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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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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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조금만.
2022.08.01.
먹히는 줄도 모르고 먹혀버린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올리비아의 숨을 고스란히 크라이어가 빨아들였고,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고스란히 제 숨을 빼앗겼다.
그렇게 한순간 더운 숨을 모조리 빼앗은 그가 눈을 길게 접으며 웃었다.
그 눈매에서 흐르는 갈망이 지나치게 선연해서, 맞닿은 입술이 불이라도 붙은 듯 확 타올랐다.
“조금만.”
입술을 맞댄 채 은근한 목소리로 하는 재촉에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반응했고, 곧이어 그가 더 깊숙이 들어가, 더 많이 그녀를 들이마셨다.
마시고 또 마셔도 며칠이나 굶은 사람처럼 탐하고 싶었고.
들이키고 또 들이켜도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에 도착한 것처럼 모자라기만 했다.
속절없이 제 숨을 그에게 내어주던 올리비아는 생리적으로 맺힌 눈물로 시야가 뿌옇게 물들었다.
어질어질했다. 아니 아찔한 것 같았다.
아니, 아득한 거 같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몰려들어 올리비아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손끝이 빳빳하게 굳고, 발끝은 안으로 곱아들었다.
심장이 귀로 이동이라도 한 건지 온 세상에서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시끄러웠고, 입안은 불덩이라도 문 듯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올리비아의 다리에서 힘이 빠지면서 뒤로 기울었지만, 크라이어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당겨 바짝 붙은 그는 눈을 감은 채 코끝을 가득 메우다 못해 혈관 구석구석까지 휘도는 그녀의 체향을 욕심껏 들이마셨다.
희미한 장미향이 만개하여 그를 휘감아 돌자 그야말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의 숨결이 뒤엉키고 미지근했던 공기가 온몸을 달구는 뜨거운 수증기로 뒤바뀌는 순간.
올리비아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것만큼 크라이어의 머릿속도 하얗게 물들었다.
불이 지나치게 온도가 높으면 붉은색이 아니라 하얀색을 거쳐 푸르게 변한다.
어느 순간, 맞닿은 입술 사이로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생겼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떴다.
검붉게 타오르는 불과 푸르게 타오르는 불이 만나 온 세상이 하얗게 타올랐다.
그리하여 오롯이 서로만을 담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라이어의 목을 감은 올리비아의 가는 팔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그의 팔에도 핏줄이 불거졌다.
미지근한 숨결이 한 호흡이 되면서 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겹쳐진 그림자만큼 뒤엉킨 둘의 주변으로 공기가 달아올라 사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성이 떠나간 뒤 남은 건 서로를 탐하는 날것의 감정뿐.
그렇게 통제가 되지 않는 짐승처럼 누구 한 사람 물러나지 않고 맞붙기만 하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 아…….”
가는 숨을 내쉬는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는 크라이어의 눈은 투명했다.
모든 빛이 섞이면 투명해지는 것처럼 너무나도 온갖 것들이 뒤섞여 오히려 투명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그녀를 삼키려 들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라는 외침이 골수까지 미쳐 머릿속이 덜그럭거렸지만 그는 다시 입을 맞추는 대신 손을 뻗었다.
올리비아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느긋하게 훑은 그는 올리비아가 헐떡이는 숨을 정돈할 때까지 집요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흐르고 점차 올리비아의 호흡이 고르게 변했다.
이어 잔뜩 흐려졌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자 약이라도 먹은 듯 아득했던 정신도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이성과 밀려오는 현실.
맨정신에 해버렸다.
아니, 말이 이상하잖아? 해버리긴 뭘 해? 아……닌가? 말은 맞는 말 아니야?
올리비아는 그의 손가락이 스친 입술을 무의식적으로 문지르려다 간신히 참았다.
어쩐지 입안은 물론이고 입술까지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제까지 그와 그……. 하여가 그랬으니 마르기는커녕 촉촉하다 못해 부어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시선을 준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꼼지락대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와 맞닿은 부분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지나치게 생생하고, 참기 힘들 만큼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 열기에 간신히 돌아왔던 이성이 다시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그도 잠시 올리비아는 힘이 다 빠진 손으로 그의 가슴께를 툭 쳤다.
밀어내고 싶었지만, 이미 진이 다 빠져 버려 그저 두드린 꼴이 되었지만.
크라이어는 그 눈에 담긴, 당장이라도 폭발하여 그녀를 휩쓸어버릴 감정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순순히 올리비아를 놓아주었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푹 파묻혔지만, 그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크라이어 역시 마찬가지로 올리비아만을 눈에 담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올리비아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물었다.
불쑥 치솟아 혀끝까지 밀려 나온 말을 내리눌렀지만, 그건 계속 그녀의 속을 맴돌았다.
왜 입을 맞췄어?
왜? 왜 나와? 왜 당신이?
