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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그 얼굴이면 되겠네. (102/146)


#102. 그 얼굴이면 되겠네.
2022.08.22.



“이미 적수가 없는 제국이 무력 시위를 할 이유가 있나? 라는 얼굴로 봐도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해.”

그녀는 어느새 펼쳐둔 대륙 지도를 툭툭 두드렸다.


“전쟁 억제. 세계 평화지.”

그에 크라이어의 비죽 솟았던 한쪽 눈썹이 아예 하늘로 솟았다.


“노르덴국, 그러니까 내가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텐데.”

“당연히 당신이 그러진 않겠지. 당신이 없는 노르덴국도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대륙에는 제국과 노르덴국만 있는 게 아니잖아.”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장 여기저기 사이가 나쁜 놈들끼리 개미 다리만 한 명분만 있어도 저희끼리 치고박고 싸우느라 정신없어.”

“흐음, 그런 다툼 정도는 말 그대로 분쟁이지 않나.”

“그렇지. 그렇지만 작은 분쟁을 불씨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잖아?”

올리비아는 산처럼 쌓인 서류를 흘긋 보고 한숨을 삼켰다.

저기에 있는 서류 대부분은 대륙의 평화를 조율하는 제국의 손이었다.

거미줄, 개미굴 그 어떤 비유를 들어도 그보다 더 촘촘하고 세심하며 단단하게 짜인 제국의 평화 조율.


“그렇게까지 용의주도한 놈들은 아니다만.”

“고대신을 위해 정화 어쩌고? 글쎄. 보니타 하인데르 후작이 끼어 있는 이상 정치적 협잡이나 모략도 염두에 두어야만 해. 물론 후작이 워낙 오랫동안 칩거한 터라 외부의 끈이랄 게 없어서 어디까지나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숨도 쉬지 않고 줄줄 뱉어낸 올리비아가 지도를 확 걷어냈다.


“그런 골치 아픈 것들을 제쳐두고라도 전쟁이라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계기로 벌어지기도 해.”

그 말 그대로였다.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 말만 들어도 끔찍하고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법한 것이 터지는 건 언제나 엄청난 계기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말 한마디, 어떤 행동 하나. 혹은 누군가의 긁힌 상처 등.

아주 사소한 계기라도 그것이 연쇄 효과와 대립하는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시작이 된다.


“아무튼 그런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억제하기 위해서는 무력시위가 필요해. 너희끼리 토닥거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 이상 다툼이 커지면 내가 혼내주러 간다! 라는 거지.”

“동네 애들 싸움 같군.”

“쉽게 말하면 그렇지 뭐. 그중에서 제국은 애들 싸움을 멀리서 보다가 말리는 어른 역할이고.”

오만하다 못해 눈살이 찌푸릴 만큼 거만한 말이었지만, 올리비아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작금의 대륙에서 유일한 제국은 그녀의 말대로 타국과 비교하면 애와 어른만큼 차이가 컸으니까.


“그 어른도 괴물에 잡아먹히긴 했지만.”

눈을 가늘게 뜬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가 입꼬리를 당겼다.


“그 괴물은 어른 곁에서 어른 말만 잘 듣고 있으니 상관없겠지. 어른?”

“괴물이 잘도 말하네.”

올리비아는 서슴없이 크라이어를 괴물이라고 불렀고, 크라이어 역시 가감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아닌 제삼자가 본다면 아주, 대단히 이상한 광경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제삼자는 대단히 불행하게도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절대 자의는 아니었다.

다만, 슈가의 낙인과 고통에 관한 보고를 하러 왔을 뿐.

심지어 아이작은 올리비아가 크라이어의 눈을 가릴 때부터 이미 근처 그림자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니, 대체 저 분위기에서 내가 어떻게 나가냐고…….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크라이어도 아이작이 왔다는 사실을 얼마간 깨닫지 못했다는 것도 그에게는 악재였다.

그림자 속에서 그냥 돌아갈까 말까 수백 번 고민하던 아이작은 불현듯 자신의 고약한 주인이라면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런 분위기를 조성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젠장, 그냥 꺼지라는 소리군.

괴물이니 어른이니 하는 소리까지 엿듣고 말았으니, 저 어른 말만 듣는다는 괴물이 자신을 그냥 놔둘 리가 없겠지.

낙인에 대해 뭔가 알아내면 즉시 보고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일단, 슈가의 낙인에 관해서 알아낸 것들을 전해야만…….

아이작은 형식적으로 써온 보고서를 긴급서류뭉치에 슬그머니 올려놓고 그대로 그림자에 녹아 자취를 감췄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던 크리아어는 이윽고 올리비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올 거라고 했었지.”

“아, 그거.”

“그래도 같이 가겠다.”

이유를 물을 거라고 예상해서 답을 내놓으려던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크라이어는 허리를 굽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창백한 핏줄이 보이는 손등에 입술을 깊숙이 내린 그가 속삭였다.


“내 자리는 너의 곁이니까. 나의 황녀.”

 

***

시간을 조금 되돌려 크라이어가 올리비아 곁으로 돌아갔을 무렵.

황궁 사냥제가 열릴 예정인 숲에서 돌아다니는 이들은 과장을 조금 보태 전쟁처럼 바빴다.

