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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따분한 자리네. (85/146)


#85. 따분한 자리네.
2022.06.23.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쉰 보니타는 쥐고 있던 거울을 내려두었다.

황녀와의 만남을 그레타에게 전할까, 말까 며칠 간 저울질했고 결론이 났으니 더는 거울을 쥐고 있을 필요가 없을 터.

물론 그냥 추측만으로 황녀를 내버려 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황녀는 고대신에 대해 알고 있지만, 확실하게 신을 따르겠다는 확언을 하지도 않았고, 신의 종복처럼 신에게 종속되어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볼셰이크 핏줄임을 감안하면 경계할 이유는 차고 넘치리라.

황녀 주변을 캐려면 일단 신의 종복의 허락부터 받아야 할 테니.

보니타는 넣어둔 거울을 다시 꺼내 들었다.

신의 종복에게 이야기를 전하려면 자신이 직접 하는 것보다 그레타를 통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겠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거울 저편으로 주홍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무슨 일이지?”

“황녀의 동향을 조사하려면 그분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황녀?”

과연 황녀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그레타의 눈이 번들거렸고, 이마에 시퍼런 힘줄이 비치기 시작했다.

보니타는 그런 그레타를 상대로 침착하게 거짓을 내뱉었다.


“황녀궁에 빈자리가 났습니다. 밀어 넣을 사용인을 추리고 있지만, 궁에서 그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없을 테니.”

아주 그럴듯한 변명이었기에 그레타의 시선이 약간 누그러졌다.

하지만 황녀라는 단어 자체가 불쾌했던지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여자에 관한 거라면 상관없어. 대륙을 불태우고 정화하기 위해서는 제국이 가장 큰 걸림돌이니, 그분께서 직접 제어를 한다고 했으니까.”

크라이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면 제국에 계속 머무실 거라는 이야기죠?’

‘그래.’

‘왜 그리하시는지 가르침을 내려주실 건가요?’

‘아니.’

애초에 그는 그레타에게 제국에 남은 이유조차 말하지 않았으니까.

하나, 그레타는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러하듯, 늘 제 생각이 진리인 것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 말에는 확신이 넘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보니타가 그런 그레타의 말을 믿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분께서 그런 뜻을 가지고 제국에 머물고 계실 줄이야.”

하나, 황녀와 신의 종복이 함께 있는 순간을 떠올린 보니타의 목소리는 미묘한 의심을 담고 있었다.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황녀의 손을 잡지 않으면 길을 잃어버릴 테니까.’

신의 종복이 황녀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할 때의 눈을 연기나 가장, 거짓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음 순간, 그레타가 찢어지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보니타!”

“네.”

“무슨 일이 있었지?”

형형한 빛을 발하는 그레타와 시선을 마주한 보니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연이어 거짓을 토해냈다.


“제가 괜한 짓을 했습니다. 노르덴 국으로 그분으로 다시 돌려보내려고 했거든요. 그분의 깊은 의도를 헤아리지 못한 불찰입니다.”

물 흐르듯 나온 거짓에 그레타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짓을.”

“네.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건조하게 제 잘못을 고하는 보니타를 번들거리는 눈으로 살피던 그레타는 곧 그 시선을 거뒀다.

설마하니 보니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굳이 거짓말을 할 거라면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감추었겠지.


“앞으로는 자체 판단 같은 건 하지 마.”

“네.”

보니타의 짧은 답을 들은 그레타는 거울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덧붙였다.


“네 자체 판단의 결과를 곱씹어 보고.”

그 말을 끝으로 거울은 평범한 거울로 돌아갔지만, 보니타는 거울을 꽉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에는 시뻘건 핏발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바싹 곤두서 있었다.

그레타의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자체 판단. 그리고 결과.

눈도 뜨지 못하고 죽은 제 아이를 가슴에 묻은 그날. 보니타는 자신이 한 선택을 저주했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앗아간 이 세계도.

-툭, 투둑.

거울을 지나치게 강하게 쥔 탓에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에서 핏물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보니타는 귀기 어린 눈으로 과거를 보고 있을 뿐.


“……작님. 후작님.”

그런 보니타를 현실로 일깨운 건 달갑지 않은 천박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언제 온 건지 제 눈앞에서 눈알을 굴리는 여자를 한 차례 훑은 후, 거울을 치우며 입을 열었다.


“남자의 처리는?”

예상치 못한 기습 같은 질문이었지만, 과연 뒷골목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자답게 여자는 태연하게 거짓을 고했다.


“처리했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요.”

물론 자신의 손으로 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결과적으로 처리되긴 했다.

거짓말이었지만, 진실이기도 한 말에 보니타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고, 그렇게 슈가의 형은 모든 이의 생각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렇군. 황녀 궁에 들어갈 후보는 이틀 후에 데려오도록 해.”

“네. 다름이 아니라 그 건 때문에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뭐지.”

그렇게 그레타는 보니타에게, 보니타는 그레타에게, 그리고 여자가 보니타에게 거짓에 거짓을 고했고, 그들만의 거대한 계획은 겹겹이 쌓인 거짓 위에 뼈대를 세우고 있었다.


 

***



‘타렌 가문으로 가기로 했어요. 가문의 빚도 갚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 일기장이요. 제가 뭔가 더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릴 적 부모님과 주고받던 말들이 일종의 암호고, 그 암호가 이 일기장에 숨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런 말을 남기고 슈가가 황녀 궁을 떠난 지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여느 때와 같은 어느 날의 오후.

