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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계획이 없더군. (104/146)


#104. 계획이 없더군.
2022.08.29.


-퍼엉.

크라이어에게 복수를 걷어차인 티슨은 마치 북이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뒤쪽 나무에 처박혔고, 머리가 터질뻔한 외교관은 어벙한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외교관은 제 코앞에 선 이를 올려다보았다.

깎아지르는 듯한 턱선과 역광을 받은 탓인지 검게 보이는 검붉은 눈동자.

화, 황녀 전하의 기…….

외교관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는 눈앞에서 사라졌고, 주저앉은 외교관의 뒤쪽에서 먼지구름이 휘몰아쳤다.

크라이어는 검조차 뽑지 않고 티슨과 뒤엉켰다.

-콰앙!

도저히 맨손과 맨몸이 부딪치는 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귀를 찢는 굉음이 울린 건 1분 남짓.

시야를 가리는 뿌연 먼지 사이로 검붉은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본 티슨은 확신했다.

자신과는 다른 진짜. 신의 선택을 받은 전사.

이 계획은 실패다.

일꾼으로 위장해 사냥제에 숨어들고, 처리한 일꾼을 이용해 시선을 돌린 후 외교관들의 머리를 터뜨린다.

그리고 대단원으로 그레타 님에게 위협을 가하고 사라지면 끝.

아주 단순하고 무식한 계획이었지만, 티슨이 받은 힘은 그것을 실현할 힘이 있었다.

정교한 계획이 없어도 그가 가진 힘이라면, 그레타의 명령대로 이 자리에 있는 외교관의 반절은 정화되었겠지.

하지만 힘으로 행사하는 일은 더 큰 힘이 막아서면 너무나도 손쉽게 무너지는 법.

단 하나도 정화하지 못한 채 티슨은 반사적으로 그레타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막사가 엉망진창이 될 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가, 지금 막 밖으로 한 발 내디디고 있었다.

티슨과 그레타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 실패를 탓하는 경멸이나 분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알 수 없는 만족감만 가득했을 뿐.

눈 한 번 깜박이지도 못하는 아주 짧은 시간 티슨은 그레타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레타는 티슨을 외면했다.

정말로 짧은 그 찰나가 신의 뜻을 받들어 대륙을 정화시키자는 같은 목표를 가진 주인과 도구 사이에 지극히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무언가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둘 사이에서 파열음이 울렸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기에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티슨은 제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막사 밖으로 나온 그레타를 향해 돌진했다.

이 자리에서 가치 없는 것들을 정화 시키지는 못했지만, 애초부터 ‘계획’은 그레타의 명령이 아니었다.

그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위험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주제를 모르는 황녀에게 경고를 해줘야지.’

티슨의 귓가로 그레타의 명령이 웅웅거렸다.

황녀에게 할 경고는 이미 준비를 해뒀으니 남은 건.

-콰직!


“꺄아아악!”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레타의 비명이 울렸다.

날카로운 고음에 가뜩이나 넋이 나갔던 이들이 아예 허둥지둥하는 사이, 크라이어는 심드렁한 얼굴로 티슨의 뒤를 쫓았다.

단숨에 티슨과 그레타가 있는 곳에 도달한 그는 귀찮다는 듯 무너지는 막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그레타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성공했어요. 크라이어 님.”

대체 뭘?

그런 의문은 비단 크라이어에게만 입안의 가시처럼 돋지 않았지만, 티슨은 그레타의 눈짓 한 번에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났고, 무너지는 막사에 가려 그 장면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

남은 건 티슨이 뒤집어썼던 일꾼의 시체뿐.

지탱하던 기둥을 티슨이 부숴버린 탓에 완전히 무너진 노르덴국의 막사 뒤로 그레타와 크라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삼류 연극을 따로 보러 가지 않아도 되겠어.”

가출하는 어이를 당긴 올리비아가 중얼거렸지만, 그에 답할 이는 곁에 없었다.

노르덴국의 막사에 핏자국이 생기기도 전에, 눈 깜박할 사이 크라이어는 그녀와 훌쩍 멀어졌다.

그는 순식간에 얼이 빠진 외교관 한 명을 구하고 습격당한 그레타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야말로 삼류 연극에나 어울릴법한 위기와 구원이 아닌가.


“저게 위험이고, 저게 계획이라고? 순식간에 끝나기는 했네.”

그녀는 그레타의 막사가 피칠갑이 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조리 지켜보면서 허탈함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내가…… 내가 저런 것들 때문에 몇 번이나 죽었다니.”

허망함이 절로 밀려왔다. 계획이고 뭐고 없……잖아.

처음 핏덩어리가 날아들었을 때는 바짝 긴장했던 자신이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계……획이라는 게 시선을 돌리려고 막사에 저런 짓을 해놓고 외교관을 죽인 후에 그레타도 그렇게 될 것처럼 꾸미려고 했던 건가?”

이제껏 본 정황을 미루어 꽤 사실에 가까운 계획을 추론한 올리비아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냥 처음부터 그레타를 인질로 잡으면 되지…… 않아? 저 핏덩어리는 왜 던진 거야? 외교관은 왜 죽이려고 한 거고? 그레타에게 제국의 빚을 지우려면 다른 외교관들에게는 손대지 말아야 하잖아. 그래야만 그레타에게 돌아가는 보상이 많을 테니까.”

