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도와드릴까요?
(87/146)
87. 도와드릴까요?
(87/146)
#87. 도와드릴까요?
2022.06.30.
시원스럽게 나온 답에 올리비아는 다시금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눈을 굴렸다.
그가 얼마나 마법사와 그 딸을 혐오하는지 알고 있는데도 그를 그레타의 곁으로 밀어 넣어야만 했으니까.
그런 그녀의 심정이 고스란히 떠오른 푸른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이어는 제 손가락에 꼬인 붉은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필요하다면 해야지.”
더없이 담백한 말이었지만, 깊이 가라앉은 검붉은 눈동자에서 일렁거리는 것은 명백한 살의였다.
당장이라도 그레타의 뼛가루까지 모조리 태워 없애버릴 그 진득하고 끔찍한 살의를 올리비아는 외면하지 않았다.
그녀는 크라이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말했다.
“뭐든 뽑아낼 수 있는 만큼, 아니 뽑아낼 수 없어도 전부 다 쥐어짜.”
푸른 눈동자에서 시퍼런 불꽃이 타올랐다.
“그리하면 반드시 내가 당신의 낙인을 지워줄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텅빈 손을 꽉 쥐었고, 그런 올리비아의 손을 크라이어의 손이 감싸 쥐었다.
“그래. 그러겠다고 했으니. 날 구해주길 기다리고 있겠다.”
“그게 뭐야, 입장이 바뀐 거 아니야? 기사를 구하는 황녀라니.”
“글쎄. 그쪽이 더 내 취향인데.”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 실없는 농담으로 넘어가 버린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에 그 사실을 당사자인 둘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마치 일상처럼 내려앉은 침묵을 끝으로 올리비아는 서류 더미 사이에 자리 잡았지만, 크라이어는 매번 책을 집어 소파에 앉던 평소와는 달리 문 쪽으로 향했다.
“어디 가?”
쌓인 서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올리비아의 질문에 크라이어는 가볍게 답했다.
“잠시 아이작에게 볼 일이 있어서.”
“아아, 그래. 난 또 벌써 외교관 궁으로 가려는 줄 알았지. 거기 가기 전에는 준비라도 좀 해야……. 음, 준비할 게 있나?”
“당장 목을 비틀지 않게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야겠지.”
“그 마음 절절하게 이해는 되지만 고대신에게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안돼. 그것도 목이 비틀리면 말은 못할 거 아니야.”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조잘댄 올리비아는 곧 손을 살레살레 흔들었다.
“그럼 잘 다녀와.”
별일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올리비아는 곧바로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지만, 크라이어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서류 뒤에서 간헐적으로 물결치는 붉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노르덴 국에서도 그랬지.
다녀오라. 고…….
어느새 부턴가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해지고, 돌아갈 곳이 서로의 곁이 되었다.
크라이어의 눈가를 길게 접어 웃었다.
나쁘지 않아.
정말로.
내가 돌아갈 곳이 네 곁이라는 사실에 이토록 기꺼울 수 있을까.
그러니 바라건데, 낙인이 지워진 후에도 계속되기를.
“다녀오겠다.”
닫히는 문 너머로 흩어지는 그의 인사는 올리비아에게 닿지 않았지만,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고 이미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꽤 오랫동안.
***
아이작보다 더 능숙하게 어둠을 타고 황궁을 나선 크라이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타렌저였다.
“아이작.”
“허억!”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크라이어를 본 아이작이 헛숨을 삼키다 곧 눈썹 끝을 축 내렸다.
“기척 좀 내고 다니시면 안 됩니까. 그리고 왜 이렇게 살벌하게 제 모가지를 잡고 비트시려고.”
들어 줄 리 없는 푸념인 걸 알면서도 한 번쯤 내뱉은 하소연이었건만, 돌아오는 답은 아이작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네가 기척을 잡을 수 있도록 해야지.”
“……네?”
“내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기감을 키워. 아니라면 죽을 테니까.”
“죽…… 네? 아니, 네?”
아이작은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한 발 물러서며 고개를 바짝 뒤로 물렸지만, 크라이어는 지극히 태연하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오늘은 처음이니 그냥 넘어갔지만, 다음부터는 아닐 거다.”
뭐가 아닙니까? 대체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감정 부스러기도 담겨 있지 않은 검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아이작의 등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공황에 빠진 아이작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크라이어는 곧바로 타렌저의 안쪽, 슈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니, 잠시만. 잠시, 주인님!”
아이작은 다급하게 그를 쫓았지만, 끝내 뭐가 아닌지 답을 듣지는 못했다.
더 물었다가는 다음이 아니라 지금 죽을 것 같았으니까.
-똑똑.
아이작처럼 구태여 아이를 훈련시킬 이유가 없기에 크라이어는 대단히 평범하게 손을 들어 노크를 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는 아이작의 여우 눈이 더욱 가늘어지면서, 누가 봐도 억울하고 서럽다는 표정이 번질 무렵.
-달칵.
허락의 말이 아니라 문이 조금 열리면서 그 사이로 작은 머리통이 슬쩍 나타났다.
“그냥 앞에 놓고 가달라고 말씀드렸…….”
