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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왜? (83/146)


#83. 왜?
2022.06.16.


확신의 확신을 갖고 눈을 반짝거리는 앙브흐를 보던 올리비아는 난처했다.

그래. 정말로 난처했다.

차라리 앙브흐가 차기 황제라는 자신의 권위와 권력에 아부하는 거였더라면, 가문을 위해 헌신하는 거였더라면 이야기가 통했을지도 모른다.

구슬리건, 협박하건 무슨 수라도 냈겠지.

하나, 앙브흐는 진심으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자신에게 목숨을 내맡기려 하고 있었다.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보따리는 물론이고 자신까지 전부 주겠다고 덤비는 경우라니.

아이작과 앙브흐는 다르다.

아이작에게는 비교적 흔쾌히 모든 것을 알려 주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올리비아는 문득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다른가?

제국의 거대한 기둥 중의 하나인 타렌가의 한 명뿐인 후계자와, 타국 출신에 신원조차 불분명한 자의 위치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미래에 일어날 최악의 재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어차피 고대신을 막지 못하면, 아니 그 신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들을 치워버리지 못하면 대륙은 끝이다.

최악의 결말은 전과 같이 온 대륙이 ‘정화’ 되는 거겠지.

앙브흐 역시 그 마지막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터.

그러니 세계 평화를 위해, 저토록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그녀에게 구태여 진실을 꼭꼭 숨길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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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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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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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 간단하게 답할 문제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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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위험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을 거잖아요!”

믿고 있다는 진심만이 듬뿍 담긴 앙브흐와 눈을 마주한 올리비아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지난 네 번의 생에서 단 한 번도 엮인 적 없었건만, 이런 성격일 줄이야.

하긴, 선의로 행한 일이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는데도, 여전히 어려운 이들을 보면 거침없이 손을 내미는 강단의 소유자다.

순진하고 해맑은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누구보다도 단단한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타렌가의 후계자.

어쩌면 고대신과 맞서길 결정한 이들 중 가장 흔들림 없이 목표를 향해 돌진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이리라.

아니, 다른 무엇보다도 저를 모시겠다는 이가 자신을 저토록 굳게 믿고 있다면, 응당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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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아. 영애가 위험에 빠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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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제 말이 맞다며 가슴을 한껏 내미는 어린아이 같은 앙브흐를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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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알려줄게. 대적하려는 신부터 시작해서 전부.”

슈가는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것이라고 짐작하며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일단 원하면 모조리 알려주겠다는 답을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건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의 기색을 눈치챈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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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문과 그 낙인에 관계된 이야기이기도 해. 너야말로 당사자라고 할 수 있지.”

그 말 한마디에 슈가는 제 낙인을 꾹 누르며 아랫입술을 꾹 물다가 멈칫했다.

낯설지만 따뜻하고 보드라운 앙브흐의 손이 자신의 손을 꼭 잡았기 때문이다.

오늘 처음 본 이의 온기인데도 어쩐지 속이 간질거려서 슈가는 꼬물거리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귀여운 애들이 귀여운 짓을 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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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고대신이라는 건 들어봤겠지…….”

그렇게 올리비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앙브흐뿐만이 아니라 슈가도 잔뜩 긴장한 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바짝 세우고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앙브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더니 끝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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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전하께서 주…… 죽음을 몇 번을 경험하신 ……으, 으흑……. 그 힘들고 아……픈, 으, 으어어엉.”

아이작의 예언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대로 눈물을 펑펑 흘리는 앙브흐를 앞에 둔 올리비아는 아까보다 더욱 난처해졌다.

정말로 우는 사람을 달래는 재주는 없는데.

그녀가 어찌할지 고민하는 사이 앙브흐는 애써 참는 듯 끅끅거리면서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고, 투명한 눈물이 그녀의 발치로 떨어져 내리는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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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불쑥 나타난 아이작이 여우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앙브흐에게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앙브흐 역시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의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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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우십시오. 황녀 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소문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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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슨 일이 있었잖…… 흐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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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그렇게 울다가는 눈가가 다 짓무를 겁니다.”

처음에는 걱정이 아닌 척 툭툭 말을 내뱉던 아이작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앙브흐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어디서 난 건지 손수건을 두 장 더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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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저 둘은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야.

그러고 보니 슈가도 함께 찾아냈다고 했던가.

아이작이 타렌가로 간 경위야, 실종된 사용인이 황녀궁에서 죽은 여자와 관련이 있으니 찾아간 거겠지만.

앙브흐가 선의로 도와주겠다고 나서도 아이작이라면 칼같이 거절할 줄 알았는데.

