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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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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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잖아.
2022.06.20.
올리비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와 슈가가 나란히 부정했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저것만 보면 둘이 아주 척척 잘 맞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번갈아 보는 올리비아의 눈을 한 손으로 가려버린 크라이어가 거의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그만 생각해라.”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보면 다 아니까 그만해.”
작게 투덜거리던 올리비아는 곧 입을 다물었고, 제 눈을 가린 크라이어의 손마디를 당겼다.
간질거리는 감촉을 견디지 못한 크라이어가 손을 거두자 올리비아는 저와 그를 미묘한 눈으로 번갈아 보는 슈가를 향해 손짓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그런 사이 아니야.”
하지만 슈가는 눈을 반쯤 내리감은 크라이어의 발치에서 술렁거리는 공기를 살피다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사이 맞는 거 같은데요. 완전히 그런 사이 같아요.
물론 저를 향해 손을 휙휙 내젓는 황녀의 말을 대놓고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아이는 영리한 침묵을 택했다.
전혀 믿지 않는 듯한 슈가의 기색을 알아차렸지만, 올리비아는 굳이 절대 네가 생각하는 후궁이니 뭐니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며 다시 부정하는 대신 원래 했어야 할 질문을 했다.
“다른 것이 느껴지다니, 무슨 의미지?”
“이거요. 없는 사람과는 달리 기사님에게는 뭔가 이질감? 동질감? 같은 게 느껴져요.”
“이질감과 동질감은 완벽한 반대 의미일 텐데.”
“네. 그렇지만, 그렇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음, 보통 사람과는 다른 느낌이 들지만, 저에게는 친근한?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슈가가 제 갈비뼈 아래 위치한 낙인을 쿡 찌르며 설명을 덧붙이자 올리비아는 잠시 아이를 응시하다 물었다.
“그렇다면 낙인이 있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겠니?”
“아, 그…… 그냥 느낌일 뿐이라서.”
좀 전 보다 더 자신이 없는지 소리가 작아지긴 했지만, 슈가는 작은 가슴을 펴고 말을 이었다.
“기사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다면 확실해질 거 같아요.”
“아니, 그러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리 말한 올리비아가 크라이어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입을 벌리려다 그대로 다물어 버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크라이어는 물론이고 슈가 그리고 앙브흐와 어느새 나타난 건지 아이작까지 올리비아의 닫힌 입술만 바라보았다.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올리비아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크라이어가 입을 열려는 데,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안…… 되겠네. 응. 안 되겠어. 그 방법은 안 되겠어.”
“저어, 전하. 무슨 방법이기에.”
호기심을 참지 못한 앙브흐가 이번에도 손을 번쩍 들며 묻자 올리비아는 연신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크라이어를 변장시켜서 다른 이들과 섞어 놓으려고 했지. 그런데도 슈가가 찾을 수 있다면 낙인을 지닌 이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잖아. 그런데 무리야.”
“무리요?”
이번에는 아이작이 되물었고 이어지는 올리비아의 답에 크라이어를 제외한 세 사람이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 눈에 띄어. 뭘 어떻게 변장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
그녀의 말은 일부분만 정확했다.
크라이어는 확실하게 눈에 띄는 사람이었고, 어딜 가건 시선을 집중시키는 부류였으니까.
하지만 변장한다면 얼마든지 눈에 띄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올리비아와 크라이어 두 사람이 변복을 하고 황궁을 나설때도 그는 변장을 했고,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기는 해도 지금처럼 시선을 사로잡거나, 한눈에 그라고 알아보지는 못했지 않나.
분명 황궁 밖으로 여러 번 그와 함께했는데도 올리비아는 그 사실을 새카맣게 잊은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까지 반복했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던져놔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 안돼, 안돼. 변장 가지고 이 방법은 못 쓰겠어.”
쓸 수 있습니다. 잘 쓸 수 있어요.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단지 황녀 전하께만 안 좋은 방법일 뿐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사람 사이에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런 말이 세 사람의 혀끝까지 밀려 나왔지만, 그 앙브흐조차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안으로 꿀꺽 삼켰다.
올리비아의 뒤쪽에서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크라이어가 쏘아내는 압박감에 입이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생각을 떠올린 크라이어는 그들을 입단속 시켰다.
지금 제3자의 입에서 사랑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볼 것도 없이 올리비아는 부정하리라.
부정만 하겠는가, 전력을 다해 도망가려 들겠지.
그러니 그녀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를 노려야만 할 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입 다물어.
듣지 않아도 귓가로 흘러드는 그 스산하고 낮은 목소리에 세 사람의 목을 타고 동시에 마른 침이 넘어갔다.
당연히 올리비아도 눈치를 수프에 말아 먹지는 않았기에 세 사람의 표정이 기묘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뭐야? 이 방법 애초부터 별로였어?”
