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대륙을 적으로 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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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대륙을 적으로 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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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대륙을 적으로 돌리지
2022.07.04.
도돌이표를 찍듯이 이어지는 두 사람의 말다툼인지 뭔지를 지켜보던 크라이어는 아예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댔다.
저 두 사람은 나름대로 운이 좋은 편이리라.
평소 같았다면 크라이어는 올리비아 곁을 떠나 있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쓸데없는 풋풋한 연인 간의 싸움 같은 건 곧바로 뭉개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크라이어는 가만히 올리비아를 보고만 있어도 불쑥불쑥 치솟는 제 갈망을 누르기 위해 조금쯤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인내심이 이렇게 짧을 줄 몰랐는걸.
아니, 애초에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은 놈이었는지도.
그의 시선이 쇄골께의 낙인으로 향했다.
이 낙인이 찍히기 전, 그러니까 ‘부활’하기 전 대체 자신은 무엇이었을까.
‘계속 찾아보고 있어. 하지만 아무래도 기록된 역사에서는 당신을 찾기 힘들 거 같아.’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다 사그라들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자신은 ‘폐기된 기록’일지도 모르지.
아니, 지금 상황에서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 뿐.
폐기된 기록이라……. 과연 무슨 대역죄를 짓고 역사에서 지워졌을런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크라이어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신의 ‘과거’에 흥미가 일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과거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어디까지나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과거의 기억이 없더라도 그는 새삼스럽게 자아에 혼란이 오지도, 목표한 바가 흔들리지도 않았으니까.
게다가…….
‘대륙을 적으로 돌리지, 뭐.’
자신을 위해 기꺼이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올리비아도 있지 않나.
과거가 무엇이건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과거 따윈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지. 만약 자신의 과거로 인해 고대신의 노예로 선택되었다면…….
그레타에게서 답을 뽑아내야 할 첫 번째 질문이 결정되었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왁왁거리던 앙브흐와 아이작이 입을 다물었는지 사위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끝났나.”
“네? 아뇨. 이제 시작하셔야죠!”
“영애, 그게 아닙니다. 네. 죄송합니다.”
앙브흐의 발랄한 답에 아이작은 여우 눈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됐어. 변장은 혼자 할 수 있으니 나가보도록. 나머지 준비시켜.”
크라이어가 턱짓으로 축객령을 내리자, 앙브흐는 곧바로 수긍했고 아이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크라이어의 시선을 받은 슈가는 다시 딸꾹질을 하려다가 제 손을 감싸 쥐는 앙브흐의 온기에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슈가는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방금 낙인 쪽에서 뭔가 욱신거린 거 같은…….
하지만 그 생각은 이어지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도사리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에 산산이 흩어졌다.
크라이어는 유리알 같은 눈으로 슈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낙인을 가진 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실험을 시작하지.”
***
크라이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올리비아는 여느 때처럼 산처럼 쌓인 일거리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읽는 건지 아닌 건지, 서류를 첫장부터 끝장까지 쓱 긁듯이 훑어내린 올리비아는 거침없이 시뻘건 도장을 들어 쾅 내려찍었다.
“이것들이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이 밥값도 못하는…….”
황녀답지 않은 걸쭉한 욕을 짓씹던 그녀는 문 쪽에서 나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전하, 빈자리를 채울 사용인에 관한 서류입니다.”
그 말에 서류에만 고정되어 있던 올리비아의 시선이 올라갔다.
그녀는 보던 서류의 마지막 장에 서명을 휘갈긴 후 곧바로 사용인에 관한 것을 잡았다.
단숨에 훑었지만,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
애초에 뭔가 눈에 띄는 이력이나, 평범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황녀 궁에 발을 들이지도 못할 테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 사용인이 들어오게 된 경위가 경위이지 않나.
하인데르 후작이 궁에 빈자리를 만드려고 황녀 궁의 기강을 문제삼아 황제 폐하께 읍소까지 했으니 새로 들어오는 사용인을 의심하지 않으면 멍청한 짓이겠지.
“입궁했나?”
“네. 대기 중입니다.”
“흐음.”
올리비아는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수상한 자라면 애초부터 곁에 두지 않는 것이 정답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이 사용인을 궁에 들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가장 처음 배제했다.
‘의심스러운 자를 궁에 들일 필요가 있나.’
‘당연히 들여야지.’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의심스러운 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이미 알고 있다면 꼬리에 불과한 그 자부터 시작해서 몸통을 잡아낼 수 있잖아. 내기 미끼를 놓지 않아도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할 자가 있으니 일이 한결 편해지겠지.’
그녀는 이 사용인을 이용하여 역으로 낚시를 할 생각이었으니까.
큰 기대는 없지만, 어쨌건 그쪽에서 ‘눈’이라고 심어둔 자이니 그 눈을 교란만 잘해도 이쪽에는 이득이겠지.
