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 날 먹어 치울 게 아니라면. (91/146)


#91. 날 먹어 치울 게 아니라면.
2022.07.14.


아, 아픈가? 아니, 아플 리는 없잖아. 내 이가 아프면 아팠지 그가 이런 걸로 아플 리가 없…….

빠르게 자문자답을 속으로 쏟아내던 올리비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수습 어떻게 할 거냐고!

과거의 자신의 목을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현실 도피를 끝내는 크라이어의 목소리에 그녀의 동그란 어깨가 크게 움찔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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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그는 지나칠 정도로 태연하게 그녀에게 목이 물린 채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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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먹어 치울 게 아니라면, 그만 두는 게 나을 거 같다.”

그 태연자약한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올리비아도 휩쓸려 얼떨결에 입술을 떼어냈고, 넋이 나간듯한 그녀와 눈을 맞춘 크라이어가 손을 들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가 물었던 자리를 엄지로 훑은 후 그대로 제 입으로 가져가 혀끝으로 핥았다.

올리비아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짐과 동시에 크라이어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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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눈이 굴러떨어지겠군.”

허리를 잡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그녀의 눈을 덮어버린 크라이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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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는 않다.”

눈을 가린 메마른 손의 온기 때문인지, 그가 선사하는 어둠 때문인지 혼돈의 소용돌이에서 빙글거리던 머리가 한결 차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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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참 다행이네.”

허탈한 듯 중얼거린 올리비아가 긴장이 풀린 듯 허물어지자 그는 그녀를 한팔로 안아 올려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를 올려다본 올리비아는 혀끝까지 밀려 나오는 온갖 말들을 꼴깍 삼켜버렸다.

예를 들어 왜 갑자기 내 목덜미에 입을 맞췄는지, 그 전에는 왜,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다그치듯 그런 걸 물었던 건지.

더 과거로 돌아가서는 왜…….

왜 그 밤, 술에 취해 휘청거리던 그 아득한 밤에 제 숨결을 먹어 버린 건지.

한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들만 꼽아도 저 만큼이나 나오니, 조금 더 들어가면.

거기까지 떠올린 올리비아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휙휙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사랑이니 뭐니 일단 살고 봐야 할 거 아니야? 게다가 그는 자신을 동……료라고 했기도 하고.

아니, 동료끼리 그런 짓도 하는 거야? 그래? 내가 아는 동료의 뜻이 너무 협소한 거야?

간신히 진정되었던 머리가 다시 뱅글뱅글 돌아가려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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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표정이 수십 번도 더 바뀌는군.”

그리 말하며 희미하게 웃는 그와 마주한 순간, 올리비아는 뭔가 아무래도 다 상관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웃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른 건 정말로 상관없었다.

상관없지 않은데도 의식이 그렇게 흘러가 버리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토록 선명한 기분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혹은 또 다른 표정인지 모를 것이 올리비아의 하얀 얼굴을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였다.

크라이어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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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만약 크라이어가 올리비아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하지 말고 신경 쓰이는 것. 그러니까 자신이 했던 행동의 의미를 물어보라고 했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온전히 읽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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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도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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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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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도 안 했다니까? 그보다.”

올리비아는 대놓고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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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속삭이는 거 그만둘게.”

간신히 가라앉았던 열기가 다시 몰려와 부끄러움과 뭔지 모를 열기로 목까지 폭 익은 사과 빛깔로 물들인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는 치밀어 오르는 갈망에 다시금 고삐를 채웠다.

그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고, 올리비아는 뭔가 간질거리는 이 순간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다급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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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답 좀 해줘. 첫 번째 질문은 뭐로 정한 거야?”

전처럼 그에게 바싹 다가와 붙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아쉬움과 욕망이 뒤섞였지만, 크라이어는 순순히 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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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대해 물어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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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당신이 잃어버린 기억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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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올리비아는 손끝으로 소파의 암레스트를 톡톡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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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네. 당신을 부활시킨 여자니까 과거에 대해 알 가능성이 있는 자라면 그 여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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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은 나를 ‘선택’했다.”

크라이어는 이미 죽어버린,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정화’된 마법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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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의 뜻을 이루는데 선봉에 설 선택받은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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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같은 선택이네.”

황녀답지 않은 거친 말을 내뱉은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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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이 선택한 거야, 아니면 고대신이 무슨 계시라도 내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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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질문에 더해서 물을 것이 추가됐군.”

부산스럽게 펜대를 두드리던 손끝의 박자에 맞춰 올리비아가 혼잣말을 하듯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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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위르 가문의 쓰레기의 기록도 찾아봐야겠어. 대가, 그러니까 제물로 선택되는 것이 고대신의 선택인지, 아니면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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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선택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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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답을 하면서도 올리비아는 떨떠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슈가에게 찍힌 낙인이 고대신의 선택이라면 그렇구나, 하겠지만 만약 부모의 선택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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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가능성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네. 그나마 남아 있던 핏줄도 완전히 끊어낸 마당에 어린 시절 추억까지.”

