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 너는 ‘선택’받은 자가 아니야. (92/146)


#92. 너는 ‘선택’받은 자가 아니야.
2022.07.18.



“알현 요청이요?”

보니타는 찻잔을 들다 멈칫했다.


“그래.”

“굳이 그렇게 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그녀의 질문대로 그레타가 굳이 황녀를 알현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외교관 신분으로 제국에 왔다면 황제를 알현하는 건 당연한 의무였지만, 황녀와의 만남은 필수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황녀와 그분이 함께 있는, 정확히 말하면 친밀하게 서로를 위하는 모습을 보면…….

보니타는 저절로 구겨지려는 미간에 힘을 줬다.


“외교관이 황녀를 보는 게 크게 잘못된 일이야?”

“그건 아닙니다, 차기 황제가 확실한 황녀 전화와의 만남은 오히려 권장하는 편이지요. 하지만.”

“그래, 차기 황제건 뭐건 어차피…….”

“거기까지 하시죠.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달려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레타의 입에서 ‘어차피 멸망할 나라의 황족 따위’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보니타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대번에 그레타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지만, 보니타는 그 정도로 움찔하지 않았다.

여전한 무표정으로 보니타가 덧붙였다.


“그분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제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그분을 귀찮게 할 수는 없지.”

그레타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손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난 황녀를 내 눈으로 봐야겠어.”

“노르덴국에서 만나시지 않았습니까.”

“그땐 이렇게까지 걸리적거릴 줄 몰랐어. 그분께서 살려두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진즉 처리해버리는 건데.”

“말씀드렸다시피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닙니다.”

엄지손가락 끝을 잘근잘근 물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그레타를 보면서 보니타는 더 말을 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레타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겠지.

노르덴국의 왕이나 왕세자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과 제국의 유일한 황족이자 차기 황제를 없애버리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전자도 일국의 우두머리를 해하는 것인 만큼 힘들고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후자는 그야말로 불구덩이에 제 몸을 던지는 부나방과 다름없을 터.

어차피 모두가 불구덩이에서 불타오를 테지만, 적어도 모두를 불태운다는 자신과 고대신의 바람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뭐, 사랑에 눈이 멀다 못해 그쪽으로는 아예 눈이 뒤집힌 그레타에게 이런 논리적인 설명을 해도 먹히지 않겠지.

쓸데없는 것에 힘을 낭비하지 않는 보니타는 입을 다물고 그레타의 뒷 말을 기다렸다.

눈을 희번득하게 뜨며 혼자 씨근덕거리던 그레타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정확히 말하면 눈은 구역질 나는 무언가로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차분해졌다.


“그런데 보니타.”

“네.”

“이전부터 내가 황녀와 만나는 걸 꺼리는 것 같은데?”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면 황족을 건드리는 건 현명하지 않으니까요.”

기실 황녀와 그분을 동시에 만난 그레타의 반응이 달갑지 않았기에 꺼리는 것이었지만, 보니타는 태연하게 거짓을 내뱉었다.


“그 이유뿐이야?”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흐응.”

보니타를 바라보는 그레타의 시선이 집요해졌지만, 보니타의 가면은 깨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도 이미 만나기로 했어. 황녀 쪽에서 답을 바로 했으니까.”

이미 늦었나.

그레타는 자신의 아랫사람이 아니었기에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을 탓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분과 황녀의 관계가 예상보다 훨씬 깊어 보인다는 말을 전해야 할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황녀의 곁에 있다, 라고 했지만.

두 사람을 만났을 때를 떠올린 보니타는 굳은 입매를 가리려 찻잔을 들었다.

황녀를 바라보는 그분의 시선은 단순히 ‘필요’한 도구를 보는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옛날, 이제는 다 타고 재만 남아버린 자신의 사랑을 더듬게 하는 그런…….


“……니타. 보니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지?”

“아, 죄송합니다.”

“됐어. 그보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답을 내놓으라는 그레타의 고약한 심보를 보니타는 무덤덤하게 넘겼다.

자신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한꺼번에 허무하게 잃은 이후, 보니타의 감정은 그 어떤 것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그때 모든 감정이 타버린 게 아닐까.


“죄송합니다. 질문을 듣지 못하여.”

“죄송하다면 좀 더 죄송한 표정을 짓는 게 어때?”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꼬투리를 잡는 그레타의 말에도 보니타는 답 없이 그저 고개만 숙일 뿐.

그런 보니타의 정수리를 빤히 바라보던 그레타는 대놓고 혀를 찼다.


“제국 귀족들 중에 신을 위해 봉사할 자들의 포섭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어.”

몇 번이고 말을 조심하라 일렀건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그레타의 태도에 보니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사용인들을 모조리 물리고 호위도 문밖으로 내보냈다지만, 언제 어떻게 말이 흘러나갈지 알 수 없건만.

하지만 역시나 빠르게 체념하고 답을 내놓았다.


“그 부분은 힘듭니다.”

“제국의 귀족을 포섭하는 것이? 아니면 신을 위한 자를 찾는 것이.”

“두 가지 다 힘들지만, 애초에 전자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뭔가 모자란다면 지원을 해주도록 하지. 매수가 안된다면 돈이 모자라는 것일 테니까.”

