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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물 생각은 없었다. (90/146)


#90. 물 생각은 없었다.
2022.07.11.


올리비아가 보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목 줄기를 틀어쥐고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음, 역시 무린가.”

크라이어의 사심 담긴 평가를 알 리 없는 올리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케슬란은 거의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본 사람처럼 얼굴에 핏기를 잃었다.

자신의 모자람을 노골적으로 황녀 전하의 앞에서 드러낸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올리비아는 당연하게도 크라이어의 답을 케슬란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답을 한 것이었다.

애초에 ‘어떤가?’ 하고 묻는 질문의 의도 자체가 ‘마법’에 대응할 가능성이 병아리 눈물만큼이라도 보이냐는 의미였으니 당연했다.

확인할 것을 다 확인한 올리비아는 산뜻하게 케슬란을 향해 턱짓했다.


“확인할 것이 있어서 잠시 불렀어. 이제 자리로 돌아가도록.”

이번에도 척추 반사 급으로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케슬란은 아득해진 시야를 간신히 붙잡고 자로 잰 듯 정확한 예를 올린 후 절도 있는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사라진 후 둘만 남기 무섭게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기사들과 사적으로 만날 때가 있나?”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올리비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서류를 뒤적거리며 답했다.


“글쎄? 호위니까 사적인 자리까지 따라가긴 해도, 사적으로 만나는 경우까지는 잘 모르겠는걸. 그래도 아예 없지는 않겠지? 외교관을 따라 망명한 기사의 기록은 없지만, 짧은 불장난 정도는…….”

물 흐르듯 나오는 답은 기사를 사적으로 만나는 대상이 ‘그레타’라는 가정하에 나온 것이었기에 크라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이 기사를 만나건 말건 관심 없다.”

“응? 그러면? 어? 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시선이 자신에게 박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으음.”

어딘가 먼 곳에 시선을 두든 걸 보니 이번 생뿐만이 아니라 지난 생의 기억까지 닥닥 긁어보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렇게까지 기억을 뒤질 만큼 많은 건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기억을 뒤져도 나오지 않을 만큼 적은 것인가.

크라이어는 당연히 후자를 바랐지만, ‘적다’해도 그 경우가 0이 아니라는 사실에 속 깊은 곳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정상이 아니다. 그와 만나기 전에 그녀가 어떤 생을 살았건 그가 참견할 일도, 하물며 질투할 일은 아니지 않나.

이성은 그리 외치고 있었지만, 배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불합리한 질투심은 그 모든 것을 지워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다면, 그리고 그 관계가 그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라면…….

찍어 누르는데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진득한 감정이 그의 핏줄을 타고 피부 위로 새어 나오려는 순간.

너무나도 간단하고, 발랄한 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기사를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는걸?”

분명 원하던 답이 나왔는데도 크라이어의 눈썹이 크게 물결쳤다.

그는 벽에 대고 있던 등을 떼며 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기사 ‘를’ 이라니. 기사가 아니라 사적으로 만난 놈이 따로 있던 건가?”

마주한 검붉은 눈동자는 눅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뭔가 말도 못 하게 위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뒷덜미 솜털이 저도 모르게 바짝 섰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올리비아는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왜…… 왜 이렇게 추궁하는 거 같지?

어……? 추궁하는 건가? 그보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거 같은 기분이?

멍한 얼굴로 르위르 가문의 쓰레기가 숨겨두었던 함정에 빠졌던 때를 떠올리려던 올리비아는 그의 나지막한 부름에 단숨에 현실로 돌아왔다.


“올리비아.”

“어, 없어! 사적으로 만난 사람 같은 건 없다고! 죽기 전까지 함께 했던 막내 기사도 여자였어! 애인이 같은 기사단에 있던 여기사!”

저도 모르게 과거의 질문에 대한 답까지 와르륵 뱉어낸 올리비아는 입을 벌린 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이런 변명…… 아니, 사실이니까 변명은 아닌데. 여하간 그 비스름한 걸 하고 있는 거지?

왜 내가 해명하고 있는 거야? 기분 탓? 기분 탓인가?

혼란스러운 올리비아의 머릿속과는 달리 크라이어의 검붉은 눈은 언제 무언가가 휘몰아쳤냐는 듯 투명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심지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감추지도 않은 채 느긋하게 다시 벽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호위는 빼지 않아도 될 거다. 어차피 내가 직접 갈 테니까.”

“호위? 아 케슬란 경.”

“그래. 그 머저리.”

그답지 않게 대놓고 드러내는 적개심에 올리비아는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어…… 말이 좀 심한…….”

“모시는 이를 앞에 두고 얼이 빠지면 머저리지.”

올리비아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크라이어가 단칼에 케슬란에 대한 평가를 내렸고, 대단히 논리적인 그 말에 그녀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얼이 빠졌던가?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사람의 기척이나 기색을 읽는 부분에 있어서는 크라이어가 인간을 한참이나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케슬란에게는 불행히도 올리비아는 결국 크라이어의 평가에 납득하고 말았다.


“당신이 감시하러 간다고 했으니, 케슬…….”

“머저리.”

