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황녀를 죽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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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황녀를 죽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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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황녀를 죽일 겁니다.
2022.07.25.
막상 말을 꺼내자 잠시 풀렸던 긴장이 다시 목을 바짝 조여왔다.
이 질문은 결코 밖으로 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올리비아뿐이라는 사실은 이전에 깨달았지만, 황녀 전하께 이런 사사로운 질문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가족’에 혼란을 느끼고, ‘가족’의 과거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묻고야 말았다.
점점 목을 움츠리는 슈가의 귀로 너무나도 명쾌해서 다른 해석을 할 여지가 없는 답이 돌아왔다.
“아니. 이상하지 않아.”
지나치게 단순하고 빠른 답에 바짝 올라갔던 슈가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멍한 얼굴을 한 채 입을 벌린 아이의 턱을 잡고 손수 닫아준 올리비아는 흔하디 흔한, 하지만 지금 꼭 슈가에게 필요한 답을 돌려주었다.
“꼭 피가 이어져 있어야만 가족은 아니니까. 시간 또한 중요하지 않지.”
그리고 볼셰이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말도 덧붙였다.
“식구, 라는 말이 있어.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가족이라는 의미와 동일해.”
“밥을 같이…….”
“그래. 핏줄로 타고 내려오지 않아도, 한 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가족이 될 수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슈가.”
올리비아는 아이의 콧방울을 가볍게 튕기며 웃었다.
“그런 것으로 고민하지 말렴. 네가 가족이라고 느낀다면, 가족인 거니까.”
거기까지 말한 올리비아는 슈가와 마찬가지로 앙브흐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이가 말하는 대상이 그녀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앙브흐가 슈가를 데려간다고 선언했을 때, 올리비아는 황당함을 넘어 당혹감을 느꼈다.
단지 황녀 궁에 아이를 두기 꺼려하는 자신의 기색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단지 그것만이었다면 타렌의 수많은 비밀 별장에 아이를 보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앙브흐는 ‘타렌저’로 아이와 ‘함께’ 간다고 했다.
그리고 슈가가 타렌저에 머문 후 어느 날, 지나가듯 앙브흐에게 물었다.
‘슈가를 굳이 곁에 둔 이유가 있나.’
그에 앙브흐는 여느 때와 같이 해맑게 웃으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황녀 전하와 슈가를 도와주고 싶어서요!’
범인은 이해할 수 없지만, 앙브흐에게는 그저 그 이유만으로 충분했으리라.
그리고 앙브흐의 ‘도움’은 단순히 슈가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앙브흐는 진심으로 슈가를 돕길 원했고, 어쩌면 본능적으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주었다.
그녀는 올리비아와 헤어지기 직전, 쑥스러운 듯 속삭였으니까.
‘그리고 제가 외동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꼭 동생이 생긴 거 같아서 너무 좋아요.’
그건 두말 할 것 없는 앙브흐의 진심이었다.
더해서 올리비아 역시 그녀의 진심에 공감하고 말았다.
그녀 역시 슈가를 보면서 어쩐지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줄게. 네가 그리 느낀다면, 아마도 상대는 분명 너보다 먼저 너를 그리 여기고 있을 거야.”
올리비아가 입을 다문 순간, 마치 마법처럼.
“슈가? 자? 밤이라고 아이작에게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건 꼭 먹어봤으면 해서 가지고 왔…… 어, 어어? 전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노크도 없이 열린 문 뒤로 가벼운 차림의 앙브흐가 나타났다.
그녀는 올리비아를 향해 신속하게 예를 올린 후 곧바로 슈가 곁에 섰다.
자연스럽게 아이의 손을 잡은 그녀에게 올리비아가 무어라 말했지만, 슈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앙브흐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았을 뿐.
반대쪽 손에서 흔들리는 작은 바구니에서 풍기는 제가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좋아하는 레몬마들렌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자 낙인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이는 어쩐지 괜찮았다.
이 아픔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 밤.
고대신의 선택을 받아 애초에 가진 것이 거의 없었던 슈가가 모든 것을 잃은 후.
처음으로 제 가슴이 가리키는 가족을 받아들였다.
***
케슬란은 노르덴 국의 외교관을 호위하게 된 이후 단조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모두가 예상하는 그대로 제국에서 외교관을 위협하는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가장 큰 이유는 외교관인 그레타가 사람을 만나거나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부분 황궁에서 제공하는 외교관 특별실에서 머물렀고, 산책조차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저녁 케슬란이 제 눈으로 그녀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있다고 착각할 만큼…….
심지어 그레타는 사용인을 곁에 두지도 않았다.
‘주변에 누군가 있으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요.’
당시에는 그 말을 그저 그렇구나, 하고 덤덤하게 넘겼지만 되짚어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녀는 ‘외교관’이다.
외교관이란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에서 발로 뛰는 사람들이 아닌가.
당연하게도 외교관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많지 않다면 외교관이 사람이 많은 곳으로 찾아가야만 했고.
그런데 그레타는 사람이 싫다며 호위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사용인조차 필요 최소한 외에는 방에 들이지 않는다.
