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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어때? (89/146)


#89. 어때?
2022.07.07.


슈가는 도통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간질거리는 이 기분을 또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아이는 문득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던 올리비아를 떠올렸다.

그분이라면 답을 주실 수 있을까? 있겠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훤히 읽는 듯했지 않나.

앙브흐에게 잡힌 손을 꼬물거리던 슈가가 잔뜩 흔들리는 눈동자로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을 짓는 사이.

크라이어는 아이작을 흘긋 보더니 피식 웃었다.

평소라면 왜 그렇게 웃느냐며 기겁을 했을 아이작은 꼭 붙어서 무언가 속닥거리는 앙브흐와 슈가에게 정신이 팔려 그 웃음을 보지도 못했다.

아이작의 상체가 앙브흐와 슈가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어린애다.”

“네?”

뜬금없는 크라이어의 말에 몸을 덜컥 세우고 그제야 반응한 아이작은 여우 눈을 더욱 가늘게 떴지만, 크라이어는 그를 지나치며 딱 한마디만을 반복했다.


“어린애라고.”

멀어지는 크라이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아니 그냥 알 수 없는 분이라니까. 갑자기 어린애라니? 다음에는 어린애 모습으로 날 덮치겠다는 예고인 건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읊조리던 아이작은 순간적으로 온몸에 돋은 소름을 문질렀다.

고대신이니 마법이니, 낙인이니 하는 것이 실재하는 상황에서 저 괴물 같은 주인님이라면 어린애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 것이 마냥 헛소리만은 아닐 것 같았으니까.

양팔을 벅벅 문지르던 아이작은 크라이어가 사라진 자리에서 얼른 시선을 떼어냈다.

그런 그의 시야로 활짝 웃는 앙브흐와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겨우 웃음 비슷한 표정을 짓는 슈가가 들어오자 아이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야. 저 영애는 정말 무서운 게 없다니까…….”

주인님과 같은 낙인의 소유자. 그러니까 고대신의 것이라는 증거가 선명한 아이를 저리도 거리낌 없이 가까이 하다니.

슈가라는 아이 자체는 그저 평범한 아이다. 아니, 가족이 전부 죽고 홀로 지독한 짐을 진 불쌍한 아이겠지.

하지만 그 짐이 세상을 전부 불태우겠다는 미친 소리를 해대는 ‘고대신’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아이작은 이내 둘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생존본능은 ‘낙인’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



“황녀 전하께서요?”

“그래.”

케슬란은 호위 임무 중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단장의 집무실로 온 참이었다.


“지금 호위 중입니다만.”

굳은 얼굴로 자신의 임무를 피력하는 케슬란을 향해 단장은 짧게 혀를 찼다.


“그걸 모르겠냐, 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내가 직접 양해를 구하고 대타를 세워뒀다. 그러니 얼른 가봐.”

그 말을 끝으로 턱짓으로 축객령을 내린 단장을 뒤로한 케슬란은 얼떨떨한 심정을 감춘 채 황녀 궁으로 향했다.

흠잡을 곳 없는 기사다운 당당하고 적절하게 힘이 넘치는 걸음걸이였지만, 그의 입안은 사막보다 더 바짝 마르고 있었다.

케슬란을 아는 많은 이는 그에 대해 거의 비슷한 감상을 내놓곤 했다.

기사의 귀감. 기사의 모범. 용감하고 성실하며 실력까지 갖춘 기사.

그와 가장 가까운 기사단 동료들마저 욕설을 섞기는 하지만, 그의 능력과 용기를 인정하고 곧 그가 부단장이 될 거라는 사실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명.

그 감상에 절대 동의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후, 후우. 후우.”

저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뱉은 케슬란은 흥건하게 젖어 가늘게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꾹 쥐었다.

가슴이 세차게 두방망이질 쳤지만, 늘 그랬듯이 그는 물러나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이윽고 황녀의 집무실에 거의 다다랐을 때 케슬란의 목은 거의 찢어질 듯 말라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표정하고, 단호함이 느껴지는 기사의 표본 그 자체였지만, 그의 속은 어찌나 바짝 타들어 가는지 긴장으로 땀이 흥건해진 주먹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황녀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온 제국의 기사인 그에게 돌아간다는 선택지 따위는 없다.

케슬란은 이젠 아예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면서 뻣뻣하게 굳은 팔을 올렸다.

-똑똑.

너무 불안하고 긴장한 나머지 시야가 아주 좁아진 그는 차라리 문 뒤에서 돌아가라는 명령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인생의 반전 따윈 없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령에는 무조건 따른다는 기사로서 반사 작용으로 문을 덜컥 연 케슬란은 아예 시야가 캄캄해졌다.