말끝을 흐리는 올리비아의 얼굴도 같이 흐려지자 크라이어가 그녀의 미간에 진 골을 톡,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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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거다. 고대신이라는 놈이 고작 부모의 바람대로 제 것을 이리저리 옮기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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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들으니 또 그렇네. 그럼 당신도 결국 고대신이 선택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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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물어보면 확실해지겠지. 제물과 전사는 쓰임새가 다르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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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지. 그건 또 다르……지.”

떫은 감을 씹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올리비아가 재차 무어라고 입을 다시 떼려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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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노르덴국의 외교관에게서 알현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울린 말에 올리비아의 눈썹이 비죽 올라갔고, 크라이어의 입매가 굳어졌다.

이윽고 알현 요청서를 받아든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눈썹만큼이나 삐뚤어졌고, 크라이어의 눈동자가 굳어버린 용암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탁.

그레타의 알현 요청서를 내던지듯 놔버린 올리비아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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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또 나 좀 봅시다. 정도로 올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갖출 거 다 갖춰서 트집 잡을 것도 없네.”

타국의 외교관, 그것도 새로 온 외교관의 알현 요청을 무시하는 건 경우에 어긋난다.

물론 제국은 얼마든지 경우에 어긋날 짓을 할 수 있지만, 타국과의 원만한 관계에 누를 끼치면서까지 제멋대로 할 필요성은 없었다.

가뜩이나 선왕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노르덴 국의 요청을 무시했다가는, 사정을 모르는 타국에서 잡음이 나올 가능성이 크기도 했고.

게다가 그레타가 그저 ‘외교관’을 가장해서 제국에 고개 뻣뻣이 들고 들어왔다는 사실은 올리비아와 크라이어 외에는 알 수 없는 사실이니 대뜸 거절할 수도 없었다.

노르덴 국에서 마주쳤을 때 자신을 훑어보던 뱀 같은 그레타의 시선이 떠올랐다.

올리비아가 팔에 우수수 돋은 소름을 문지르자 크라이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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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는 게 낫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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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면 할 수야 있지만, 그걸 빌미로 더한 걸 요구할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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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한 것이 무엇이 건 그것과는 마주치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단호한 기색마저 엿보이는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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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한 것보다 마주하는 게 나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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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한 것이 뭐기에? 해결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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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해결 못 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쓴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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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도움이 되는 사람을 잡아 오도록 하지.”

올리비아의 말이 떨어지기만 하면 바로 움직일 기세인 그를 보면서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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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도움이 안 되니까 잡아 올 필요 없어.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아무나 잡아 오면 안 돼.”

재차 손을 저으면서 대중에게는 상식이지만, 크라이어에게는 새로운 지식을 주입 시킨 올리비아는 다른 설명 없이 입을 다물었다.

검붉은 눈동자에 떠오른 의문과 당혹이 보였지만, 그녀는 크라이어에게 세세하게 이유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이 알현을 거절하면 그레타가 요구할 ‘더한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으니까.

오히려 그가 어째서 자신과 같은 예상을 단숨에 떠올리지 못하는 건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레타는 크라이어를 요구하겠지.

그것이 잠깐의 방문이건 지속적인 만남이건, 그녀는 무조건 크라이어를 마주하려고 할 것이다.

그를 손에 쥐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테니까.

마음에 들지 않아.

올리비아는 크라이어가 케슬란을 보면서 했던 것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크라이어는 그레타를 지칭할 때마다 이름이 아니라 ‘그것’이라고 할 만큼 경멸하고 싫어하다 못해 증오한다.

그러니 비록 필요에 의해 크라이어는 그레타에게 가야 하지만, 필요가 아니라면 단 한순간도 그가 그녀 곁에 있는 것이 싫었다.

아니, 단순히 그가 그 여자를 경멸한다는 이유뿐만은 아니지.

올리비아는 그레타와 크라이어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리자 부글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화를 삼켰다.

고작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왜 이렇게나 분노가 이글거리는 건지, 라고 할 만큼 올리비아는 눈치를 수프에 말아 먹지 않았다.

안다. 이건 터무니없는 질투라는 걸.

하지만 확실히 인정하지 않고 그냥 덮어두고 싶었다.

질투라고 명확하게 인지하는 순간 어쩐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한 발 들이미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늪에 한 발은 물론이거니와 가슴께까지 잠겼다는 사실을 가슴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거기까지 깨닫기 전에 가까스로 멈춰 있었다.

크라이어가 더 캐묻기 전에 올리비아는 알현 요청서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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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상관없어. 선조들이 남긴 말 중에 그런 게 있거든.”

볼셰이크의 특유의 투명하고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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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가까이하고 적은 더 가까이하라.”

올리비아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내밀며 그레타의 알현 요청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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