그럼 대체 외교는 어떻게…….
기사의 모범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케슬란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용감한 대신 소심했고, 대범한 대신 꼼꼼했다.
그렇기에 주변을 관찰하고 평범하지 않은 것을 찾는 것에 대단히 능숙했지만, 그 의문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는 감이 좋았다. 누구에게도 이야기 한 적이 없기에 그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지만, 그의 감은 거의 인간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덩달아 운도 그럭저럭 좋았고.
그가 뭔가 미심쩍거나 불길하다고 느낀다면 백이면 백 그런 느낌을 받을 만한 일이 터지곤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더 깊어지지 못했다.
“케슬란 경.”
안쪽에서 그간 인사만 반복하던 그레타의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으니까.
-달칵.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선 케슬란은 또다시 느껴지는 순간적인 불쾌함을 꾹 누르며 그레타를 향해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요. 곧 황녀 전하를 알현해야 할 것 같은데 확인을 좀 하고 싶어서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기사라면 모름지기 호위 대상에게 해야 하는 답을 자로 잰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은 케슬란은 곧 목 뒤에서 쭈삣 하고 일어난 소름에 잠시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찰나였고, 훈련으로 다져진 그의 몸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케슬란 본인만 속으로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뿐.
방금 그 섬뜩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설마 습격인…….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 도와줄 필요 없어요.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테니.”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레타의 말에 무어라 되물으려는 순간.
그레타의 눈이 뱀의 그것처럼 번들거렸고, 그녀와 마주 보고 있던 케슬란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레타는 머리를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황녀를 죽일 겁니다.”
“황녀를 죽일 겁니다.”
그러자 케슬란의 입에서도 그녀와 똑같은 말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그레타가 케슬란을 인형으로 만든 건 대단한 심계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한번 해 볼까? 라는 충동에 의한 결과였을 뿐.
그 충동은 답답함과 조급함, 그리고 갈증과 욕망에서 피어났다.
기껏 제국에 왔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크라이어를 보지 못했다.
가까이는커녕 먼발치에서도 그의 머리카락 끝조차.
인내해야 한다. 참아야 한다. 그분의 뜻이 그러하니까.
몇 번이나 그리 읊조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일 초마다 한 번씩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온 세상을 태우는 ‘정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곁을 차지한 올리비아를 향한 살의의 불이었다.
게다가 그 불에 짚을 던져 넣은 건 보니타의 기묘한 태도였다.
그레타는 멍청하지 않다. 아무리 크라이어를 향한 사랑에 눈이 멀었다 하더라도 보니타가 미묘하게 자신과 황녀, 그리고 크라이어의 만남을 꺼린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이유가 완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도.
사랑에 빠진 자의 직감인지, 혹은 고대신과 거래한 자의 직감인지.
그레타는 황녀와 크라이어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해졌다.
그렇기에 제국에 온 직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거나 꼭 필요하지 않으면 인형을 만들지 않으려 했던 결심 따위는 잊어버렸다.
애초부터 그레타가 고대신과의 거래로 이행하는 ‘정화’는 대단히 뛰어난 심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힘, 정확히 말하자면 크라이어로 부숴버리는 쪽에 가까웠다.
만약 만약 그녀가 목적 달성을 위해 머리를 굴려 효율적인 방법을 뽑아내는 타입이었다면, 자신의 아버지인 마법사를 제 손으로 정화하지도 않았을 터.
그러니 그녀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날려버리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레타는 제 감시자인 호위가 생각보다 꽤 괜찮은 배경과 명성을 지닌 기사라는 사실을 보니타에게 전해 들었다.
그 직후 그가 황녀를 죽여버릴, 죽이지 못하더라도 생각지도 못한 때에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 비수로 쓸 계획을 떠올렸다.
불온한 충동과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한없이 그럴듯한 계획으로 시작한 그녀의 인형 만들기는 곧바로 한계에 다다랐다.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노르덴국의 완전한 인형을 통제하면서 새로운 인형을 조종하는 건 지나치게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딱 한마디를 내뱉은 케슬란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지 못했다.
“고작 이…… 정도가 한계인가. 역시 인형을 두 개 동시에 만들어 움직이는 건 거의 불가능해.”
엄지를 까득까득 갉는 그레타의 눈은 고통으로 인해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물들었다.
“거리라도 가까웠다면 모를까. 거리도 너무 멀어. 이렇게 되면 차라리 노르덴의 인형을 포기해야 하나. 아니야. 그러면 제국에 머물 명분이 사라지잖아.”
홀로 중얼중얼거리던 그레타는 핏발선 눈으로 다시금 케슬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인형인 노르덴국의 왕과 같이 케슬란의 눈에서도 초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그는 생물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눈을 깜박이는 행위’를 잊은 듯 눈을 단 한 번도 깜박이지 않았다.
-툭, 투툭.
그레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을 타고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는 순간.
“하아, 하아. 하아하아.”
그레타는 마치 무언가에 맞기라도 한 듯 몸에 경기를 일으키며 거친 숨을 내뱉었고, 밭은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그녀를 발견한 케슬란의 눈은 당혹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