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어린애를 질투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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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어린애를 질투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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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어린애를 질투하는 거냐
2022.07.21.
올리비아가 이 밤에 한창 자야 할 자라나는 어린이를 방문한 이유는 하나였다.
과연 슈가의 낙인은 누구의 선택으로 새겨진 것인가.
그레타와 마주하기 전에 그 부분은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굳이 이 밤중에 이토록 급하게 슈가를 찾아와야 할 필요는 없다.
올리비아가 그레타를 다시 대면하기 전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알현 요청을 허락했다고 해서 그레타가 멋대로 시간을 잡아 그녀를 보러 올 수는 없었다.
그레타는 그저 올리비아가 지정한 시간에 맞춰 지정한 장소에 와야할 뿐.
타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라는 신분이 존중은 받을지언정 제국의 황족보다 고귀하진 않았으니까.
한정 없이 만남을 미룰 수는 없지만, 멀쩡한 낮시간에 앙브흐나 아이작을 통해 슈가에게 확인해도 될 만큼의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마음이 급했다.
크라이어가 그레타와 ‘필요’하기 때문에 만난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아서 다른 곳에 신경을 쏟아버리고 싶기도 했고…….
그렇기에 두 사람은 일단 슈가의 낙인이 누구의 선택인지 확인하러 움직였다.
한달음에 달려오기는 했지만, 막상 아래로 살짝 처진 눈을 크게 뜬 아이를 마주하고 있자니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올리비아는 일단 너무 긴장한듯한 슈가가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문을 틀 만한 것을 찾았다.
하지만 하필 시야에 들어온 건…….
“그 일기장, 읽고 있었구나.”
“네.”
올리비아는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보지 말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한창 자랄 나이의 아기가 보기에 심히 좋지 않은 글만 빼곡했지만, 보호라는 명목으로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기에는 너무 늦었다.
하나, 역시 마음에 걸렸기에 기어코 한마디 붙이고 말았다.
“그 미친놈들 말 신경 쓰지마.”
“네?”
전혀 황녀답지 않은 거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슈가가 되묻다 이내 올리비아의 시선이 박힌 일기를 내려다보았다.
“아, 이 미친놈들이요.”
슈가는 자신의 선조들을 거리낌 없이 미친놈이라 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던 원숭이가 봐도 확실히 미친놈들이 쓴 글이었으니까.
“그래. 필요한 정보만 얻으면 되니까. 거기에 매몰될 필요는 없어.”
그 말과 동시에 올리비아는 손을 뻗어 슈가의 머리를 가볍게 헤집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 손길을 받은 슈가는 한순간 굳었지만, 곧 눈을 감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따뜻하다. 제 머리카락이 엉키는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못내 다정해서 슈가는 어쩐지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어째서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 심지어 자신과는 서 있는 위치도 앞으로 설 자리도 다른 사람에게 이토록 ‘가족’을 쉽게 찾아내는 걸까.
낙인 때문에 제대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가족 외에는 만나는 이들도 없었다.
슈가에게는 부모님과 형이 가족이었고, 친구였으며 ‘아는’ 사람이었다.
더해서 그의 세계는 집과 아주 가끔, 1년에 한두 번 잠시 ‘외출’ 할 수 있는 공간이 다였다.
그러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아이의 가족과 세계는 더 좁아졌다.
그리고 지금.
슈가의 세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넓어졌다.
그 작은 집에서 햇살 아래로 나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황궁에서도 머물렀고, 이제는 타렌가에 있으니까.
그렇지만 아이의 가족은 사라졌다. 친구도, 아는 사람도 전부 피를 나눴던 쓰레기가 사라지면서 증발했다.
그렇게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아이는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의 삶을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이제 좀 쉬렴.’
머리를 토닥이는 손길이 나타났고.
‘우리 같이 살죠!’
기꺼이 잡을 내어준 이가 나타났다.
자신을 향해 다가선 이들의 손길에 슈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심장이 조이면서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입안에 지나치게 달아서 혀가 녹을 듯한 사탕을 가득 문 것 같았다.
슈가는 올리비아가 감탄할 만큼 영리하지만, 세상 경험이 없다시피 한 아이였을 뿐.
그렇기에 밀려드는 감정을 그냥 넘기지도, 묻어두지도,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울음, 정확히 말하자면 제 속을 따끈하게 데우는 감정을 눌러 참는 아이의 기색을 느낀 올리비아는 별말 없이 아이의 머리를 계속 토닥여주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올리비아와 그보다 더 작은 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크라이어가 한숨을 삼켰다.
“아이작에게 어린애를 질투하는 거냐고 한마디 할 게 아니었군.”
올리비아와 슈가. 둘의 관계에 그가 거슬릴 만한 것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도 그저 그녀의 손길을 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속이 조금씩 부글거리고 있었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더니.
언젠가 읽었던 볼셰이크의 역사서에 적힌 글귀를 떠올리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바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빠져 나갈 수가 없다.
오히려 올리비아만을 보고, 그녀만을 듣고,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천치가 되자고 그의 속 깊은 곳에서 일렁거리는 진득한 것들이 그를 부추기고 있었다.
