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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우리 같이 살죠! (82/146)


#82. 우리 같이 살죠!
2022.06.13.


이전까지는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갔다.

뚜렷한 목적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것을 소망할 수가 없었다.

숨어야만 했으니까. 무엇인지도 모를 것에서부터 숨어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유언만이 살아가는 목표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아닐 수밖에 없다.

이젠 아이를 지켜줄 누구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리고 슈가 역시 더는 숨고 싶지 않았다.

신이라니. 그런 존재에게서 숨을 수 있을까?

자신뿐만이 아니라 선대에도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최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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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제물을 바쳤다면 우리 가문이 이렇게 형편없이 무너지진 않았을 거라고! 당대에 한 명! 딱 한 명을 바치면 지금쯤 제국의 이름은 볼셰이크가 아니라 르위르가 되었을 텐데!’

 
분명 그렇게 듣긴 했다. 제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았다는 건 결국 신의 눈을 피했다는 거겠지.

그런데…… 그래서?

슈가는 평생 낙인을 숨기고 여장을 하면서 언제 닥쳐올지 모를 신의 눈을 무서워해 벌벌 떨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그것 하니만큼은 확실했다.

문제라면 그것만 확실하다는 걸까.

영민한 아이는 제 처리를 아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심지어 평범하게 살 수조차 없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자제.

그러고 보니 자신의 가문이 타렌 가문에 큰 빚을 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타렌저의 사용인으로 일해야 한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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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렌 가문에 사용인으로 받아달라고 하면…….”

딱히 다른 길이 생각나지 않아, 아이의 형이 그토록 진저리치던 자리에 들어가려고 중얼거리던 슈가의 귀가 쫑긋거렸다.

이제껏 쥐 죽은 듯 고요하던 밖이 뭔가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별안간 다시 고요해졌기 때문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박이던 슈가가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서려는데.

-똑똑, 똑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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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들어오세요.”

성마르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슈가는 엉겁결에 허락을 내뱉고 제풀에 놀라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떨어진 허락에 지체 없이 문이 열리고 분홍빛 머리통이 불쑥 나타났다.

슈가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문을 멀거니 보는 사이, 분홍 머리 뒤로 태어날 때부터 동화책이나 이야기로 들어온 대단히 익숙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절대 익숙하지 않은 불처럼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올리비아가 들어섰다.

붉은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본 순간부터 바싹 얼어붙은 슈가는 다급하게 허리를 푹 숙이려다,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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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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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한 예법이구나. 하지만 새삼스럽게 무얼, 고개 들어.”

가벼운 칭찬 뒤에 따라온 누가 들어도 꽤나 친근하게 들리는 말에 슈가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숨기려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런 아이의 기색을 알아차린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농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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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범에게 그런 예를 취할 필요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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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합니다.”

하지만 그런 농담도 슈가에게는 아직 버거웠던지 순식간에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럴 필요 없다고, 단순한 우스갯소리였다고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줄 수도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약한 한숨을 삼켰을 뿐.

지금 저 아이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건 지금과 비슷한 반응이겠지.

어려운 사람이 ‘나 어려운 사람 아니야.’라고 말한다고 해서 갑자기 쉬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크라이어와 함께 있다 보니 많이 무뎌지긴 했지만, 자신은 엄연히 제국의 차기 황제다.

편히 대하라 해서 정말로 편히 대할 수 있는 건 아마 크라이어뿐이리라.

뭐…… 첫 만남에서 자기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황녀를 어렵게 대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네.

어느 순간부터 ‘크라이어’를 떠올리는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간 올리비아를 현실로 잡아끈 건 앙브흐였다.

그녀는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안절부절못하더니 슈가를 보고 또 보고 저러다 뚫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올리비아가 잠시 입을 다물자, 조급함을 이기지 못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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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제 소개를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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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 물론이지. 이 쪽은 들었던 대로 슈가 르위르. 르위르 가문의 유일한 핏줄.”

담담한 그 말에 슈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유일한 핏줄’이라면 그와 피를 나누었지만, 천륜을 저버린 남자는 이미…….

아이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푸르게 변하기 직전, 올리비아가 한발 옆으로 물러나며 앙브흐를 향해 눈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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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쪽은 타렌가의 영애.”

그녀가 입을 다물기 무섭게 앙브흐가 슈가를 향해 훌쩍 다가서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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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위르 가문의 슈가라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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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슈가 르위르입니다.”