대륙의 유일한 제국의 황궁에는 없는 것이 없다, 라는 소리가 흔하게 나돌고 그 말을 믿는 사람도 흔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고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황궁에서 태어나 황궁에서 죽는 이조차 황궁 전체를 다 알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황궁 내부에 자리한 ‘숲’에 대해서만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숲지기는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고함치고 있었다.


“그건 거기가 아니라니까!”

“미쳤어? 공작새를 거기에 풀어두면 누가 잡으라고! 이건 사냥제야 사냥제! 구경이 아니라 사냥을 해야 한다고!”

“거기! 천막은 그렇게 내버려 두고 올리면 먼지가 보이겠나, 안 보이겠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일을 총괄하는 숲지기 아래에서 그를 보좌하는 이들 또한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어어어! 넘어간다, 넘어간다!”

“이봐! 이쪽으로 몇 명 더 보내야 수습할 거 아니야!”

“이봐들! 이쪽으로!”

그들의 손짓 발짓이 섞인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용인들, 그러니까 황궁에서 열리는 행사마다 가장 아래에서 가장 현장에 가까운 실무를 맡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바닥에 불나겠네.”

“그런 소리 할 거면 얼른 움직여서 불을 끄는 게 나을걸.”

“발바닥이 아니라 발등에도 붙어서 안 꺼져.”

“실없는 소리 말고 움직이기나 하라고.”

마른 입술을 미지근한 물로 대충 축인 이들은 천막을 치기 위한 기둥을 나누어 들며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맡은 일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사냥제 준비가 한창일 때.

분명히 ‘황궁’ 내부에 있는데도 광활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숲을 뛰어다니는 그들의 발걸음은 분주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고함치며 뛰어다니는 곳에서 조금 비껴난 곳.

숲의 외곽도 아닌 많은 사람이 뛰어다니며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한 남자가 달리고 있었다.

실무를 맡은 사용인 복장을 한 남자의 벌어진 입에서는 단내를 넘어 말라붙은 냄새가 새어 나왔다.


“허, 허억……. 허억 허억.”

달린다. 달려야만 해. 멈추면 안…….

-으지직.

발아래 마른 나뭇가지가 부서지면서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다.


“으아! 으, 으아아!”

앞으로 고꾸라져 구르기 전에 간신히 중심을 잡은 남자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목구멍은 바늘을 삼킨 듯이 따끔거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달리는 수밖에 없어.

달려야만, 그래야만…….

코로 쉬는 숨이 부족해 벌어진 입가에서 침이 흘렀고, 이미 한계에 다다른 허벅지는 경련했으며 앞뒤로 휘두르던 팔은 허우적거렸다.

그런데도 남자는 달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쯤이면 되겠지.”

차분해서 끔찍한 목소리가 뒷골에 쑤셔 넣듯 박히는 순간.

-쿠당탕!

나뭇가지를 밟고 미끄러졌어도 어떻게든 중심을 세워 달렸던 남자는 달리던 힘을 주체하지 못해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며 형편없이 굴렀다.

그가 구르며 작은 돌이 튀었고, 마른 나뭇가지가 부서졌으며 이리저리 흩어진 마른 나뭇잎이 바스라졌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을 놓을 만큼 심하게 구른 남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키며 눈을 떴을 때.

눈앞에 괴물이 있었다.


“으, 아으…….”

벌어진 입에서는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소리가 흩어졌다.

남자는 뒤로 물러나지도, 그렇다고 앞으로 나서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괴물을 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저 괴물이 나타났을 때 남자는 약한 짐승의 본능으로 도망쳤다.

도망치고 또 도망쳐서, 벗어났다고.

벗어나? 언제부터?

남자의 머릿속은 눈앞의 괴물에게서 촉발된 공포로 곤죽이 되어 마구 뭉개졌다.


 


“음. 그래. 그 얼굴이면 되겠네.”

뭐가? 뭐가 얼굴이면 되는 건데?

남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반사적인 의문은 얼굴을 덮쳐오는 괴물의 손 그림자에 지워졌다.

***



“여기 손 좀 빌려줘!”

누군가의 부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까뒤집으며 숲을 가로지르던 남자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이건 노르덴국 차양이니까 깃 부분 상하지 않게 조심하고.”

“네.”

다른 평범한 이들처럼 남자, 아니 남자의 거죽을 뒤집어쓴 티슨이 얌전히 답하며 묵직한 차양을 받아들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이들 틈에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던 티슨은 그의 손에 없어진 남자의 말처럼 괴물로 보이지 않았다.


“아, 깃이 드디어 왔군! 고마워. 이쪽에 놔두면 돼.”

티슨의 어깨를 펑펑 두드린 이는 곧 다른 이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크게 외쳤고, 티슨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물러났다.

그렇게 사람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일을 하던 티슨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것을 그 많은 이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많기도 하네.”

어느새 넓은 공터에서 벗어나 숲의 초입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 선 티슨은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우글우글 모여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분노는 없었다.

혐오도, 경멸도 어떠한 것도 담기지 않았다.

시체와 다름없는 눈동자 속에서 그나마 간신히 찾을 수 있는 건 형체조차 남지 않은 체념일까.

하인데르가 아이와 사랑을 잃고 세상 전부를 불태우고 싶어 한다면, 티슨은 애초부터 가진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잃은 것도 없었지만, 티스는 자발적으로 고대신의 낙인을 찍기를 원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지. 나는 여기에 있고, 온 세상이 정화되길 원하는데.

지금은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긁었다.


‘너는 그분처럼 선택받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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