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견딜 수 있다. (86/146)


#86. 견딜 수 있다.
2022.06.27.


불쑥 치밀어 오른 생각에 그레타의 눈가에 핏발이 섰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인형을 만드는 것 자체야 쉽겠지만, 다루는 일은 꽤 신경을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그녀의 손아귀에서 노는 인형인 노르덴 국의 왕과 거리가 멀어져 평소보다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하는데, 아직은 필요도 없는 인형을 늘릴 수는 없는 노릇.

정 거슬리게 굴면 인형으로 만들어야겠지만, 제 말에 군소리하지 않고 움직이는 걸 보니 당분간은 지켜봐도 될 듯했다.

인형의 눈을 통해 노르덴 국에서 제 할 일을 하는 티슨을 지켜보던 그레타는 지끈거리는 눈을 누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신의 뜻을 행하는 대가로 얻은 그녀의 힘은 그야말로 ‘마법’이었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면, 이런 귀찮은 짓거리를 할 필요 없이 힘을 얻은 즉시 신의 뜻대로 대륙을 불태웠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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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면 그분을 만나지도 못했겠지만.”

크라이어가 머무르는 황녀궁으로 아련한 눈빛을 던진 그레타는 이내 눈을 감았다.

신전과 제단이 완성되고, 제 뜻대로 움직이는 도구도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이 제국에, 그의 곁에 왔으니 남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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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녀…….”

그레타의 눈이 번들거리면서 잇새로 까드득, 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국을 유린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분의 곁에 딱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황녀는 정말이지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차피 없애버릴 제국이니 황녀가 그전에 망가진다고 해도 상관없겠지.

황녀 궁에 새로운 사용인을 밀어 넣는 일은 이번 주 내로 끝난다고 했던가.

그레타는 눈을 감은 채 캄캄한 시야로 피비린내 물씬 나는 자신만의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그녀의 코끝으로 주제 파악 못 하고 감히 그분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황녀의 피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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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외교관 봤어?”

올리비아는 기가 차다는 듯 코로 웃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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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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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아주 우습게 보고 있네. 저렇게나 노골적으로 그레타를 외교관으로 제국에 들이려고 무려 황제 폐하께 읍소하다니.”

냉소한 올리비아는 그레타가 머무는 궁으로 시선을 주다 이내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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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차라리 잘 됐어. 노르덴 국의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중얼거리면서 뭔지 모를 일을 꾸미는 걸 감시하느니, 제국 내에서 돌아다니면 지켜보기가 한결 수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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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지하에서 뭔가를 꾸미는 것 같지는 않았다만.”

피식 웃은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는 부루퉁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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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왕궁 중앙에 떡 하니 지은 신전의 제단이 지하였잖아? 여하간 지하는 맞아.”

턱을 치켜들며 내 말이 맞지? 라는 의미를 피력하는 올리비아를 본 크라이어는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그녀의 입가에 붙은 쿠키 부스러기를 훔쳤다.

그는 제 엄지에 붙은 다디단 부스러기를 혀로 핥았다.

그 일련의 과정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제 입술을 스치듯 지나간 거칠고 긴 손가락에 그의 혀가 기는 순간까지도 눈만 깜박거리던 올리비아는 곧이어 들린 나지막한 평가에 반사적으로 제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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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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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단 걸 먹었으니 달겠지.”

입술에 개미가 기어가는 듯 간지럽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올리비아는 애써 모른 척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를 외면한 채 부산스럽게 서류를 뒤적거리던 올리비아는 입술에서 찌릿거리는 느낌이 사라진 후에야 서류 뭉치 하나를 집어 들고 크라이어를 향해 시선을 주다 멈칫했다.

곧바로 마주친 그의 시선이 단 한시도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으니까.

분명 찰나였겠지만, 검붉은 눈동자와 마주한 그 순간이 어쩐지 아득히 오래인 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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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어?”

갑작스럽게 고개를 푹 숙이고 낙인이 새겨진 쇄골 께를 잡는 크라이어를 본 올리비아가 거의 펄쩍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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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낙인이 아픈 거야?”

언제 그를 외면하거나 물러났었냐는 듯 그에게 바짝 다가선 올리비아가 까치발을 하고 고개 숙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림자가 져 깊은 음영이 드리운 크라이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올리비아는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손길이 그의 잿빛 앞머리를 걷어 올리는 순간 크라이어는 미간을 조금 더 찡그려야만 했다.

낙인이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욱신거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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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는 거지? 설마 그레타가 가까워져서…….”

올리비아의 걱정어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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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과는 상관없다.”

지나치게 확신에 찬 목소리였지만, 올리비아는 의문을 표하기보다는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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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창백해. 많이 아파? 전에도 이랬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물론 크라이어의 안색은 평소와 똑같았지만, 올리비아의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았을 뿐.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크라이어의 심장이 둔중하게 쿵 울림과 동시에 낙인에 마치 창이라도 꽂힌 듯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소리 없이 신음을 내지르며 허리를 꺾는 크라이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올리비아가 팔을 뻗었다.