자신이 케슬란을 입에 올리기 무섭게 다른 단어가 튀어나오니, 눈치를 못 챌래야 못 챌 수가 없었다.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싫은 거야? 아무리 머…… 음, 아무튼 눈에 차지 않는다고 해도 제국의 방패인 기사에게 그런 명칭은 좀…….”

“그렇다면 호위라고 하지.”

자고로 유리한 협상을 위해서는 무리한 것을 상대에게 던지고, 진짜 원하는 그보다 조금 나은 것을 던져줘야만 하지 않나.

크라이어는 머저리라는 극단적인 명칭을 써서 호위라는 원하던 명칭을 얻어 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크라이어의 질투로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올리비아는 크라이어가 뭐라고 하건 케슬란을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럼 호위로…….”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캐묻기도 애매해서 올리비아는 어정쩡하게 그의 말에 따라갔지만,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하나, 곧바로 이어진 그의 말에 앞의 앞선 대화 따위는 단숨에 휘발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에게서 뽑아낼 첫 번째 질문을 정했다만.”

“그레타에게 질문할 첫 번째? 두 번째도 있어?”

“일단 첫 번째가 해결되면 두 번째, 세 번째도 나오겠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선 올리비아는 까치발을 하고 소근거렸다.


“그렇지. 그래서 첫 번째 질문이 뭔데?”

“그렇게 속삭이지 않아도 된다니까. 부추기는 것도 아니고.”

작게 벌어진 도톰한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결에 섞인 장미향에 크라이어는 의식적으로 숨을 잠시 참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갈수록 억누르기 힘들어지는 갈망을 부채질하는 이 무방비하기는 토끼 같으면서도 경계심도 토끼만큼이나 많은 황녀라니.

당연히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올리비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소곤거렸다.


“부추기긴 뭘 부추긴다고? 아무튼 기분 상 속닥거리고 싶으니까, 빨리 첫 번째가 뭔지나 말 해봐.”

옅은 한숨을 내쉰 크라이어가 그녀의 동그란 이마를 밀어내는 대신 불쑥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에 반사적으로 목을 뒤로 빼면서 무게 중심이 뒤로 넘어간 올리비아가 비틀거렸고,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잡아주었다.

서로의 숨결이 코끝을 스칠 만큼 가까워지고 나서야 뒤늦게 그와의 거리를 깨달은 올리비아는 목을 움츠리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제 허리를 감은 손은 여느 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크라이어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분상으로 속삭이려면 이 정도 거리는 되어야 들리겠지.”

“아니, 안 그래도 들려.”

“아니, 안 들릴 거다.”

일부러 더 목소리를 죽이는 그를 향해 올리비아는 삽시간에 달아오른 귀에서 나는 열감을 느끼며 바짝 붙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알았어, 알았다고 속삭이지 않으면 되잖아!”

하지만 그녀가 밀린다고 그대로 밀려날 그가 아니었다.

그는 한껏 몸을 뒤로 빼고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린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얀 목선에 돋은 파란 핏줄을 보는 그의 목젖이 꿈틀거렸고, 그의 시선은 점점 진득하게 깊어졌다.

한껏 딴청을 부리던 올리비아는 본능인지 뭔지로 위험을 감지하고 냅다 외치려고 입을 크게 벌렸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헛숨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르고 조금 일어난 입술이 가는 목덜미에서 콩닥거리는 핏줄에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콩콩거리는 올리비아의 맥박이 입술을 타고 전해지자 크라이어는 눈가를 길게 접어 웃었다.

정말이지 경계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대로 자국을 내 버리면 어떨까? 라는 강렬한 욕망이 피어올랐다.

더운 숨이 목을 타고 흐르는 느낌에 얼어붙었던 올리비아는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일단 외쳤다.


“물지 마!”

그리고 내려앉는 무덤 같은 정적.

제가 외친 말에 제풀에 놀란 올리비아가 눈만 데굴데굴 굴려 크라이어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진이라도 난 듯 거세게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크라이어는 이내 느릿하게 입술을 떼며 웃었다.


“물 생각은 없었다.”

그 말에 결코 거짓은 없었다. 빨아 당긴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물 생각은 없었으니까.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던 올리비아는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를 향해 이를 세웠다.


“뭐 하는…….”

크라이어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그의 멱살을 잡아 내린 올리비아는 그대로 그의 목을 와구 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정지.

이전보다 훨씬 더 어색하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침묵이 내렸다.

가출했던 정신이 하필 이 타이밍에 돌아온 올리비아는 제가 한 짓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왜 갑자기 문 거야? 무슨 짓이야? 어? 무슨 짓이냐고?

몇 초 전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의 마른 입술이 제 목에 닿는 순간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이 그야말로 펑, 하고 폭발하는 것 같았으니까.

올리비아는 어찌할 바 모르는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세웠던 이를 누그러뜨렸고, 그 탓에 촉촉한 입술이 그의 목을 오물대게 바뀌었다.

순간 그의 등이 뻣뻣하게 굳어졌고, 입술을 통해 그 기색을 느낀 올리비아의 등이 덩달아 빳빳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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