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 잡아 먹히는 줄 알았어 (107/146)


#107. 잡아 먹히는 줄 알았어.
2023.04.03.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반사적으로 목을 뒤로 뺐지만, 크라이어가 뒷목을 잡은 탓에 시도로만 그쳤다.

입술께로 느껴지는 미지근한 숨에 차마 입을 벌리지 못한 올리비아가 손을 들어 어설프게 그의 어깨를 꾹 밀었지만, 단단한 어깨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렇게 올리비아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순간.


“생각을 했다고.”

앞뒤 없이 나온 나지막한 목소리는 어쩐지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을 닮아 있었다.

저절로 등에 힘이 들어가 빳빳해진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벌새의 날개처럼 빠르게 파닥거렸지만, 그 아래 위치한 입술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크라이어는 우묵한 시선이 올리비아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갈대처럼 흔들거렸다.


“생각, 했다고 했지 않나.”

그 뒤에 생략된 ‘나를’이라는 목적어가 귓바퀴를 간지럽히는가 했더니 어느새 제 목덜미에서 떨어진 그의 거친 손가락이 스치고 있었다.


“해……했어.”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나온 말에 크라이어는 마치 칭찬이라도 하듯 그녀의 귓불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그 덕분에 아주 조금, 정말이지 약간의 거리가 생겨 입술을 간질거리던 데일 듯 뜨거운 숨결이 둘 사이에 흩어졌다.

그가 문질거리는 귓불은 물론이거니와 귀 끝까지 발갛게 익은 올리비아가 바짝 마른 입안에서 혀를 굴리다 말했다.


“어…… 그.”

“생각.”

크라이어가 세 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나서야 올리비아는 그 말에 겨우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었다.


“생각. 그렇지. 응. 당신 생각을 많이……해서.”

“나를 말이지.”

“그렇다니까.”

올려다보는 그녀의 호수 같은 눈동자에 그의 핏방울 같은 시선이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마치 제가 올리비아를 헤집고 들어가 물들이는 것 같아 크라이어의 눈매가 만족감에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런 그를 정면으로 마주한 올리비아는 바짝 붙어 있던 조금 전보다 더 초조했다.

배 안쪽이 부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심장께가 간질거리기도 하고.

귓가가 뜨거워지다 못해 얼굴 전체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그를 향한 제 마음을 자각도 하지 못할 만큼 멍청이는 아니다. 섣불리 외면해서 불씨를 더 키울 바보도 아니고.

그렇지만 암묵적으로 동의했지 않나.

지금은 묻어두자고. 묻어…… 두자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사냥꾼처럼 저를 보는 크라이어의 시선을 피해 올리비아는 눈을 굴려 빈 허공을 쳐다봤다.

올리비아만을 오롯이 담고 있던 크라이어는 그녀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로서는 급할 것이 없었다. 아니, 다른 방향으로 급하기는 하지만.

제 욕망대로 손을 댔다면 이미 한입에 삼키고도 남았으리라.

하나 굳이 그렇게 해서 눈앞의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그녀의 뾰족한 눈초리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기는 하지만.

크라이어는 부끄러움이나 감정적 동요를 감추기 위해 부루퉁하게 굴던 올리비아를 떠올리며 그녀의 귓불을 지나 턱선을 쓸어내렸다.

목까지 붉게 물든 것을 보는 순간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팔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 이상은 참아냈다.

급할 거 없어. 크라이어는 스스로에게 목줄을 걸며 되뇌었다.

이미 한참 전에 결정했지 않나. 그녀가 저를 놓더라도, 저는 그녀를 놓지 않겠다고.

낙인을 지우기만 하면 그대로 서로 갈 길이나 가자던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지 않은 건 올리비아다.

그녀는 단지 저를 자유롭게 해준다고 했을 뿐.

그러니 자유를 되찾은 그는 기꺼이 그녀의 곁에 남으리라.

게다가.


‘이 이상은 전부 끝나고 말할 거야.’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꼭! 꼭 말하라고. 나보다 먼저 말해!’

 
그녀의 약속을 받았지 않나.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은 역시 ‘나’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토록 곁에 두고, 곁에 있고, 한순간이라도 눈을 떼고 싶지 않은 존재가 버젓이 제 심장 어름에 존재한다.

그리고 올리비아 역시 그와 같다고 공언해주었다.

아아, 조금쯤은 괜찮겠지.

그녀를 핥아 내리듯 느긋하게 뜯어보던 크라이어는 여유롭던 시선과는 달리 올리비아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돌리며 성급하게 입술을 겹쳤다.

조금 메마른 감촉이 제 입술에 내려앉기 전 올리비아는 분명 피할 수 있었다.

제 뒷목을 감싼 그의 손은 어느샌가 사라졌고 어쩐지 그가 다시 저를 끌어당기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런데도.

피하지 않고 그와 입술을 맞댔다.


 
그래. 말 그대로 맞대기만 했다.

처음은 아니었다. 두 번째도 아니었고, 사실 몇 번째인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싶었지만…….

파고들지 않는 그와 입술을 열지 않는 그녀.

서로의 숨이 콧날을 타고 흘러 미미한 장미향과 서늘한 바람 냄새가 뒤섞여 흩어졌다.

서로의 시선이 얽히고 소소리바람이 한차례 쓸고 나간 후, 크라이어가 느릿하게 입술을 비비며 고개를 틀었다.

맞붙은 입술에서 피어오르는 열감과 함께 숨결이 전해진다.