그 작은 몸으로 크라이어를 온몸으로 떠받친 올리비아가 그의 등을 꼭 안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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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 괜찮아.”

무엇이 괜찮은지, 괜찮아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올리비아는 제 말이 진리라도 되는 듯 몇 번이고 속삭였다.

그 말에 담긴 진심이 크라이어의 가슴을 두드리기 무섭게 촉매제라도 되듯 낙인의 고통은 한층 더 심해졌다.

그래.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저런 말을 들었을 때 아픔이 가라앉아야 할 터인데, 낙인의 통증은 그 반대로 날이라도 잡은 듯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 숙인 크라이어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비웃음이나 비틀린 것이 아닌, 진심에서 스며 나오는 웃음이었다.

낙인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지는 아픔 따위보다 제 등을 토닥이며 감싸 안는 작은 온기가 훨씬, 훨씬 더 선명하게 다가왔으니까.

괜찮다. 라고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에 담긴 걱정이 어찌나 기꺼운지.

그 다디단 온기와 걱정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깟 고통쯤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그는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다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당장이라도 올리비아를 삼킬 듯 사납게 으르렁대는 제 욕망을 누르며 팔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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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은 그는 붉은 머리카락이 물결치는 가는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볼셰이크 특유의 체향, 희미한 장미향을 욕심껏 들이마신 그의 단단한 등이 느릿하게 부풀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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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크라이어?”

어쩐지 고양이가 만족감에 그르렁거리는 진동이 제 어깨에 얼굴을 부비는 크라이어에게서 전해지는 듯해서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지만, 바로 돌아온 크라이어의 답에 그의 등에 두르고 있다가 슬그머니 풀던 팔에 다시 힘을 꽉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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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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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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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프냐는 말에 돌아온 담백한 긍정에 올리비아의 얼굴에 수심이 내렸다.

웬만한 고통은 ‘아픔’이라고 취급도 하지 않는 그가 아프다고 노골적으로 말할 정도면 대체 얼마만큼의 통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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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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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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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있으니 견딜 수 있다.”

지나치게 가깝게 붙어 있던 탓인지 그의 말이 거짓 부스러기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에 올리비아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크라이어를 곁눈질하다 이내 얌전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낙인의 아픔이라니. 심지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으니 심각한 것이 분명한데도 원인도, 그 여파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당장 그를 덮친 고통이라도 덜어지길 바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크라이어가 느릿하게 고개를 올리고 거칠고 마른 손으로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마음 같아서는 밤새, 아니 시간을 세지 않고 그대로 그녀를 안고 삼켜 버리고 싶었지만, 제 갈망을 깨달은 이후 언제나 그렇듯 배 아래 안쪽에서 들끓는 열기를 찍어누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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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찌할 거지?”

앞뒤 없이 나온 말에도 올리비아는 ‘그것’이 그레타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듣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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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호위를 붙였으니, 그 호위를 불러들여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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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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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 겸 감시자지. 타국에서는 감시자라고만 생각하고 있나본데, 제국에서 황궁의 기사가 붙어 다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호위’의 역할은 다 하는 거야.”

일종의 상징이었다. 이 사람을 건드리면 제국을 상대할 각오를 하라는 의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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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호위에게 그것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보게 할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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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랬겠지만, 상대는 마법사잖아.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보기는 무슨, 당하기 전에 빼내야지 않겠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올리비아가 말한 ‘무슨 짓’이란 이미 죽어버린 노르덴 왕처럼 마법사의 말만 듣는 술수를 뜻하는 것이었다.

지난 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법사나, 그 딸인 그레타가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유추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물론이거니와 크라이어도 짚어내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그레타는 단순히 사람을 조종하는 것을 넘어, 아예 꼭두각시 인형으로 쓸 수 있다는 것.

그 때문에 현재 노르덴 국의 왕이 어떤 꼴인지도.

하지만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 잡은 것처럼, 일단 호위가 무슨 짓을 당하기 전에 조치를 취하자는 둘의 결정으로 그레타는 호위를 인형으로 만들 기회조차 잃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서로가 가진 패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기회를 잃은 그레타는 물론이거니와, 기회를 앗아간 올리비아 그리고 얼떨결에 인형이 될 미래를 피하게 된 케슬란조차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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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것의 감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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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 말인데, 아무래도. 음…….”

올리비아는 말을 꺼내기 힘들다는 듯 머뭇거렸고,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잡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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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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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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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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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을 아무리 보내도 안 될 테고, 다른 사람들도…….”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을 이어가던 올리비아는 이윽고 웃음기 어린 크라이어와 마주하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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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알고 있잖아!”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크라이어는 낮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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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시’를 나보고 하라는 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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