전처럼 술기운에 진 것도 아니면서, 아니 처음 했을 때도 백번 양보해서 자신은 취했다고 쳐도 그는 멀쩡하지 않았던가.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올리비아는 그가 자신을 미친 것처럼 갈망하는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만을 오롯이 담은 채 마주 보기를 한참.
머릿속은 물론이거니와 가슴까지 휘저어대던 ‘왜?’라는 의문에 답이 나왔다.
아니, 이미 답은 나와 있었지만, 단지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뿐.
아무리 외면하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올리비아라도 더는 그리할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제 숨을 삼켜버릴 듯 눅진 거리는 저 검붉은 눈을 앞에 두고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그가 저를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 역시 그를.
올리비아와 크라이어 누구도 서로를 향해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너를 마음에 담았다고, 네가 내 심장이 되었다고.
그리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전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전할 수 없는 것도…….
올리비아는 그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응시했다.
그리고 아연해지고 말았다.
이미 그에게도 말했듯이 그녀에게는 사적으로 특별한 사람을 만든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그녀에게는 처음이었다.
말하자면 첫사랑…….
떠올리자마자 몸서리가 쳐지는 느낌에 올리비아의 뺨은 사랑을 막 깨달은 이가 그렇듯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약간 창백해졌다.
맙소사 첫사랑이라니.
저 남자가?
저…… 크라이어와?
첫사랑이라면 뭔가 좀 더 간질간질하고 귀엽게 가슴이 막 콩닥거리고 훈훈하게 작은 사랑을 키워가는 뭐, 그런 거 아니었나?
아무리 떠도는 말과 현실은 다르다지만, 이건…… 이건 너무 다르잖아?
애초에 크라이어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인지했을 때 스스로를 향해 미쳤다고 욕을 퍼부었던 이유가 명확했다.
그는 자신을 죽였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네 번이나.
그 기억이 적당히 마모되고 있긴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를 사……랑 한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다 불현듯 볼셰이크의 선조가 했던 한마디가 그녀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광기에 이르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얼굴이 조금 더 하얗게 질렸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정말로? 이게 맞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꿈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사랑을 바란 적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미쳤다’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사랑을 바란 적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그렇지.
마음을 제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이는 없을 터.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버린 마음을 돌아오게 만드는 법도 알지 못한다.
올리비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의 시작을 알게 된 설렘이 아니라 혼란과 어이없음, 그리고 답답함 때문에.
이미 그를 마음에 담았다고 인정하면서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기억도 없는 그에게 대뜸 ‘사랑은 광기라는데, 맞아?’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니, 기억이 있어도 그런 걸 물을 수 있을 리가.
내가 당신 사랑하나? 라니,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게다가 그 답이 긍정이라면, 그때는 또 어떻…….
그 순간,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가 올리비아의 눈을 한 손으로 가려버린 탓이다.
“조금 자 둬.”
이윽고 나지막한 그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든 순간, 이미 진이 다 빠지고 혼이 반쯤 나간 올리비아는 홀린 듯 눈을 감았다.
멀어지는 의식 너머로 크라이어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
아이작은 여우 눈을 한껏 가늘게 뜬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두 사람은, 정확히 말하자면 슈가는 무엇이 그리 수줍은 건지 먹음직스러운 브라우니를 앞에 두고 쭈볏거리고 있었다.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한동안 곁을 지켜.’
누구의 명이라고 거스를까. 불구덩이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이작은 타렌저에 머물면서 슈가의 곁을 지켰다.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슈가를 갑작스럽게 방문한 밤에도 그는 나서지 않았지만, 그림자 속에서 슈가를 살피고 있었다.
덕분에 그 밤, 슈가가 낙인에서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과 그 원인이 앙브흐 때문이라는 사실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슈가의 제안으로 낙인에 대한 두 번째 실험을 하고 있었다.
“르위르 영…….”
“누나! 누나라고 했잖아.”
앙브흐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슈가는 기쁘지만 어렵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이가 다시 입을 열때까지 앙브흐는 방실방실 웃으며 기다렸고, 슈가는 몇 번이고 더듬은 끝에 앙브흐를 부를 수 있었다.
“누, 누나.”
“그래. 이제 손을 잡아달라는 거지?”
직설적인 앙브흐의 말에 슈가는 제 손을 죔죔 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나가 제 손을 잡으면 낙인이 아픈 것 같거든요.”
“그냥 내가 옆에 있기만 해도 아픈 건 아니라서 다행이야.”
슈가의 말랑말랑한 손을 조물거리던 앙브흐가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제 이렇게 손만 잡고 있으면 되는 거야?”
“네, 네에. 그렇게만 해주…….”
슈가는 미처 답을 다 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나타난 건지 아이작의 앙브흐가 잡은 반대쪽 손을 덥썩 쥐었기 때문이다.
“뭘 그런 눈으로 보냐. 빈 손을 보고 있자니 좀 채워 주고 싶어서 그런다.”
“네. 네?”
어벙한 얼굴로 되묻는 슈가를 향해 씨익 웃은 아이작은 곧 뻔뻔스러운 얼굴로 앙브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