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 나는 너와 떨어질 생각이 전혀 없다. (95/146)


#95. 나는 너와 떨어질 생각이 전혀 없다.
2022.07.28.


잠깐 눈을 깜박한 사이 멀쩡하던 호위 대상이 얼굴이 희게 질린 채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괜찮으십니까!”

시체처럼 질린 그녀의 얼굴빛과는 대비되는 시뻘건 코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케슬란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지만, 그레타의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수건을 거절하는 듯한 태도에 케슬란은 더욱 당황했지만, 기실 그레타는 그의 손수건을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기에 손수건을 받지 못했을 뿐.

받을 힘이 있었다면 코밑을 축축하게 물들이는 이 비릿한 피를 닦아냈겠지.

그녀는 평소 피비린내를 즐기는 쪽에 가까웠지만, 지금 제 코에서 흐르는 피는 실패의 냄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눈을 몇 번 깜박일 만큼의 시간이었지만, 케슬란은 그레타를 세심하게 살피고 그녀가 죽지 않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녀가 받지 않은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근처에 놓아둔 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숨 쉬듯 사방에서 비일상적이고, 평범하지 않은 것을 찾던 케슬란은 곧 아연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침착한 듯 보였지만, 그는 조금 전 그레타가 형편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봤을 때보다 더 당황한 상태였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습격을 받았다는 정황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당연했다. 그레타는 습격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습격이 아니라면 잠깐 동안에 그레타가 저런 상태가 된 이유가 없지 않나.

몇 번이고 다시 살폈지만, 케슬란은 이 방에서 그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그레타를 향해 돌아선 후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상하고 비일상적이며 평범하지 않은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불길하고 구역질 나는 것이었다.

이 방에 드나들 때 매번 느꼈던 섬뜩함을 아득히 뛰어넘는 느낌.

보고, 듣고, 느끼는 그의 모든 감각이 눈앞에 있는 저것이 불길하다는 사실을 요란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 조금쯤 의문스럽고, 조금쯤 의심스러웠던 외교관은 마치 껍데기만 인간인 전혀 다른 무엇 같았다.

그것도 지독하게 뒤틀린…….

케슬란은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구토감을 억누르며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무표정을 유지한 채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지켜드리지 못해 면목 없습니다.”

지극히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는 케슬란을 향해 그레타는 별다른 말 없이 손을 저었다.

머리 전체에 불이라도 붙은 듯했고, 눈은 당장이라도 뽑고 싶을 만큼 욱신거렸으며 이제는 귀에서 윙윙거리는 이명도 심해지고 있었다.


“나가주세요.”

간신이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케슬란은 온 신경을 그레타에게 기울이고 있었기에 곧바로 알아들었다.


“궁의를 부르…….”

“됐……! 아니, 그래. 불러줘요.”

케슬란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하던 그레타는 곧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꿨다.

이만큼 상태가 좋지 않은데도 의사를 부르지 않는다면 분명 의심을 살 테지.

기억은 지웠지만, 되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해야만 했다.

그에게 건 마법은 불완전한 만큼 언제 어떤 계기로 깨어질지 불안정했으니까.

뒤늦게 그를 인형으로 만드는 시도가 후회됐지만, 그레타는 이것저것 다 치우고 그저 쉬고 싶었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케슬란은 방을 나섰다.

설렁줄을 당겨 사용인을 부르는 것보다 그가 직접 나서는 편이 빨랐으니까.

문을 나선 그는 근처를 지나던 사용인을 잡았다.


“궁의를 부르게. 노르덴 국의 외교관님께서 편찮으시다.”

그의 말에 사용인은 곧바로 답하지 않고 잠시 말을 골랐고, 의아해진 케슬란이 무어라 다시 묻기 전에 입을 열었다.


“이 궁의 궁의께서는 이미 돌아가신 터라 다른 궁에서 상주하시는 궁의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돌아가셨다니? 어디로? 혹여 궁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외교관들이 머무는 궁의 궁의는 황궁의 궁의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다.

타국의 대표가 제국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실현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해서 이 궁에 머무는 궁의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호위인 자신에게 반드시 소식이 전해져야만 했다.

궁의가 없는 상황에서는 호위가 해야만 하는 일이 훨씬 많아지니까.

하지만 그는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기에 케슬란의 시선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사용인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른 궁의 상주 궁의를…….”

“그야 퇴궐 시간이 이미 지났으니까요.”

아무리 외교관 궁의 궁의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황궁 밖에 사는 이를 강제로 잡아둘 만큼은 아니었기에 이번 궁의의 퇴궐은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묻는 케슬란이 이상했지만, 사용인은 굳이 묻지 않고 덧붙였다.


“되도록 빨리 상주 궁의를 모셔오겠습니다. ”

그 답에 케슬란은 마치 느닷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이처럼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케슬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지만, 사용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보지 못했다.


“기사님?”

