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 이곳에 남겠습니다. (98/146)


#98. 이곳에 남겠습니다.
2022.08.08.


이틀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올리비아는 그레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녀와 외교관의 신분 차이로 그레타는 올리비아의 시선에서 약간 비낀 각도로 앉아 있었다.

올리비아의 뒤에는 여느 때처럼 크라이어가 묵묵히 서 있었고, 그레타의 뒤에는 처음으로 케슬란이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그레타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라고는 보니타뿐이었고, 그 보니타와 만나는 시간에도 케슬란은 문밖을 지키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올리비아는 대놓고 케슬란을 아래위로 훑었다.

그 시선에 바짝 긴장한 케슬란은 등을 빳빳하게 세우다 순간적으로 검에 손을 대려다 간신히 참았다.

물론 올리비아의 시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뒤에 있던 크라이어에게서 올올이 풀려 나오는 그야말로 살을 에는 살기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런 케슬란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던 크라이어는 이내 살기를 거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지만, 여기에서 더 압박하다가 기절이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제국의 기사를 살기만으로 기절시킨다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한다면, 농으로라도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말라고 할 테지만, 만약 크라이어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을 올리비아가 들었다면 당장이라도 케슬란을 눈앞에서 치웠을 것이다.


“몸은 좀 어떤가.”

케슬란이 강제로 기절을 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올리비아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런가. 제국의 궁의가 실력이 좋지.”

그레타의 성의 없는 짧은 답에도 올리비아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하던데, 혹여 다시 그런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하여 미리…….”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무엄하게도 황녀의 말을 자른 그레타의 눈은 뱀의 그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 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어찌 일개 궁의가 알아볼 수 있을까.

다시는 그럴 일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만약 다시 그런 부작용을 겪는다면, 자신은 결코 비명을 지르지 않을 테니까.

비록 자신이 겪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라도 쓸데없이 관심을 끌 필요도 없다.


“그럴 일이 없다. 본인은 원인이 뭔지 아는 모양이로군.”

“네.”

“흐음, 뭐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더 따져 묻는 건 우스운 일이겠지.”

올리비아는 당연히 캐묻고 싶었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했기에 밤에 비명을 지를 만큼 고통스러워했는지.

하지만 이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해봤자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한 가지 묻겠네. 하인데르 후작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나.”

겉치레나 빙빙 돌리는 말 없이 곧바로 본론부터 꺼낸 올리비아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그레타 역시 처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도움을 많이 받고 있죠.”

대단히 모호하지만, 또 딱히 트집을 잡기 어려운 답이었다.

보니타가 그레타를 몇 번 찾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 두 사람 다 뭔가 의미 있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일단 보니타와 그레타가 확실하게 아는 사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올리비아는 여상하게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노르덴국에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군. 그래서 이번 기회에 좀 묻고 싶은데, 개인적인 이야기가 섞일 수도 있네만.”

일단 한발 물러서는 것처럼 입을 열기는 했지만, 올리비아는 그레타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크라이어와는 어떻게 만났지?”

올리비아는 자신이 크라이어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레타의 이마에 핏대가 서는 것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레타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편이 어떤 정보건 빼내기 쉬울 테니까.


“함께 지낸 지 꽤 오래됐는데도, 크라이어는 좀처럼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레타의 이마에 핏대가 서는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화려한 미소를 머금으며 크라이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전혀 알려주지 않더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크라이어와 시선을 맞추는 올리비아를 보는 그레타의 손바닥이 손톱에 짓눌려 피가 흘렀지만, 치맛자락에 숨겨진 탓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방금 흐른 피 냄새를 맡고 올리비아를 향해 눈짓했고, 그녀는 그레타의 핏대를 터뜨릴 셈인지 아예 쐐기를 박았다.


“좋아하면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법이니, 그대가 조금 이해해 주었으면 해. 그러니 크라이어와는 어떻게 만난 거지?”

올리비아는 찻잔을 문지르며 미끼를 툭 던졌다.

만약 이 자리에서 크라이어의 과거를 캐낼 수 있다면, 그가 굳이 그레타와 단둘이 남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레타가 순순히 그의 과거를 나불댈 가능성은 한없이 낮지만, 시도는 해볼 수 있을 터.

-까드득.

그레타의 잇새로 뭔가 들리면 안 될 소리가 울렸기에 케슬란이 기사의 본분도 잊고 눈을 크게 떴지만, 올리비아는 못 들은 척 찻잔을 입술에 댔다.

시기적절하게 올리비아의 시선이 가려진 탓에 당장이라도 태워 죽일 시선으로 그런 올리비아를 바라보던 그레타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외교관인 저와 첫 만남은 왜 물어보시는 거죠?”

