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반드시 날 구할 테니까.
(103/146)
103. 반드시 날 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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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반드시 날 구할 테니까.
2022.08.25.
자신을 찾아낸 그레타가 말했다.
‘그러면 왜 나를 찾은 겁니까.’
‘내가 선택했으니까.’
이상한 말이었지만, 티슨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이질적인 가면의 경계인 목 근처를 긁적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면 안 돼. 동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그래야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다고.”
낙인에서 비롯된 힘은 그를 충만하게 만들었지만, 그 힘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분은 힘을 쓸 수 있다고 했었지. 선택받았으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티슨의 흐릿한 시선이 황녀 궁에 박혔다.
저곳 어딘가 자신처럼 그레타의 선택이 아닌, 신의 선택을 받은 진정한 전사가 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궁을 바라보던 티슨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에게 그레타가 말했던 진정한 전사란 큰 의미가 없으니까.
당연히 진짜니 가짜니 하는 구분에서 오는 구태의연한 질투도 없었고, 열등감도 느끼지 않는다.
티슨은 단지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제 안에서 넘치는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 하니 오히려 배움이라도 청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건 오늘 만나기는 할 테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티슨의 메마른 목소리가 나뭇잎이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뒤섞여 사라졌다.
그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유리알 같은 눈으로 속속 도착하고 있는 외교관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 주변에는 호위를 맡은 제국 기사들이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살폈고, 사냥제 준비를 마무리하던 이들이 그들의 시선에 묵묵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하께서 오시면 물러나겠…….”
“아아, 미리 들었…….”
바람결에 희미하게 실려 온 말은 그레타에게 들었던 대로였다.
‘사냥제 시작 전에 호위들이 전부 빠질 거야. 우스운 일이지. 제국의 황궁에서는 그 어떤 위협도 없을 거라 장담하는 의미로 그리한다더군.’
그레타는 평소보다 더 창백한 낯에 비소를 머금었다.
‘결국 호위라고 붙였던 놈들도 전부 감시자라는 걸 숨기지도 않고, 뻔뻔하게 한 번 더 주지시킨단 말이야.’
작은 거울 안의 그녀는 머리를 흔들다 멈칫했다.
‘그분께서는 계속 자리에 남으시니 상관없겠지. 그분께서 반드시 날 구할 테니까.’
‘그분이시라면.’
그에 그레타의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황녀 곁에 남는다고 하셨어.’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짜증스럽게 명령했다.
‘반쯤 정화시켜. 황녀는…… 아직 쓸모가 있으니 내버려 두고.’
티슨의 눈동자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지만, 그의 입꼬리는 미미하게 뒤틀렸다.
그레타가 시킨 일을 시작하는 순간, 저기 모여 있는 인간의 절반 넘게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머리가 터지겠지.
호위도 사라진 마당에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저기에서 반쯤 정화되고 나면 이 세상에서 정화 될 놈들이 조금쯤은 줄겠지.
코가 삐뚤어질 만큼 심한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생각을 하면서도 티슨의 입가는 여전히 조금 뒤틀린 채였다.
그의 눈에는 사람 머리통이나 요리하기 직전 호박이나 다름없이 보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리라.
아니, 호박은 요리 재료라도 되겠지만 인간이란 그저 정화되어 사라져야 할 것들이 아닌가.
그러니 정화해야만 한다.
세상 전부. 그래. 나를 포함해서 전부…….
그 순간 그의 몸속에서 겉돌던 힘이 제자리를 찾는 듯 꿈틀거렸다.
뒤틀렸던 티슨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이것이 내 동기인가.”
이미 전부 체념해버려서 분노나 증오조차 다 태워버린 그가 억지로 긁어모은 재에 희미한 불씨가 튀었다.
세계의 정화를 위하여.
고대신을 모시던 마법사. 그레타, 그리고 보니타 하인데르와는 다른 광신이었다.
만약 올리비아가 지금 티슨의 머릿속을 열어볼 수 있었다면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말했을 것이다.
사춘기, 그러니까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치게 힘차게 보내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그렇게 거칠고 불안하게 사춘기를 보낼 거면 혼자 좀 어디 가서 머리를 박지 왜 온 대륙에 불을 지르냐고.
하지만 그런데도 티슨의 속에 자리 잡아 꿈틀거리는 것이 올리비아가 보기에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일지는 몰라도, 그 위협은 실재했다.
모조리 불태워 주마! 라고 외치는 놈이 성냥불을 들고 있다면 비웃음거리가 되겠지만, 정말로 온 세상을 살라 먹을 만큼 거대한 불을 들고 있다면…….
“황녀 전하께서 오십니다!”
숲지기의 우렁찬 외침과 동시에 티슨은 일꾼의 거죽을 뒤집어쓴 목을 긁적이며 소리 없이 나무 아래로 뛰어 내려섰다.
***
케슬란은 연신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황녀 전하께서 오신 이후 외교관의 호위를 맡던 기사들과 기사단장들이 전부 한데 모여 무력을 뽐내는 와중에도 뭔가…….