다람쥐처럼 볼에 통통하게 뭔가를 넣은 채 말하던 슈가는 눈을 데굴 굴리다 크라이어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그가 상식적으로 노크를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슈가의 눈이 둥그렇게 커지더니 통통했던 볼이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입 안에 물고 있던 구운 아몬드를 다급히 오작오작 씹어 넘긴 슈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드, 들어오세……!”
지나치게 다급하게 움직인 터라 문을 열다 거기에 부딪칠 뻔한 슈가의 작은 머리를 한 손으로 당긴 크라이어는 별다른 말 없이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노크에 이어 다칠 뻔한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도와준 크라이어의 태도에 슈가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손길이 닿았던 머리꼭지에 제 손을 덮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기척도 없이 따라 들어온 아이작이 어느새 그렇게 친해진 건지, 아이의 어깨를 잡고 속닥거렸다.
“저분 앞에서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
“네에? 히끅!”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데다, 쓸데없이 진지한 아이작의 말에 이미 충분히 놀란 상태였던 슈가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히끅, 히,끄윽.”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떻게든지 멈추려고 했지만, 딸꾹질이 그리 쉽게 멈췄다면 온갖 민간요법이 횡행할 리가 없을 터.
다급하게 혀로 손가락을 핥아 콧방울에 찍어 바르던 슈가는 곧이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딸국질을 멈췄다.
어느새 댜가온 건지 크라이어가 아이의 바로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까.
“멈췄군.”
“방금 뭐 하신 겁니까?”
“혈을 가볍게 눌렀다.”
“……네?”
아이작은 달아나려는 어이의 덜미를 잡으며 간신히 되물었다.
딸꾹질하는 슈가의 등의 어느 부분에 손을 대는 것까지는 봤지만, 갑자기 뭔가를 눌렀단다.
“설명하려면 복잡하다. 볼셰이크의 역사서에 나오더군. 간단히 말하면 몸의 어느 지점을 정확하게 누르면 상태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건 아니군요. 볼셰이크라면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방법이랍시고 자신의 가문인 아켄델에서도 내려오는 방법이 있다.
그 터무니없는 방법도 볼셰이크에서 나온 것이라 했으니 몸을 제어하는 혈인지 뭔지도 있겠지.
대충 납득해 버린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슈가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자신을 잡아먹기는커녕 오히려 도와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그런 슈가의 정수리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할 수 있겠나.”
잠시 그 말의 의미를 고민한 슈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와 똑같은 검붉은 눈동자를 헤집듯이 들여다본 크라이어가 다시 물었다.
“날 앞에 두고 제대로 할 수 있겠나.”
“네, 네네. 낙인의 구분은 할 수 있…….”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크라이어의 시선에 슈가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구원처럼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이제껏 타렌저에서 지내면서 낯선 사람이 불편해 사용인들을 피하던 슈가였지만, 지금만큼은 어떤 낯선 사람이라도 환영하고 싶었다.
그리고 슈가의 바람대로 낯선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 아이를 빼내 줄 수 있는 이가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해맑은 웃음과 함께 들어선 앙브흐는 품에 뭔가를 가득 안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크라이어의 눈치를 보지 않는 앙브흐는 기운차게 방의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안고 있던 물품들을 와르륵 쏟았다.
알을 막 깨고 나온 아기 오리처럼 본능적으로 앙브흐 곁으로 쪼르르 다가선 슈가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으려 손을 내다 멈칫했다.
허우적거리는 작은 손은 곧 보드랍고 따뜻한 손에 잡혔다.
앙브흐는 자연스럽게 슈가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거리면서 반대쪽 손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하나하나 짚었다.
“기사님이 변장할 때 필요한 물품들이에요! 일단 이건 가발이고, 그다음은 입을 옷…….”
“적당히 입고 나가지.”
앙브흐의 설명이 시작도 되기 전에 잘라버린 크라이어는 아이작을 향해 눈짓했다.
“네네. 자, 이제 나갑시다. 슈가, 무슨 느낌인지 확실히 기억했지?”
“무, 물론이죠!”
낙인에서 느껴지는 다른 느낌을 아주 뼛골에 새길만큼 선명하게 기억한 슈가는 고개가 떨어져라 위아래로 휙휙 끄덕였다.
그렇게 무언의 축객령을 받은 슈가와 아이작이 문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옷 갈아입는 거 도와드릴까요?”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앙브흐가 폭탄을 터뜨렸다.
과연 그녀의 돌발행동은 크라이어조차 예상치 못했던지, 잠시 앙브흐의 말을 헤아리던 그를 향해 그녀는 바지를 집어 들고 흔들었다.
“사용인을 부를 수는 없으니까…….”
“그걸 왜 영애가 합니까?”
“아니. 사양하지.”
앙브흐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아이작과 크라이어의 말이 뒤섞여 울렸다.
제안을 받은 당사자인 크라이어의 거절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아이작은 왜 반대에요?”
앙브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지만, 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도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바로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왜요?”
앙브흐가 아이작을 향해 한발 다가서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당혹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제삼자인 크라이어는 알만하다는 표정과 한심하다는 눈빛을 감추지도 않은 채 아이작을 응시했고, 슈가 역시 언제 긴장했었냐는 듯 흐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이내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니, 지금 이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뭐가 이상해요? 말했다시피 사용인을 들일 수가 없으니 제가 하겠다고 한 건데.”
“그러니까 그걸 왜 영애가 하려고 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