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내가 정말 미쳤지.
(101/146)
101. 내가 정말 미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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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내가 정말 미쳤지.
2022.08.18.
무언가 꾹 눌러 참는 듯 눅진하게 가라앉은 검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올리비아는 입만 뻐끔거렸다.
이윽고 크라이어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올리비아가 턱에 힘을 꽉 주며 그의 어깨를 다시 눌렀다.
“그래. 당신……뿐이니까 내 말 좀 들어.”
그녀의 입술을 타고 반복되는 울림에 크라이어는 눈가를 길게 접어 웃으며 몸에 힘을 뺐다.
그가 얌전히 누웠다는 것을 확인한 올리비아가 뭔가 말랑말랑한 공기와 간질간질한 속내가 못내 불편한 듯 괜스레 불퉁하게 말했다.
“무슨 일을 당했고, 당신 과거가 뭔지는 오늘 밤에 아주 자세히 들을 테니까.”
“안 당했다니까.”
“아, 그래. 낙인이 아픈 건 내 탓이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올리비아는 그의 쇄골부근에서 시선을 쉽사리 떼지 못했다.
참을만 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원인이 된 고통이 달가울리가 없었다.
그런 올리비아의 시선을 느낀 크라이어가 피식 웃었다.
“참을 만하다.”
“알아. 몇 번씩 말했잖아.”
제 손이 낙인에 닿으면 더 아프다기에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던 올리비아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튼 오늘은 그냥 쉬어.”
“그럴 필요 없다. 잠시 이대로 있으면 늘 그런 것처럼 괜찮아 질 테니까.”
“내가 그럴 필요가 있어 보여서 그래. 그리고.”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올리비아는 고개를 휙 돌려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말했다.
“오랜만……은 아니고 며칠 만에 봤더니 나도 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고작 며칠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부재는 처음도 아니지 않나.
이전 같았다면 일을 하다 문득 고개를 돌려 그가 늘 있던 자리를 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머쓱하게 다시 일을 시작이라도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가 곁에 없는 동안 너무 바쁜 나머지 그를 떠올릴 틈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보였다고 해서 적응이 필요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데 돌아온 그가 자신과 눈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저 위에서 저 아래까지.
그대로 쿵. 다시 쿵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고, 허리부터 올라온 전율에 옅은 신음을 삼켜야만 했다.
더해서 돌아온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전부…….
떠올리면 아예 얼굴이 새빨갛게 익을 것 같았기에 귓가에 맴도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얼른 지워냈다.
고개를 흔들던 올리비아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손길에 와락 소리쳤다.
“아, 잠깐, 손 치우지 말라니까!”
올리비아는 무의식적으로 제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워버리는 크라이어를 노려봤지만, 발갛게 물든 눈가를 다시 숨길 수는 없었다.
크라이어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눈가를 길게 접어 웃었다.
“좋군.”
그 한마디에 눌러 담긴 감정이 첨예하리만큼 선명해서 올리비아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둘 중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둘 중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두 사람 중 누구도 서로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불과 얼마 전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오래전이었을까.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에게로 기우는 마음의 추를 어떻게든 되돌리려 했다.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조금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지금 바라보고 있는 목표에 집중하면.
그렇게하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미쳤지. 난 미친 거야.
하긴 몇 번을 죽었고 또 몇 번이나 돌아왔는데 정상이면 그게 더 미친 거 아닐까.
어차피 미쳐버린 거, 날 죽인 남자를 사랑하는 것 정도는 미친 축에도 끼지 않겠지.
그리고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콧방울을 툭툭, 장난치듯 건드렸다.
이 남자에게 이미 줘버린 마음을 회수하는 방법 같은 건 몰라.
언젠가 과거의 볼셰이크가 그랬듯이 올리비아도 그랬다.
천천히 고여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넘치는 진심을 도로 가두는 법도 모른다.
흘러버린 물을 주워 담지 못하고, 토해버린 말을 거두지 못하듯.
올리비아는 비로소 깨끗하게 인정했다.
“내가 정말 미쳤지.”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뜬금없는 말에도 크라이어는 막힘없이 답했다.
“미쳐줘서 고맙군.”
“이 이상은 전부 끝나고 말할 거야.”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꼭! 꼭 말하라고. 나보다 먼저 말해!”
서로를 향한 진심을 고하는 순간은 아마도 그의 낙인이 사라지고, 노예의 굴레를 끊어내는 순간이 되겠지.
유치한 투닥거림처럼 들리는 이 깃털만큼 가벼운 대화에 깔린 지독하게 무거운 진심을 두 사람은 묻어두기로 했다.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이 튀어나오듯, 한 방울씩 흘러넘치는 마음까지 다시 가두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오늘은 여기서 좀 쉬어. 방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어차피 가지도 않을 거잖아.”
“아니, 그냥 곁에 있고 싶다만. 적응은 오히려 붙어 있으면 더 빨리할 수 있겠지.”
“적응했어. 했다고. 어차피 나도 나가봤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올 거니까.”