하나, 보니타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하신 ‘포섭을 해야만 하는’ 귀족이라면, 애초에 돈에 구애받지도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권력인가? 제국을 주겠다고 해.”

그레타는 너무나도 쉽게 반역을 들먹였다. 제국을 준다는 약속을 해도 어차피 상대가 받을 것은 잿더미뿐일 테니까.

보니타는 이번에도 부정했다.


“아니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자는 없습니다.”

“그건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니야?”

“이미 다 제거당했으니 없는 게 확실합니다.”

그레타의 눈에는 제국도 노르덴국와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현실적으로 제국은 노르덴국과 모든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대륙의 ‘유일’한 제국은 상상 이상으로 견고했고, 무엇을 생각하든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곳이다.

특히 이 제국을 세우고 이제껏 다져온 볼셰이크의 핏줄은 더더욱.


“그런 꿈을 꾸기도 전에 싹을 모조리 뽑아 버렸으니, 그런 쪽의 접근은 오히려 이쪽이 위험해집니다.”

“이래도 안된다. 저래도 안된다. 결국 실패라는 말이잖아?”

“이 상황에서 굳이 더 도구를 늘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그럴 계획도 없…….”

“언제부터 네 입에서 계획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지?”

보나티의 말을 자른 그레타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너는 ‘선택’받은 자가 아니야. 네 발로 기어왔지.”

대단히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보니타는 눈을 내리깔았다.


“신의 선택도 받지 못한 주제에 계획이라니.”

이어지는 그레타의 빈정거림에도 보니타는 화가 나지 않았지만,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그레타가 말하는 ‘선택’된 이들이라면 분명 ‘낙인’을 가진 자들일 터.

그렇다면 그리 말하는 그레타에게도 ‘낙인’이 있는 건가?

그녀가 신의 선택을 받아 마법이라는 기이한 힘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없었건만.

만약 그녀에게도 선택받았다는 표시인 낙인이 없다면, 대체 그녀와 자신은 무엇이 다른 거지?

마법이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그 불완전한 마법을 빼버리면 그레타가 신의 뜻을 받들고 이루기 위한 능력이 있나?

단순히 그레타가 자신보다 신을 먼저 만났기 때문이라면…….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보니타는 그레타에게 낙인이 있는가? 라고 묻지는 않았다.

이 이상 건드렸다가는 오늘 이 대화는 어쩌면 말로 끝나지 않으리라.

이제껏 그레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보니타는 치밀어 오르는 의심을 속으로 밀어 넣었다.

고대신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이들 두 사람의 관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금이 갔지만 너무나도 희미한 것이라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간의 침묵을 먼저 깬 건 보니타였다.


“황녀 궁에 사용인은 무사히 심었습니다.”

“그래. 그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지. 더는 할 말 없으니 가보도록 해.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네.”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문을 나서는 보니타의 얼굴에는 비스듬한 그림자가 졌고,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그레타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



“슈…….”

“흐아으읍.”

캄캄한 창에서 갑자기 나타난 로브로 얼굴을 가린 인영을 발견한 슈가는 기절할 듯 경기를 일으켰다.

가까스로 비명이 나오려는 제 입을 막은 슈가를 본 대단히 수상한 인영은 곧 로브를 벗으며 난처한 얼굴을 드러냈다.


“이런 놀라게 했구나. 어쩌다 보니 만날 때마다 이렇게 되네.”

“화, 황녀 전……”

어스름한 달빛에도 숨길 수 없는 푸른 눈동자에 슈가는 깜짝 놀랐던 조금 전보다 더 눈을 크게 떴다.


“쉿.”

올리비아는 입술에 검지를 댔고, 슈가는 금방 입을 다물고 허둥지둥 발코니 문을 열었다.

식은 공기와 함께 희미한 장미향이 흘러들어오는가 싶더니 그 전체를 전부 덮어버리는 서늘한 겨울바람 냄새가 훅 몰아쳤다.

뒤늦게 올리비아와 함께 온 크라이어의 존재를 알아챈 슈가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고, 그런 아이의 반응에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단단한 배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첫 만남이 좀 안 좋긴 하지만,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사실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사람이지만, 어쨌건 슈가에게는 무서운 사람이 아닐 테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네, 네에.”

기실 슈가가 그를 보고 목을 움츠린 까닭은 올리비아 몰래 낙인이 찍힌 자들을 알아볼 수 있느냐, 없느냐를 실험한 것 때문이었지만 구구절절 그렇게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

얌전히 답한 슈가는 자신을 걱정과 미안함으로 가득한 눈으로 보는 올리비아의 시선에 지레 양심이 따끔거려 서둘러 물었다.


“아, 앉으시겠어요?”

“그럴까? 이리로 오렴.”

올리비아의 손짓에 그녀와 마주하고 앉은 슈가는 괜히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정신 사나워.”

그런 슈가를 위해서인지 올리비아는 근처에 등을 기대고 선 크라이어를 향해 타박을 했다.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올리비아 바로 곁에 앉았고, 올리비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슈가는 짧은 한숨을 삼켰다.

역시 두 분만 모르는 연인 관…….

귓가에 울리는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다른 곳으로 빠지려던 슈가의 생각이 흩어졌다.


“밤이 깊어가고 잠도 자야 할 테니 용건만 간단히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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