“어린애다, 어린애.”
그는 금방이라도 제 가슴을 찢고 나올 광폭한 진심을 억누르려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건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워낙 가까이 있던 터라 올리비아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 어린애가 뭐가 어쨌다고?”
“아무것도. 그보다 굳이 이 시간에 찾은 이유가 있지 않나.”
크라이어의 시선이 슈가에게로 향하자 올리비아는 그를 향해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 무거운 입이 다시 열릴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녀 역시 아이와 다시 마주 보았다.
“슈가.”
“네.”
“널 찾은 이유가 있어.”
“네. 하명하세요.”
붉어진 눈가가 가라앉지도 않았지만, 슈가는 씩씩하게 고개를 숙였고 올리비아는 손을 휘저었다.
“네게 명령을 내리려는 건 아니야.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저에게요?”
올리비아의 말에 슈가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당황했다.
입을 다문채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차분해지길 기다린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낙인이 새겨졌을 때를 기억하니?”
슈가는 습관적으로 제 갈비뼈 부근의 낙인을 문지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잠시, 슈가는 곧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답했다.
“송구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낙인은 있었어요. 그러니까 3살부터요.”
“3……살?”
“네. 그때에도 이미 낙인이 있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3살 때 기억이 있다고?”
“네? 있……죠?”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을 올리비아가 되묻자 슈가는 아까보다 더욱 당황했다.
뭔가, 뭔가 이상한 건가?
스스로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안절부절 못 한 채 눈을 굴리다 크라이어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 순간 슈가는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이 마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간절함을 읽었는지 일자로 다물려 있던 크라이어의 입이 열렸다.
“충분히 똑똑한 아이니 3살 때부터 기억을 할 수도 있겠지. 게다가 특수한 상황에서 자랐지 않나.”
“아…….”
슈가가 자라온 환경, 즉 고대신의 눈을 피하기 위한 삶을 떠올린 올리비아는 짧은 신음을 삼켰다.
그랬지. 눈앞에 있는 아이는 다른 이들보다 살아온 세계가 좁았다.
아주 지독하게도 좁았으리라.
어쩌면 쌓을 만한 기억이 없기에 가진 기억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것이 자연스러웠을지도.
올리비아는 새삼스럽게 슈가를 바라보며 답했다.
“3살부터 기억이 있다니 제국에는 인재가 많아.”
“화, 황송합니다.”
황족의 입에서 ‘인재’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칭찬이었기에 슈가는 뺨을 빨갛게 물들였다.
눈가며 뺨이며 온통 발긋해진 아이는 곧이어 들린 질문에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그렇다면 혹시 네 기억 속에 낙인과 관련해서 가족들의 특별하거나 이상한 반응은 있니?”
슈가의 눈은 다시 과거를 빠르게 더듬었다.
올리비아의 예상대로 아이에게 쌓인 기억은 대부분 반복되는 일상이었기에 기억을 헤집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제게서 낙인을 발견한 부모님께서 믿을 수 없다며 몇 번이고 확인하셨던 건 기억나요. 그건 세 살보다 전의 기억인 거 같아요. 사실 너무 흐릿해서 진짜 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말 끝을 흐리며 덧붙인 슈가의 말에 올리비아는 무의식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슈가의 말대로라면 부모는 아이를 제물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크라이어도 알아차렸는지 일자로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그렇다면 빌어먹을 고대신의 선택이군.”
“네?”
슈가가 의아하게 되묻자 올리비아는 아이에게 지독하고 서글프지만 아주 약간의 온기가 담긴 이야기를 해주었다.
낙인은 가문의 쓰레기에 의해 생겼지만, 아이의 부모님은 결코 슈가를 고대신에게 던져주지 않았다고.
“아…….”
슈가는 짧은 탄성을 신음과 함께 뱉어냈고, 습관적으로 제 낙인을 매만졌다.
순간적으로 낙인에서 불에 지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크라이어와는 달리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슈가의 얼굴이 일순간 백지처럼 하얗게 탈색되었고, 이마에도 식은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코앞에서 아이의 상태가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본 올리비아는 그 즉시 입을 크게 벌리고 의사를 부르려 했지만, 크라이어가 막았다.
“낙인이 아픈가.”
슈가는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고, 크라이어는 아이를 고요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낙인의 고통. 그 원인을 앞뒤로 살피는 그의 머릿속에 희미한 가정이 흐릿한 형태를 그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흐려서 안갯속에서 무언가의 꼬리를 찾아 헤매는 듯했지만…….
“후, 후우.”
그리고 잠깐 사이 낙인에서 고통이 사라진 슈가는 긴 숨을 내쉬었고, 올리비아는 아이의 동그란 이마와 창백한 뺌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쳐주었다.
어느 정도 숨을 정돈한 슈가는 어쩐지 결연한 눈으로 올리비아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응?”
“한 가지만 여쭤도 될까요?”
“몇 가지든 상관없어.”
피식 웃는 올리비아의 답에 용기를 얻은 슈가가 곧바로 물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가족같이 느끼면 이상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