하지만 그간 반복 훈련으로 다져진 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충심을 다해 모시는 황실의 핏줄을 향해 예를 다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그가 제대로 예를 차리기도 전에 빽빽하게 쌓인 서류 너머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되었어. 케슬란 경?”

“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답하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여느 때와 같이 그 떨림은 딱 그 스스로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케슬란 본인만큼이나 그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 크라이어가 있었지만, 케슬란은 깨닫지 못했다.


“가까이 와. 서류 때문에 보이지 않으니까.”

“송구합니다.”

케슬란은 절도 있게 서류를 헤치며 올리비아 앞에 섰다.

거대한 창을 등지고 그만큼이나 거대한 책상을 앞에 두고, 의자, 아니 서류에 거의 파묻힌 올리비아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과 그보다 더 선연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발달된 감으로 그 시린 시선이 자신을 훑는다고 느낀 찰나, 케슬란의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황궁 기사단의 촉망받는 인재인 만큼 황녀인 올리비아를 직접 본 기회는 꽤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본 적은 처음이었다.

공무 중에 스치듯 먼발치에서 황녀를 볼 때도 단 한 번도 ‘작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건만, 실제로 눈앞에 있는 황녀는 지극히 작았고, 가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케슬란은 더더욱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올리비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한 손으로 쥐면 그대로 부러져 버릴 듯 연약해 보이는 이가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나 커 보이는 거지?

크다 못해 절대 넘을 수도 없을 만큼 까마득한 벽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흐음. 곧 부단장이 될 거라고 했었지.”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지만, 케슬란의 귀에는 닿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압도되어 있었으니까.

그를 시선 하나로 찍어누르는 올리비아의 몸을 휘감은 공기는 과연, ‘황제’의 그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날 때부터 타고난 볼셰이크의 피.

대륙이 멸망할 만큼 광기 어린 전쟁을 몇 번이고 겪으며 죽음에서 돌아온 경험까지.

그런 것들이 은연중에 올리비아의 주변을 맴돌고 있으니, 고작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어쨌건 고작 제국 기사인 케슬란이 그 기세를 느끼고 압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케슬란 입장에서는 올리비아의 이력을 모르기에 그저 충성을 다해야 할 황실의 유일한 핏줄이 이토록 거대한 존재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당혹감도 잠시, 그저 감격스러웠을 뿐.

그는 올리비아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여전히 시끄럽게도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묵묵히 기다렸다.

케슬란에게는 억겁의 시간 같은 몇 초가 흐른 뒤.


“어때?”

손을 휘젓는 올리비아의 뜬금없는 질문에 케슬란이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턱 막힌 순간.

어둠에서 불쑥 손이 튀어나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당겼다.


 
케슬란이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어둠을 응시하는 사이, 검붉은 빛이 일렁거리던 어둠은 어느새 완연한 사람의 형상이 되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짐승의 시선을 받은 케슬란의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도대체 언제……? 언제부터 황녀 전하의 뒤에 있었던 거지?

황녀 전하께 시선을 빼앗겨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면, 기사 실격이리라.

하지만 케슬란이 엄청난 충격을 받은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이유뿐이었다면, 기사 실격이라고 자책하고, 용서를 빌며 자신을 더욱 채찍질했겠지만…….

케슬란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목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황녀 전하의 지근 거리에 있던 남자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는 뒤늦게나마 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남자가 그 유명한 ‘황녀의 기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니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황녀 전하께서 위험할 일은 없었겠지만, 만약 저 남자가 아닌 다른 자가 황녀 전하를 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숨어들었다면.

자신의 눈앞에서 황녀 전하께서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결과에 케슬란의 심장은 끝도 없이 쿵쾅거렸고, 크라이어는 그 시끄러운 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면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크라이어에게 눈을 주지 않고 케슬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물었다.


“어때? 그대로 놔둬도 괜찮을까?

“아니.”

듣는 당사자인 케슬란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문답이었지만,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그저 한마디만으로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케슬란이 자책감을 수습하며 다급히 용서를 구하려는 찰나.


“못 써먹겠군.”

크라이어는 마치 케슬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 한마디로 그를 난도질했다.

그리고 그 노골적이고 신랄한 평가는 케슬란이 올리비아에게 가까워질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크라이어의 진심이 크게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기사 놈.

황녀 궁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기분 나쁠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연모하는 이를 앞에 두고 설레고 긴장하는 것처럼.

설마하니 황궁 기사가 이전의 타국에서 억지로 제국에 밀어 넣었던 자칭 ‘기사’들처럼 쓰레기 짓을 하진 않을 테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아까부터 귀에서 울리는 시끄럽게 뛰는 심장부터 지나치게 긴장했는데도 마치 아닌 듯 감추려는 모습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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