물론 그 이상한 표정을 받아들이는 방향이 정답과는 매우 큰 괴리가 있었지만.
“그러네요. 그 방법은 처음부터 좀.”
“하하, 그렇죠. 어디서든 지나치게 눈에 띄시니까.”
앙브흐와 아이작이 어색하게 한마디씩 꺼냈고, 슈가는 전처럼 아예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이윽고 고개를 휙휙 저은 올리비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건 방법을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하지. 혹시 좋은 방법이 떠오르면.”
“말씀드릴게요.”
“당연히 보고 드려야지요.”
“최선을 다해 생각해볼게요.”
앙브흐와 아이작 그리고 슈가의 답을 들은 올리비아는 그대로 문고리를 돌려 방을 나섰고, 당연히 크라이어도 그녀와 함께 사라졌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선 후 남은 세 사람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뜨린 건 의외로 슈가였다.
“제가 바깥 소식에 어두워서 그런데, 혹시 황녀 전하께서 약혼하셨나요?”
그 질문에 앙브흐와 아이작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똑같은 답을 했다.
“아니. 아직.”
“그렇지. 아직.”
슈가 역시 그 답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직이군요. 역시 저 두 분은 역시 연인 관계이신 거죠?”
“그렇지.”
“아무래도.”
거의 확신에 찬 아이의 질문에 아이작과 앙브흐는 이번에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께서는 계속 아니라고 하시던데.”
“맞아. 전하께서는 절대 아니라고 하셔서 믿었지만.”
아이작의 말꼬리를 이은 앙브흐는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물구나무 서기를 하면서 봐도 연인 사이잖아?”
크라이어가 올리비아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사람들이 떠들어대던 소문.
황녀의 남자.
아이작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보탰다.
“네 눈동자 색이 주인님과 똑같아서 혹시 숨겨둔 아이라도 있느냐고 했다가, 그날 세상을 떠날 뻔했지.”
그 말에 앙브흐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머나, 그걸 정말로 말했어요?”
“먼저 말을 꺼내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다니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아이작이 답하자 앙브흐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이참, 말이 그렇다는 거죠.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보라고 한건 당신이잖아요. 그렇다고 전하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용케 목이 붙어 있네요.”
“죽을 뻔했단 말입…….”
갑작스럽게 둘만 아는 이야기로 아웅다웅거리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슈가는 아이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도 둘만 모르는 연인이었구나.”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를 본 감상이 진하게 묻어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슈가는 이제는 거의 코를 맞댈 기세로 가까이서 왁왁 거리는 두 사람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
보니타는 거울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황녀와 신의 종복.
두 사람의 방문으로 알게 된 사실을 과연 그레타에게 전해야 할까.
황녀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알게된 것이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다.
일단 자신이 고대신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떠보는 듯한 황녀는 딱히 거부감이나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타가 확신을 주듯이 답을 했을 때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물론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가면 같은 웃음을 짓는 것이 일상인 황녀지만…….
“신의 종복을 곁에서 떼어놓으려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 역시 신을 섬기는 건가.”
단숨에 쭉 가지를 뻗은 의식이 닿은 결론에 보니타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확신할 수는 없다.
황녀가 그저 사랑에 눈이 멀어 신의 종복을 놓지 못할 뿐, 고대신께서 바라는 게 뭔지, 그러니까 정화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테니까.
황녀는 볼셰이크가 아닌가.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어도 제국을 모조리 불태우고, 그녀 역시 죽어야만 하는 미래를 알면서도 신의 종복을 끼고 돌지는 않으리라.
“사랑에 눈이 멀었다……라.”
가면 같이 무표정했던 보니타의 얼굴에 얼핏 씁쓸함이 스쳐 지났지만, 그녀가 과거를 떠올린 건 아주 찰나였을 뿐.
“이건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어.”
보니타는 황녀의 방문을 그레타에게 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신의 종복은 비단 황녀만이 아니라 그레타의 심장도 가져갔기 때문이다.
과거의 어느 날 그레타는 꿈꾸는 듯한 눈으로 단 한 번뿐이지만, 보니타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나와 함께 할 유일한 남자야.’
늘 뱀의 비늘 같이 번들거리던 눈이 그때만큼은 다른 색을 띠고 있었기에 그레타는 그때를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레타가 황녀의 이야기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이유가 이런 것이었나.
비단 고대신의 뜻을 행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볼셰이크의 핏줄이기에 그토록 경계하는 게 아니었군.
그레타의 명대로 신의 종복을 노르덴 국으로 돌려보내려던 시도가 물거품이 된 후, 그레타는 신의 종복에게 어떤 뜻이 있겠거니 그냥 놔두라고 했지만…….
자신이 봤던 두 사람을 보고서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구태여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랑이란 그 깊이나 크기만큼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드니까.
어차피 그레타가 제국에 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을 지금부터 알려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