“뭐? 그게 무슨…….”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크라이어가 무언가 되물으려는데 올리비아가 곧바로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닿은 건 눈이었건만, 어쩐지 크라이어의 입도 막아버린 듯 벌어졌던 그의 입이 닫혔다.
언젠가 과거 크라이어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눈을 제 손으로 덮은 올리비아는 가벼운 한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나 지친 걸까.
그가 몸을 써서 하는 일에 이만한 피로를 느낄 리는 없을 테니 역시 정신적으로…….
아니, 잠깐 신체와 정신 둘 다 피폐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잖아? 그것도 ‘사랑’이라는 말 아래에서 할 수 있는.
“그런 일 없었다.”
“어? 뭐?”
“지금 상상하는 그런 일 없었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어느새 눈을 덮고 있던 그녀의 손을 떼가 몸을 반쯤 일으킨 크라이어가 피식 웃으며 올리비아의 콧방울을 가볍게 튕겼다.
민망함을 감추려 괜히 코를 잡고 시선을 모로 돌린 올리비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슨 상상을 했다…… 으앗!”
그녀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아래에서 당기는 힘에 그대로 크라이어 위에 허물어졌다.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부딪친 올리비아가 그의 다리를 짚고 고개를 확 올리며 외쳤다.
“갑자기 뭐 하는 거……!”
그리고 이번에도 말을 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콧날이 부딪칠 만큼 가까웠으니까.
입을 벌린 채 눈을 커다랗게 뜬 그녀를 헤집듯이 들여다보던 크라이어가 속삭였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 보여주려고.”
미지근한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히자 목덜미 솜털이 바싹 곤두섰다.
제 다리 위에 앉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당긴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댔다.
“이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눈가에 닿은 마른 입술에서 흘러나온 숨결이 조금 전과 달리 데일 듯이 뜨거워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차라리 눈을 감지 말 것을. 그랬다면 눈가에서 뺨으로, 그리고 턱으로 내려가는 그의 입술 감촉이 이토록 선연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텐데.
올리비아의 잔뜩 힘이 들어간 턱 끝에 쪼듯이 입을 맞춘 크라이어는 그녀를 향한 허기를 찍어누르며 말했다.
“이대로 계속 있을 건가? 난 그래도 상관 없…….”
“아니!”
그의 말을 자르고 어깨를 확 밀어낸 올리비아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서 물러났다.
이대로 휩쓸리면 아예 사냥제도 못 나갈 거야.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말했다.
“아무튼 당신 오늘은 굳이 내 옆에 없어도 돼.”
괜스레 이미 봤던 서류를 뒤적거리는 올리비아의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에 빨갛게 익은 뺨과 귀 끝은 무사히 숨었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목덜미가 드러났다.
잘 익은 사과 빛인 귀 끝을 느긋하게 바라보던 크라이어가 이내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으며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께서 주최하는 공식 행사인데, 황녀의 기사인 내가 빠질 수는 없지.”
“그 황녀가 빠져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있잖아.”
“무슨 일이기에?”
“내가 벽을 보고 말하고 있는 건지 뭔지.”
올리비아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곧 그 미간을 피라는 듯 톡톡 두드리는 마르고 거친 그의 손끝에 얼굴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이젠 제 머리카락 끝을 뱅글뱅글 돌리는 그의 손을 쳐내기보다 설명이나 하자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오늘은 사냥제야.”
“사냥제? 갑작스럽군.”
“뭐 귀족들 다 불러 모아서 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아니니까.”
“단순히 초청한 몇몇이 모이는 자리인가.”
“넓게 보면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외교관들만 부르는 거니까.”
외교관이라는 단어에 크라이어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올리비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로 오히려 당신이 빠지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이 나의 기사라고 하지만, 어쨌건 소속은 노르덴이잖아.”
황궁 사냥제.
평범한 사냥제와는 달리 황궁 내의 숲에서 열리는 사냥제는 제국에 상주하는 타국의 외교관들이 필수적으로 참석해야만 하는 몇 안 되는 행사였다.
물론 어딜 가나 예외는 있듯이 ‘필수’라고는 해도 불참으로 인한 불이익만 감수한다면 참석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하나, 외교관이라는 신분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먼 타국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대체 무엇 때문에 불이익을 감수하겠는가.
그리고 외교관이 이 사냥제에 참석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따로 있었다.
제국에서 외교관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개최하는 사냥제는 평범한 유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냥제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으며, 대표적인 목적으로 말하자면.
“제국의 무력 과시야.”
“제국 기사단장들이 차출되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
“응. 제국의 가장 강한 창과 방패와 그 후계를 화려하게 선전하면서 우리 이렇게 강하다! 하고 동네방네 소문내는 거지, 뭐.”
굉장히 저렴한 언어로 황궁 사냥제의 의의를 정리한 올리비아는 곧 크라이어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니까 노르덴 국 소속인 내가 가면 제국의 무력 시위에 지장이 있다는 말이로군.”
“정답.”
올리비아는 손뼉을 짝 치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