누군가에게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호위 말입니까?”

“그래. 이번에 노르덴 국의 외교관이 바뀌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고 단순 호위 업무니만큼 더욱 신경 쓰도록.”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타국의 대표가 제국에 머물면서 긁힌 상처라도 나면 국가 간에 얼굴을 붉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위신이 상하는 것이 문제였다.

제국의 중심부인 황실에서 타국의 인사가 해를 입는 경우는 만에 하나라도 없겠지만,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해를 입히는 경우라면 있었다.

그렇기에 타국의 주요 인사에게 붙는 제국의 기사는 명분상은 ‘호위’였지만,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감시자’에 가까웠다.

그 사실을 지시하는 황실 제3기사 단장도, 그 지시를 받는 3기사단에서도 용맹하고 실력 좋기로 손에 꼽히는 케슬란도 알고 있기에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단장실을 나선 케슬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기사단의 동료들에게 둘러싸였다.


“단장님께서 부르셨다면서?”

“그래. 무슨 일이야? 이번에도 또 어디선가에서 몰래 선행을 하고 돌아왔다던가?”

“이 자식, 실력도 좋으면서 인성까지 좋다니 용서가 안 된다니까!”

“맞아! 부단장 승격도 시간 문제라면서, 밟아! 이 자식을 못 밟게 되기 전에 당장 밟아!”

농담과 우격다짐이 오가는 가운데, 케슬란은 사람 좋은 얼굴로 하하, 웃으며 동료들의 말이나 주먹을 받아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다 운이 좋아서 그런 거라니까.”

“그게 다 운이라면 내 운은 얼마나 지독한 거냐.”

“이 자식은 겸손을 떨어도 이상하게 떤다니까.”

케슬란의 말을 단순한 겸양으로 치부한 동료들은 그를 툭툭 쳐댔고, 케슬란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진짜 무슨 일이냐?”

“아, 당분간 자리를 비울 거야.”

“뭐? 어디로 가기에?”

숨길 일도 아니었기에 케슬란은 순순히 답했다.


“노르덴 국의 새로운 외교관의 호위.”

“아, 따분한 자리네.”

“그러게, 심심하겠어.”

각자의 감상을 떠들어대던 동료들은 이윽고 각자의 일을 하러 돌아갔고, 케슬란도 간단히 짐을 챙겨 황궁 한쪽에 위치한 타국의 외교관들이 묵는 궁으로 향했다.

-똑똑.

궁의 사용인에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문에 노크한 그는 곧바로 떨어지는 허락에 문고리를 잡았다.


“들어와요.”

소리 없이 열린 문으로 절도 있게 한 발 내디딘 케슬란은 잠시 멈칫했다.

고여 있던 방 안의 눅눅한 공기가 그의 뺨을 훑고 지난 탓인지, 뭔가…….


“황실에서 보내주신다던 호위가 경인가요?”

하지만 그가 느낀 섬찟한 감각은 안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휘발되어 사라졌다.


 
케슬란은 정중하게 기사의 예를 취하며 답했다.


“인사드립니다…….”

그는 한껏 풀어진 채 동료들과 어울리던 때와는 달리 황실 기사라는 직함에 걸맞는 표정과 태도로 노르덴 국의 새로운 외교관을 대했다.


“……하여 앞으로 제국에 머무시는 동안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편하게 케슬란이라 불러주십시오.”

그가 입을 다물자 노르덴 국의 외교관, 주홍빛 머리가 인상에 남는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케슬란 경.”

제국, 그것도 황실의 기사라고 해서 딱히 굽실거리거나 잘 보이려 하지 않는 담백한 답을 한 그녀는 곧 손을 휘저었다.


“미안하지만, 제가 좀 피곤해서요. 혼자 있고 싶으니 자리를 비워주시겠어요?”

“바로 문밖에 있겠습니다.”

그녀의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에 케슬란은 고지식하게 호위 대상 곁에 꼭 붙어 있아야 한다는 둥, 절대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둥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제국의 황궁에서 타국의 요인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과, 설혹 사건이 터지더라도 문밖에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그의 태도를 노르덴 국에서 온 새로운 외교관, 그레타도 충분히 알아차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볼셰이크 제국.

하나하나 거슬리지 않는 것들이 없어.

하긴, 제국의 꼭대기에 있는 황녀가 그토록 거슬리는데 그 아랫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레타의 흐릿해진 초점에서 검붉은 불길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현재가 아닌 바라 마지않는 미래를 보는 그 눈동자 속에서 제국은 고대신의 뜻대로, 그녀 자신의 바람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대륙을 정화하기 위해 가장 큰 제물이자 먹잇감이 될 제국.

불타오르고 신음하다 결국 단말마를 내지르는 제국의 미래를 그리는 그레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오르다 곧 사라졌다.

긴 한숨을 내쉰 그레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우직하게 서 있던 기사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호위라고 하지만 보니타의 말에 의하면 제국의 감시자라고 했었지.


“흐응.”

짧은 콧소리를 낸 그레타의 눈이 번들거렸다.

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귀찮은 눈을 달고 다닐 수는 없다.

그러니 저 기사를 인형으로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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