뒷골이 서늘해.
그는 누구보다도 굳건하고 믿음직스러운 제국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등은 이미 땀으로 젖어 있었다.
“오오, 대단하군요!”
“역시 제국의 기사단은!”
“후계도 탄탄하기 그지없고!”
제국 기사단의 무력시위에 외교관들은 일제히 찬사를 보냈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말들은 각자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권위에 걸맞은 검을 새롭게 제작하여…….”
“국경으로 파견 나가는 기사단의 보급로를 개척하는 일에 손을 보태면…….”
대놓고 각자가 가진 것들을 뽐내는 외교관들을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로 내려다보던 올리비아가 이내 기사단을 향해 눈짓했다.
-철컥.
가장 앞서 있던 기사단장들이 양손으로 검을 잡고 곧게 세우자, 오열을 맞춰 정렬한 기사들 전부가 일제히 같이 검을 세웠다.
햇살 아래 눈이 아픈 빛을 뿌려대는 검을 본 외교관들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 단숨에 입을 다물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그들의 코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황궁 사냥제가 원한 대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하자, 올리비아는 기사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의 명에 따라 예정대로 외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기사들 중 케슬란은 그때까지도 갈등하고 있었다.
단순히 예감만으로 이 자리를 비울 수 없다 간언해야 하는가.
그는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노르덴국의 외교관, 그레타가 있는 방향을 흘긋 바라보았다.
‘시간’을 한 번 잃은 이후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없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근거 없는 자신의 감만으로 느껴지는 불길함과 타고난 소심함으로 인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를 꽉 물고 동료의 걸음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실컷 힘 자랑을 한 기사단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시선은 꽤 복잡했다.
대륙 전쟁이 일어난 후 누구보다도 앞서 싸웠고, 누구보다도 끝까지 싸운 이들.
그리고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이들, 충성하던 제국, 마지막 남은 명예까지 전부를 잃어버린 이들.
이번 생에는 부디 아무것도 잃지 않기를.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니까.
이윽고 기사단의 등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올리비아는 오른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사냥제를 시작하지.”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 떨어졌는데도 여타의 다른 사냥제처럼 우레와 같은 함성도, 바쁘게 움직이며 활과 화살을 정비하거나,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도 없었다.
그저 외교관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인 후, 철저하게 외부와는 단절된 각자의 막사로 돌아갔다.
그들은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시장인 제국과의 새로운 거래를 위하여 자국에서 준비한 것들을 어떻게든 돋보이게 하려고 부산스럽게 준비했다.
올리비아는 그 모습을 감흥 없는 눈으로 살피며 중얼거렸다.
“사고는 언제 일어날 거 같아?”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질문에 짧은 답이 돌아왔다.
“곧.”
전혀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었지만, 올리비아는 미간을 찌푸리거나 다른 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졌을 뿐.
“이쯤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계획이 없는 계획에서 계획을 추측하라니.”
“그렇게 들으니까 정말 말도 안 되네. 확실한 건 하나였지?”
“그래. 노르덴국의 외교관이 위험에 처하고 막지 못한 제국은 그것에게 사과의 표시로 무언가를 내놓는다.”
오늘 열리는 행사가 사냥제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말하지 않은 그레타의 계획의 큰 틀.
그것을 다시금 크라이어를 통해 들은 올리비아는 몇십 분 전 그에게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정확히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위험이야.”
이제까지 그레타는 다른 외교관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심지어 크라이어를 열렬히 바라보거나 자신을 향해 이글거리는 적의를 담은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올리비아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지만, 그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국의 막사에서 외교관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철퍽.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그 사건이 벌어진 순간, 누구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 황궁 내의 숲. 황녀가 자리한 시간에 그런 사건이 일어나리라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정된 시간에 맞춰 각자가 준비한 최고의 것을 손에 쥐고 결연한 얼굴로 막사를 나선 외교관들은 멍청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노르덴국의 깃발이 펄럭이는 막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순간적으로 제 눈을 의심한 외교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한번.
-주르륵.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천막을 따라 흘러내린 건 피에 물든 고깃덩어리였다.
-철퍽.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또 하나가 노르덴국의 깃발을 더럽히며 뭉개졌고, 몇 초 후.
“꺄, 꺄아아아악!”
“으아악! 으허헉!”
뒤늦게 피 냄새가 진동하는 현실을 인지한 외교관들은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질렀다.
아주 오랫동안 평화로웠던 대륙에서 기사나 검을 다루는 자가 아닌 외교관이 피를 볼 만한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
그 생생하고도 선연한 피비린내와 눈앞을 채우는 악몽 같은 광경에 외교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노, 노르덴……!”
상황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외교관들이 간신히 상황을 파악한 직후.
“커허헉!”
노르덴국의 막사 바로 옆에서 어딘가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던 외교관이 제 머리통을 무자비하게 움켜쥐는 손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일단 하나.”
제가 죽인 일꾼의 가죽을 뒤집어쓴 티슨이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머리통을 잡은 손에 힘을 주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