무례한 올리비아의 질문에 비하면 지극히 타당한 물음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그 저변에 깔린 의미를 읽었다.

첫 만남이 듣고 싶을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내 입으로 토하라는 거군.

그에 입술을 떼던 올리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물어버렸다.

정보를 긁어내려면 응당 그레타의 의도대로 답을 해줘야만 했다.

노르덴 국에서 봤을 때 뭔가 개인적인 관계가 있어 보였다고.

하지만 그 말이 목에서 턱 막혀 나오질 않았다.

첫 만남이고 뭐고, 그냥 크라이어가 눈앞에 있는 이 여자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니지. 내 기분만으로 일을 망칠 수는 없잖아.

그리고 개인적인 관계는 없다고 크라이어가 단언도 했고.

했나? 했지? 아니, 무슨 접촉은 없다고 했지만, 사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지는 않았나?

아니, 나한테는 누구든 사적인 관계가 있니 없니 그렇게 지, 질투하더니!

가뜩이나 어색하고 숨이 막히는 분위기에서 더욱 먹먹한 침묵이 한참이나 지속됐지만, 올리비아는 그조차 느끼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

“황녀 전하.”

본인은 아직 인정하지 않은 ‘질투’를 몹시 어렵게 이긴 올리비아가 입을 열려는데 크라이어가 먼저 그녀를 불렀다.


“음?”

갑작스러운 그의 부름에 당사자인 올리비아는 물론이거니와 그레타도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리고 그런 그레타의 반응에 케슬란은 눈을 가늘게 뜨다 이내 기사답게 그런 기색을 빠르게 감췄다.

평소의 그레타라면 자신의 머리 위로 한순간 쏟아진 케슬란의 시선을 잡아낼 수 있었겠지만, 온통 크라이어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데다 연이은 그의 갑작스러운 말 때문에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이곳에 남겠습니다.”

그 말을 뱉으면서 크라이어는 토끼 눈을 뜬 올리비아를 눈꺼풀에 새기듯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도 안다. 그레타에게 정보를 빼내기 위해 올리비아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그리고 정보를 위해 속이 뻔히 보이는 그레타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할 텐데, 올리비아가 입을 다물어버렸다는 것도.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표정이나 말투, 하물며 사소한 몸짓을 보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대략 알 수 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의 하는 생각을 정확히 읽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올리비아가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어 버린 이유를 제가 좋을 대로 추측했다.

어쩌면 그녀도 그가 타인과 사적으로 뭔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거짓이라도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제멋대로인 그의 추측이 아주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올리비아를 안아 들고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버렸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

올리비아는 처음 듣는 말인 듯 눈을 크게 뜨며 아예 엉거주춤 일어났고, 그런 그녀를 덤덤히 내려다보던 크라이어가 반복했다.


“이곳에 남겠습니다.”

앞뒤 없이 튀어나온 그의 말은 지나가던 원숭이가 들어도 이상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지금 당장 자세히 추론하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올리비아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했고, 그레타는 끈적한 갈망을 띤 눈으로 크라이어를 보고 있었으며 케슬란은 의문을 입 밖으로 낼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남……겠다고?”

충격을 받은 듯한 올리비아의 표정에도 크라이어는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왜? 아니, 이렇게 물어도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겠지.”

올리비아는 마치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항상 내가 뭔가 물어도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고…….”

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듯 아예 일어나서 이마를 짚은 올리비아는 누가 봐도 슬퍼 보였다.

그것도 명백히 호감 있는 상대가 정작 자신에게는 마음을 열지 않아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케슬란과 그레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또!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송구합니다.”

그리고 상대인 크라이어는 그런 그녀에게 엄청난 벽을 세우는 것으로 보였다.

당연하게도 둘 사이에서 오가는 말은 당연히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크라이어가 그레타의 곁에 남도록 유도하려고 하는 연극이었으니까.

물론 ‘자연스럽다’가 ‘막무가내로 아무 이유도 대지 않고’가 된 건 어디까지나 크라이어가 남는 당사자였기에 그런 것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계획했던 것보다 이른 타이밍에 크라이어가 말을 꺼냈다는 사실에 의아했지만, 물 흐르듯 연극을 이어갔다.


“이, 이만 가겠어.”

“전하!”

큰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는 올리비아를 대경한 케슬란이 부축했고, 그런 두 사람의 등 뒤로 크라이어의 검붉은 시선이 화인처럼 박혔다.

이곳에 오기 전 미리 맞춰둔 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라이어는 심장을 옥죄는 통증을 삼켜내야만 했다.

올리비아의 곁을 떠나야만 한다. 심지어 스스로의 의지인 것처럼.

이 모든 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안하고 초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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