대륙 전쟁을 원하는, 정확히 말하면 대륙 전체를 싸그리 다 불태우길 원하는 그레타가 황제궁도 아닌 황녀궁에 사람을 심은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크라이어의 동향. 그가 자신에게 붙어 있는 이유를 제국을 교란시켜 전쟁을 조금 더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 했었다지.
“양동작전도 가능하겠는걸.”
거의 들리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올리비아는 곧 서류를 내려두었다.
과연 어떤 인물일지 심히 궁금하긴 했지만, 수상한 자의 얼굴을 확인한답시고, 이 자리로 불러들이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일 터.
올리비아는 태연하게 평소처럼 일을 처리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상 없어 보이네.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한 사람이 빠지는 바람에 다른 이들의 일이 가중되었을 텐데. 한시라도 빨리 빈자리를 채워야겠지.”
“황송합니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올리비아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어떤 자인지 궁금하긴 해. 감시를 붙여야겠지?”
그리 말하며 습관적으로 크라이어가 머물던 자리로 고개를 돌린 올리비아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졌다.
질문에 답을 줄 사람이 그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잊고 큰 소리를 내버렸기 때문이다.
빈 소파를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입을 뻐끔거리다 다물었다.
괜스레 펜대를 거칠게 긁은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이작하고 대체 뭘 하기에 아직도 돌아오질 않는 거야.”
홀로 있는 집무실에서 울리는 제 목소리에 머쓱한 듯 어깨를 크게 턴 올리비아는 다시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가 현저하게 느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올리비아를 기다리게 만든 크라이어는 ‘실험’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슥 훑어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 생각 없어 보이는 타렌가의 여자가 의외로 능력은 확실한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신과 닮은 체구와 얼굴을 가진 이들을 데려왔기 때문이다.
과연 이 정도라면 언뜻 봐서는 그를 찾아낼 수 없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올리비아의 말이 떠올라 그는 웃음을 삼켰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
그 역시 그랬다. 어떤 변장을 하건,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설사 마법으로 모습이 바뀐다 하더라도 올리비아를 찾아낼 수 있겠지.
크라이어가 고개를 비스듬히 올렸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다. 아니,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바람대로 낙인을 가진 이를 구별할 수 있는 실험에 임하던 슈가가 결론을 내렸다.
“어때? 뭔가 느껴져?”
방실방실 웃으며 묻는 앙브흐는 여전히 슈가와 손을 잡고 있었다.
“네.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슈가는 말없이 벽에 기대서 있는 남자들 중 한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시선을 받은 남자, 크라이어가 고개를 들고 슈가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확실해요.”
“이제 그만!”
손뼉을 짝짝 친 앙브흐가 외치자, 모여 있던 이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면서 벽에 기댔던 등을 떼고 몸을 바로 세웠다.
‘벽에 기대 있기만 하면 된다. 누가 오더라도 움직이지 마라.’
아무런 부가 설명 없이 그런 일을 받았지만, 수상하다며 고개를 젓기에는 생각보다 금액이 컸기에 온 곳이다.
일을 할 곳이 ‘타렌가문의 저택’이었기에 제시한 금액을 납득하긴 했지만, 여전히 찜찜했기에 엉거주춤하게 머뭇거리는데.
“약속한 금액은 저쪽에서 받으면 될 거야.”
발랄한 목소리의 지시에 동시에 고개를 돌린 이들을 향해 타렌저의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시게나.”
그렇게 고용되었던 이들이 썰물처럼 사라진 후 슈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낙인 부근을 꾹 눌렀다.
그런 아이를 향해 몸을 굽힌 앙브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파?”
“아뇨. 그냥 습관이라.”
흐릿한 웃음을 띄우는 슈가를 빤히 바라보던 앙브흐가 활짝 웃었다.
“일도 끝났으니 맛있는 걸 먹을까?”
“아, 아뇨.”
“맛있는 걸 싫어해?”
“그런 건 아니지만.”
슈가는 앙브흐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말이야.”
계속 사양하는 슈가에게 앙브흐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는 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속삭였다.
“사실 지금 돌아가면 엄청난 서류와 상대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날 좀 구해주는 셈 치고 맛있는 걸 먹지 않을래?”
그 말에 슈가는 목 끝까지 올라온 간질거리는 무언가를 꼴깍 삼켰다.
슈가는 결코 멍청하지 않다. 오히려 눈치가 몹시 빠르고 명민한 편에 속했다.
그러니 지금 제 처지가 어떤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망한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고대신의 낙인이 찍혀 언제건 신에게 끌려갈 수도 있는 제물.
그런데도 이런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와 함께 가자며 손을 내밀어준 사람.
슈가는 괜스레 앙브흐와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가슴께에서 몽글거리는 감정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본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 되지도 않는 이에게 ‘가족’의 포근함을 느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자신을 거의 뚫어버릴 듯 바라보는 아이작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사랑의 라이벌로 보고 있는 듯했지만, 차라리 그랬다면…….
절체절명의 위기, 삶의 분기점에서 구원자를 자청한 앙브흐를 향한 나름 개연성이 있는 감정이라고 하리라.
한데, 가족……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