심지어 지금은…….

전혀 그런 일을 할 것 같지 않은 아이작이 엉엉 우는 앙브흐를 달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몽실몽실하고, 두 사람을 보고만 있어도 눈이 막 간지러운 이 느낌.

왜 보는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야만 하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살피던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뭔가 깨달았다는 듯 입도 동그랗게 벌린 건 단 몇 초 후였다.

저 말랑말랑한 묘한 분위기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서로를 마음에 둔 연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던 거였잖아?

뭐야, 그런 거였어?

그야말로 단 몇 초만에 아이작과 앙브흐 둘 다 아직 깨닫지 못한,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호감을 잡아낸 올리비아의 표정이 미적지근해졌다.

세상에서 제일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으로 꼽으라면 바로 남의 가정사와 남의 연애사가 아니겠는가.

방금 전까지 대륙 멸망이니, 죽음과 반복되는 회귀 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니던 방 안은 어느새 저희들만 모르는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이 만들어내는 몽글몽글한 공기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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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괜한 걸 알아차렸다며 짧게 혀를 차는 올리비아를 여느 때처럼 바라보던 크라이어의 미간에 희미한 금이 갔다.

그녀에게 말했던 대로 늘 그녀를 보고 있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주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타인의 남녀 관계는 저렇게나 빠르고 간단하게 깨달으면서, 왜 전작 본인이 얽혀 있으면 감을 전혀 못 잡는 건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흐르려는 생각 자체를 막고 있는 건가.

저런 관계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곳에서 기가 막히게 눈치가 빠르면서 유독 한 부분에서만 눈치가 증발한다면, 본인 스스로가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거겠지.

크라이어는 짧게 혀를 차면서 입술 사이로 살짝 빠져나온 작은 혀를 보면서 갈증이 이는 마른 입술을 느긋하게 쓸었다.

그 밤이 지난 후, 다행히 올리비아는 저를 피하지도 멀리하지도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그때의 일을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린 듯 행동했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혹은 정말로 술에 취해 그 순간을 잊은 건지.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낀 크라이어는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뜨거운 숨을 삼켰다.

한 번 더 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거의 한입에 넣고 삼킬 기세로 그녀를 바라보던 크라이어의 시선을 올리비아가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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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를 향해 시선을 휙 돌린 올리비아의 물음에 크라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는 언제 욕망으로 일렁거렸냐는 듯 깊이 가라앉아 있을 뿐.

제 욕망을 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은 그는 다음을 기약했다.

올리비아는 한 입에 삼키고 싶다고 낼름 삼킬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자신은 노예 계약에 묶여 있는 신세가 아닌가.

황녀라는 그녀의 신분을 의식해 본 적은 없고, 의식하고 있지도 않지만 적어도 이 빌어먹을 굴레에서는 벗어난 후에 고하고 싶었다.

내가 네 곁에 있고 싶다고.

네가 내 곁에 있어 달라고.

잠시 품에 들였던, 아주 찰나 깊이 들이마셨던 그녀의 숨결을 더듬으며 크라이어는 눈동자 뒤로 제 욕심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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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크흥.”

코를 먹는 듯한 앙브흐의 소리와 함께 올리비아가 손뼉을 쳐서 시선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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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해두도록 하지. 아무래도 들은 이야기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리 말한 올리비아는 슈가를 향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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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듯이 시간은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으니, 네가 정말로 원하는 곳에 머물도록 해. 그 이후의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고.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할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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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마치 자신의 고민을 읽은 듯한 올리비아의 말에 슈가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앙브흐의 손이 떨어져 나간 빈손을 꼼지락거리던 슈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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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 전하.”

방을 나서려는 올리비아를 잡은 건 슈가였다.

아이는 제가 불러 세워놓고도 머뭇거리기만 했고, 올리비아는 그런 아이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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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말해 봐.”

그에 슈가는 입을 열었지만 영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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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님을 다시 뵈어도 괜찮을…… 흐악!”

슈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의 시야 사각에 있던 크라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쿵쿵 거리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듯 했지만, 슈가는 크라이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크라이어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지만, 슈가는 목덜미가 근질거리는 강렬한 느낌에 기어코 내뱉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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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말을 토해낸 후에 제 눈치를 보는 아이를 향해 크라이어는 덤덤하게 눈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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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으니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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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님께 뭐, 뭔가 다른 게 느껴져요.”

하지만 아이의 말이 떨어지자 사위에는 무덤같은 적막이 내렸다.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올리비아가 일단 침착하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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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줄의 끌림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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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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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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