올리비아는 더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이런 소동이 없었더라도 사냥제는 일찍 접어버릴 예정이었으니 얼른 마무리나 하고 돌아…….


“아니, 진짜 저게 계획이었다고?”

고작 저런 것들이 제국을 멸망시키고 대륙을 불태웠다는 사실에 올리비아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외교관들과는 다른 의미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그녀가 간신시 제정신을 수습한 건 크라이어를 눈에 담은 후였다.


“아, 그래. 저 괴물.”

그녀는 깨달았다. 그 어떤 허접하고 부실한 계획조차 필요 없이 단신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끝내버린 존재가 있지 않나.


“그 괴물이 이번 생에는 내 곁에 있…….”

지금은 없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저 여자에게로 가버렸으니까.

그 순간 가시를 삼킨 것처럼 속이 불편해졌다.

아니, 명치 끝이 얼얼했다.

지금 보이는 저 광경이 한낱 연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냥제에 오기 전 크라이어가 말했으니까.


‘그렇군. 오늘이 사냥제였어.’

‘그래. 사냥…….’

고개를 주억거리던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의문이 어린 그녀의 시선에 크라이어가 답했다.


‘그것이 무슨 행사인지는 말을 하지 않았거든.’

‘말 빙빙 돌리지 말고.’

‘빙빙 돌릴 것도 없다. 오늘 행사에서 뭔가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한 것뿐이니까.’

‘뭐? 사고?’

올리비아는 더더욱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고, 이어지는 크라이어의 말에 그 의문은 깊어지기만 했다.

그의 팔을 탁탁 치며 물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위험이야? 사고라니, 진짜 사냥제도 아니고 사냥도 안 하는 황궁 사냥제에서 무슨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고? 마법인가?’

‘마법은 아니라고 했다.’

‘마법이 아니라면 암살자? 아니, 암살자가 황궁에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노르덴국에서 온 사람들은 그레타를 제외하고 전부 먼지까지 털어봤다고. 그렇다고 제국에서 고용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손가락을 하나씩 꼽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왜 이런 추측을 하고 있지, 그래서 계획이 뭐래?’

무슨 일이 일어난다. 라는 막연한 사실보다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누구 때문에 일어난다. 라는 구체적인 사실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그레타가 입에 담은 ‘사고’를 막을 수 있으니까.


‘못 들었다.’

‘뭐?’

‘못 들었다기보다는.’

잠시 말을 끊은 크라이어를 향해 바짝 다가선 올리비아가 아예 까치발을 하고 그의 얼굴에 제 얼굴을 들이밀려는 찰나.


 


‘계획이 없더군.’

‘뭐가 없다고?’

‘구체적인 계획은 그것에게도 없다고 했다.’

올리비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일을 하기는 할 거지만 계획은 없다?’

크라이어의 답이 나오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황궁에서 사고를 치는 것이 무슨 애들 소꿉놀인 줄 아는 거야? 하다못해 애들 소꿉놀이에도 설정과 이야기가 있다고.’

자신은 한 번도 소꿉놀이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있는 사용인들의 잡담은 들었다.


‘그보다 올리비아.’

크라이어는 제가 이름을 부르자 어깨를 움찔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알아내지 못했거나 필요에 의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럴 리가. 그 여자는 당신이 자갈을 금이라고 해도 믿을 테고, 당신은 내가 금이 자갈이라고 해도 믿을 거잖아.’

확신에 찬 올리비아가 턱을 추켜들자 크라이어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지 않나.

올리비아가 당장 제 눈앞에 돌멩이를 흔들며 이건 금이야, 라고 하면 그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리고…… 당신이 자갈 보고 금이라고 해도 난 믿을 거고.’

마지막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크라이어가 올리비아를 당겨 빈틈없이 품에 안고 있었기에 그는 한 음절도 빠뜨리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과거를 헤아리던 올리비아의 눈이 다시 현재를 담았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그녀가 긴 숨을 내뱉었다.


“후우.”

맞아. 저건 다 계획됐던…… 아니 계획은 없지만, 아무튼 예정되어 있던 일이니까 이렇게 불편해할 필요는 없어.

없지, 없는데…….

이성으로 아는 것과 본능이 느끼는 건 가끔씩 괴리가 있지 않던가.

올리비아의 입꼬리에 형언할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그건 세계 평화를 위해 뛰는 선한 사람은커녕 황녀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극히 힘든 미소였다.

그야말로 질투, 집착, 소유욕 등 부정적이고 사람을 진창으로 끌어내리기 딱 좋은 감정들이 온통 뒤엉킨 결과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 감정을 부정하지도, 털어내지도 않았다.

그가 질투했듯이 그녀도 질투한다.

말로만 놓고 보면 꽤 절절하고 진실된 사랑이지 않나.

물론 지금 당장 그레타의 저 황홀해 하는 얼굴을 발로 차버리고 작신작신 밟아버리고 싶다는 부가적인 생각이 따라오는 걸 보면 그리 감성적이지는 않았지만.

속이 불편하다 못해 이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애초부터 아름답고 말랑말랑하며 설레고 보송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잖아.

오히려 상처 입은 것들끼리 서로의 피를 핥아대며 위로하는 것에 가깝겠지.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크라이어의 등에 손을 대는 그레타를 본 올리비아의 미소가 한층 더 화려해졌다.


“연극이 끝났으니 슬슬 마무리를 하러 가야겠지.”

그런 그녀의 머리 위쪽, 막사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지지대는 티슨의 손을 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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