자연스럽게 열리는 입술 사이로 침범한 크라이어는 제 욕심의 반쯤 제멋대로 헤집고 다녔다.

부드럽게 시작된 입맞춤이 점차 조급하게 바뀌어 숨을 쉴 틈조차 나지 않았다.

한참이나 후에 그가 물러났지만, 숨이 차올라 헉헉거리는 올리비아의 입술에 몇 번이나 쪼듯이 입맞춤을 남겼다.

숨이 모자라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 쿡 찌르면 핏방울이 나올 듯 상기된 얼굴을 한 올리비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잡아 먹히는 줄 알았어.”

내뱉은 당사자에게도 잘 들리지 않는 그 말을 한 톨도 놓치지 않고 잡아낸 크라이어는 눈가를 길게 접어 웃으며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

희끗한 달무리만이 구름 낀 하늘에서 배회하는 새벽.

크라이어는 황녀궁 내에서 서서히 퍼지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느긋했지만, 궁을 서성거리는 먹잇감을 놓칠 가능성은 없었다.

피 냄새가 서서히 짙어지자 그는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몸을 맡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먹잇감이 나타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휘감아 누가 봐도 수상쩍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지만, 은은하게 흐르는 비릿한 향은 그의 손에 피가 배었다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스름하게 비치는 흐릿한 달빛에도 그림자 속에 파묻힌 검붉은 눈은 남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훤히 확인했다.

최대한 움직이기 편한 복장, 복면으로 가린 얼굴. 단련되어 거친 손과 소리를 죽인 발걸음까지.

전의 쓰레기와는 결이 다른 놈이군.

크라이어가 황녀 궁에 자리 잡을 당시 전 대륙에서 그처럼 올리비아의 눈에 들어 ‘황녀의 기사’가 되겠다며 무늬만 기사인 놈들이 잔뜩 왔었다.

그리고 내일이 없는 놈들처럼, 아니 내일이 없는 놈들이 밤마다 황녀궁에 몰래 숨어들어 올리비아의 방에 기어들어 가려고 했었고.

그중 단 한 놈도 크라이어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빠져나간 놈은 없었고, 그런 쓰레기와 결이 다른 놈이라 해도 다를 것 없다.

결국 치정 문제긴 했지만, 정원에서 올리비아가 예상치 못하게 습격당한 이후 크라이어는 황녀궁 전체에 제 기감을 퍼뜨렸다.

타인의 말소리와 바닥을 두드리는 발걸음, 숨소리와 심장박동까지 온종일 그의 귀를 괴롭혔지만 올리비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인 이상 나갈 일은 없다.


“커헉?”

남자는 제 앞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전혀 몰랐고, 무지의 대가는 몸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누구 피를 묻힌 거지.”

크라이어는 한 손으로 남자의 머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눈썹 한 올 미동도 없는 무표정과는 달리 남자를 들어 올린 팔에는 핏줄이 불거지기 시작했고, 머리가 터질듯한 압력에 남자의 발버둥이 한층 거세졌다.

그리고 그런 크라이어의 두 어 발자국 뒤에서 아이작은 입을 뻐끔거리다 꾹 다물었다.

그렇게 주둥이를 틀어쥐고 있는데 무슨 답이 나오겠습니까…….

할 말이 있었지만,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기분도 안 좋아 보이시는데 괜히 끼어들었다가 좋은 꼴은 못 보겠지.

그러기를 잠시, 어린 아기나 아이도 아닐진대 건장한 남자의 발이 타의로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으, 끄으, 끄으으윽.”

크라이어의 손이 남자의 얼굴 전체를 쥐고 있기에 입을 벌릴 수 없는 남자의 비명과 닮은 신음이 복도를 휘도는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아이작은 창백해진 낯으로 뒤로 한발 물러났다.

물론 덩치 하나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이는 제국의 기사들 중에서만 찾아도 쉬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전혀 알지 못하게 접근해, 무슨 짓을 당하는지 당하기 직전까지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단숨에 단련된 무인의 모가지를 틀어쥘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지 않을까.

게다가 아이작은 크라이어의 지근에 있는데도 살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 말인 즉 온전히 저기서 목에 핏대를 세운 채 헛된 발버둥을 치는 놈에게만 살기가 집중되고 있다는 말인데…….

크라이어가 내뿜는 살의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아이작은 혀를 내둘렀다.

그 악랄한 살기를 이렇게까지 제어한다고?

역시 괴물이잖아.

괜히 나왔네. 뭔가 냄새가 나기에 혹시나 해서 나왔더니 역시나 자신이 나올 필요는 전혀 없었다.

좋아. 그럼 이대로 물러날까.

질린 기색으로 슬그머니 그림자로 스며들려던 아이작은 제 이마에 닿는 시선에 재빠르게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명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빙하에 갇힌 용암같이 차갑게 식은 검붉은 눈동자에 곧바로 증발했다.


“이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나.”

“알 수 없어도 알 수 있죠. 물론입니다.”

아켄델의 교육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면서 무슨 일이건 흔적을 지우는데 탁월한 만큼 반대로 흔적을 찾는대도 유용했다.

아니, 혹여 아이작이 아켄델이 아니었더라도 없는 흔적을 만들어서라도 저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아이작은 결단코 크라이어의 한 손에 머리가 짜부라진 채 공중에 등등 뜨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까.

크라이어의 암묵적인 허락에 아이작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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