 이 땅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에 머물러야겠다. 황녀의 곁에.’

이어지는 크라이어의 말을 그레타는 다분히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그분께서 황녀를 필두로 황궁을 모조리 불태우는 것을 시작으로 이 대륙에 아름다운 정화의 불꽃이 피어오르리라.

그레타가 지닌 믿음의 기원은 크라이어가 첫 번째 낙인을 가진 죽음에서 부활한 고대신의 첫 번째 전사이자 노예라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을 부여받은 그가 감히 신을 증오하거나 신에 항거할 거라 전혀 생각지 않았다.

크라이어가 그레타와 그레타의 아비인 마법사와 지낼 당시 지독하게 말과 표정이 없었던 것이 그레타의 착각을 부추겼고, 올리비아와 만난 이후에는 의식적으로 고대신을 향한 적의를 숨겼기 때문이다.

노르덴국의 중앙궁 지하에 제단도 무사히 완성되었고, 고대신을 일부분이나마 불러 올 만한 피의 수급도 시작 단계이지만 진행되고 있다.

제 손발이 될 도구인 티슨도 잡음 없이 제국에 들어와 곁을 지키고 있다.


“으…….”

그레타는 불뚝 솟은 이마의 핏줄을 누르며 신음을 삼켰지만, 도구에 불과한 티슨은 그녀에게 시선도 한 조각 주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도구가 인간을 걱정할 리는 없었으니까.

밀물처럼 밀려왔던 통증이 썰물이 되어 서서히 잦아들었지만, 곧 다시 시작될 것이다.


‘신의 힘을 사용하는 대가를 치러야지.’

이미 제 손으로 죽여 없앤 아비가 어느 과거에 속살거렸던 목소리가 웅웅 거렸다.

힘을 갈구하면서 우연히 고대신을 발견한 마법사였던 아비는 그레타를 앞세우며 힘의 대가, 신을 모시는 대가를 모조리 감당하게 했다.

힘을 받을 당시의 심정 따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크라이어를 찾은 이후 그레타는 기쁘게 대가를 감수했다.

적절한 피와 살이 제공되지 않으면 제 몸을 깎아 먹는 대가를.

당연히 그레타도 자신을 희생하여 죽을 생각은 없었다.

신의 의지를 받들고 이어 나갈 이는 오로지 자신과 그분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필요할 때 힘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도 않았다.

맞이할 내일이 그녀의 욕망 그대로 실현되리라 확신했다.

그 때문에 그레타는 아비도 없이 홀로 티슨의 낙인을 찍었고, 제대로 된 대가를 바치지 못해 이렇듯 그녀 홀로 모든 반동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노르덴 국의 인형을 제어하는 일에도 상당한 대가를 소모하고 있던 와중에 무리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

아직 필요한 만큼 피를 보지 못했지만, 도구가 생겼으니 사냥을 지시하면 될 터.

게다가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곧 그분이 움직이겠지.

대륙 전체를 정화하면서 바치는 피와 고통을 신에게 진상한다면, 자신은 이 대가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그레타의 맹목적인 희망과 믿음은 그녀가 깜냥을 벗어난 힘을 쓰며 대가를 감수하는 만큼 비정상적으로 크기를 키웠다.

모든 것을 불태우길 원하는 신을 모시면서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그레타였지만, 그녀 역시 인간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시도 때도 없이 치밀어 오르는 아픔에 적응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참고 참을 수밖에 없는 그녀의 신경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고, 인내의 끈은 얇아져만 갔다.

더해서 그레타가 바라는 희망과 믿음은 어디까지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현재의 그녀는 분명히 영광된 신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 둘 삐걱거리며 거슬리는 균열이 밟히고 있었다.

그레타는 다시금 치미는 아픔에 입안을 잘근잘근 물다가 짜증스럽게 명령했다.


“내가 말하면 보니타를 몰래 데려와. 변명할 기회는 줘야지. 제거되었다면 새로운 것도 필요할 테니.”

“네.”

티슨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딘가 어색하기만 했다.

생명을 뜻하는 피와 비슷한 검붉은 눈동자에서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도구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태양보다 뜨겁고 빙하보다 차갑게 이글거리던 크라이어의 검붉은 눈을 떠올리던 그레타가 마침 생각이라도 난 듯이 물었다.


“힘은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지? 그분께서 정화를 시작하실 때 적어도 방해는 되지 말아야지.”

티슨이 답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도구인 주제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는 티슨을 향해 그레타가 입매를 비틀고 말을 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가뜩이나 좋지 않은 기분이 더욱 저조해진 그레타가 노크를 무시하려는데 티슨이 높낮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가 왔습니다.”

그에 그레타의 눈꼬리가 확 치켜 올라가다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제국이 붙인 감시인 호위를 불렀었지.


“들어와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소리 없이 문이 열리며 갈색 머리칼의 훤칠한 기사가 나타났다.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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