“그래. 서둘……러 주게.”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사용인의 뒷모습에 시선을 둔 케슬란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 그대로 중얼거렸다.


“퇴……궐 시간?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다고?”

그레타의 부름을 받고 그 방에서 얼마 머물러 있지도 않았을 터.

한데, 그의 기억에서 사라진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



“낙인이 아프다고 했었지.”

“그래.”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쇄골 부근, 정확히 말하면 낙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런 걸까? 당신만 아픈 게 아니고 슈가까지 그런 거라면 분명 뭔가 공통점이 있을 법하잖아.”

낙인에 대해 슈가에게 묻기 위해 어둠을 타고 움직였던 밤.

떠나려는 올리비아를 잡은 슈가가 머뭇거리면서도 말을 꺼냈다.


‘확실하지도 않고, 사소한 것 같지만 낙인에 관한 거라.’

‘낙인에 관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사소하지 않으니까 무엇이건 말해도 괜찮아.’

올리비아의 단호한 말에 슈가는 낙인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아팠어요.’

‘언제? 아니, 언제부터?’

‘최근에요. 아니,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꽤 자주 아팠었는데,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아프지 않다가 근래 다시 아팠어요.’

‘지금은 괜찮고?’

그 한마디에 슈가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네.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네.’

‘저어,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 보긴 했어요.’

분명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잠깐 낙인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잦은 고통은…….

슈가는 작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르위르 영애하고 함께 있을 때 아픈 것 같아요.’

‘어? 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가슴을 가리킨 앙브흐의 얼굴을 떠올린 올리비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대체 뭐야? 앙브흐와 있을 때 아프다니. 당신은 나랑 있을 때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혹시 앙…….”

“아픈 적 없다.”

올리비아가 앙브흐의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크라이어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지나치게 빠른 답에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피자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낙인을 가리켰다.


“그대와 함께가 아니라면 낙인이 아픈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찌 들으면 대단히 미묘하게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오로지 ‘올리비아’만이 그를 아프게 만든다.

정확히 말하면 낙인이 아픈 것이지만,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는 크라이어에게 몸이든 마음이든 통증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니 크게 다른 의미도 아니리라.

그리고 보통 그런 의미가 통하는 건 서로를 유일하게 여기는 연인 사이가 아닌가.

물론, 말을 꺼낸 크라이어는 물론이거니와 올리비아도 연인의 연 자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조금만 달리 해석하면 대단히 로맨틱할 수 있는 말을 올리비아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결국 나 때문에 아프다는 거잖아.”

영문도 모른 채 그가 느끼는 아픔의 원인이 된 올리비아는 억울함과 초조함에 발을 굴렀다.

그 모양새가 화가 나서 뒷발을 구르는 토끼 같아서 상당히, 아니 아주 많이 귀여웠기에 크라이어는 피식 웃어버렸다.


“웃지 마! 그보다 이 기회에 좀 자세히 물어볼게. 당신 그 낙인 언제 아픈 거야? 나와 함께 있을 때 계속 아픈 건 아니…….”

말끝을 흐린 올리비아는 그보다 더 흐린 눈을 한 채 물었다.


“설마 계속 아픈 거야?”

“아니니까 그런 얼굴 할 것 없다.”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제 뺨을 문지르는 올리비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크라이어가 첨언했다.


“그렇다면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을 거 없다고.”

“뭐? 아니, 정말로 계속 아프면 거리를 두는 편이 낫잖아.”

“일단 지속적인 통증은 없고, 만약 있다고 해도 거리를 둘 생각은 없어.”

바늘 끝 하나 들어갈 틈 없는 그의 답에 올리비아는 대번에 외쳤다.


“당신, 고통을 즐기는 취미도 있었어?”

“없다. 어째서 매번 그런 방향으로 의식이 흘러가는 거지.”

옅은 한숨을 삼킨 크라이어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나는 너와 떨어질 생각이 전혀 없다. 그 어떤 경우의 수가 있다 하더라도.”

검붉은 시선이 올리비아를 마치 그대로 제 눈 안에 새기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서 올리비아는 차마 농담으로라도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당신의 노예 계약은 어떻게든 없앨 생각이라고…….

올리비아는 그 대신 자신조차 말하기 전까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나…… 나도. 나도 당신하고 떨어질 생각 없어.”

제 입이 멋대로 움직여 내뱉은 말에 제풀에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가 다급하게 입을 막았다.

하지만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내뱉은 말도 되돌릴 수 없는 법.

그리고 다음 순간.

서서히, 정말로 하얀 백지에 색이 물드는 것처럼 크라이어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건 기쁨이기도 했고, 그건 설렘이기도 했으며, 그건 욕망이기도 했고, 그건 인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감정이 당장이라도 해일처럼 밀려들 듯 기지개를 켜는 찰나.


“어, 크라…… 읍!”

그가 그녀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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