반짝거리는 앙브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슈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지만, 성실히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슈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이제껏 했던 고민과 갑작스러운 황녀의 방문으로 인한 부담과 압박감이 모조리 증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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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흐음. 좋아요! 우리 같이 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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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위풍당당한 앙브흐의 외침에 슈가는 멍한 얼굴을 한 채 가까스로 되물었고, 올리비아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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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청혼으로 들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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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이렇게 어린 영식을 데리고 살고 싶은 마음은 아직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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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영애의 미래 계획은 잠시 제쳐두고, 슈가 르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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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황녀 전하.”

얼이 빠진 슈가에게 올리비아는 이 방에 오기 전, 그러니까 앙브흐가 냅다 저런 말을 던지기 전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앙브흐가 거의 뛰듯이 슈가가 머문다는 방으로 향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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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희 가문에서 실종된 사용인이 반역이요?’

 
실종되었던 사용인이 난데없이 반역죄를 지어 최고형을 받을 거라는 소식에 앙브흐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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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전하께 그런 못된 마음을 품다니! 아! 전하 저희 가문에서는 절대 그런 무엄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저는 어디까지나 전하께 충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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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으니 거기까지만 해.’

 
앙브흐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화를 내다가, 별안간 자신의 충성심이 얼마나 큰지 열을 올렸고,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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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 알아주신다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저어, 그러면.’

 
환하게 웃던 앙브흐가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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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이는요? 뭔가 숨기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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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아이 말인데.’

 
그간 있었던 일을 상당히 압축하고 요약해서 들려준 올리비아가 입을 다물기 무섭게 앙브흐가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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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 쓰레기가! 아니, 이게 아니라. 그러면 제가 아이를 데리고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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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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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전하께서 아이를 계속 궁에 두지 않으시는 이유가 있는 거죠?’

 
낙인에 관한 이야기는 모조리 빼버리고, 단순히 아이의 형이 쓰레기 짓을 했다는 것만 전했는데도 앙브흐는 올리비아가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정확히 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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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기사님의 딸, 아니 남자애라고 했으니 아들은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렇게 오해 받을까 봐 걱정해서 아이를 궁에 두길 꺼리시는 것도 아닌 거 알고요.’

 
물 흐르듯 덧붙인 앙브흐가 해맑은 얼굴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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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제게 맡겨주세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황녀 전하께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쓰레기 같은 놈과 이별한 아이에게도요!’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올리비아가 천천히 몸을 굽혀 슈가와 시선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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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렌 영애의 의견은 그렇지만, 시간은 얼마든지 들여도 상관없으니, 네 답을 듣고 싶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결정할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어. 우선 한 가지만.”

거센 바람을 맞은 조각배처럼 흔들리던 검붉은 눈동자는 잔물결 하나 없이 고요한 푸른 바다와 같은 눈동자에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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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머물던 집으로 보내 줄 수도 있고, 타렌가로 갈 수도 있어.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궁에서 머물러도 상관없어.”

잠시 말을 끊은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에게 흘긋 시선을 주다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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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궁에 두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야. 네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아서.”

더 많은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슈가는 어렴풋이 그 ‘위험’이 자신과 같은 낙인을 가진 저 무시무시한 기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올리비아는 느리게 눈을 깜박거리는 슈가를 보면서 쓴 웃음을 삼켰다.

르위르 가문의 어느 미친놈과 고대신의 거래의 대가로 지정된 아이.

이 아이의 존재를 그레타가 아직은 알지 못하지만, 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필연적으로 슈가의 존재가 그녀의 귀에 들어가게 되겠지.

크라이어와 같은 눈동자 색을 가진 아이.

과연 그레타가 가만히 놓아두려 할까?

만약 아이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겠지.

어느 쪽이 건 그레타가 아이의 인생에 발을 들이는 순간, 슈가의 삶은 진흙탕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이미 낙인이 찍혀 버렸으니,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레타따위에게 착취 당하게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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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래서 너는 어디에 머무르고 싶니?”

올리비아의 질문에 슈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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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과 낙인, 대가나 거래에 관해서 알고 싶다면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당돌하게 되묻는 슈가를 향해 올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선선히 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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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건 상관없어. 네가 알고 싶다면 전부 알려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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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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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영애?”

슈가의 곁에서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을 봐달라며 온몸으로 표현하는 앙브흐를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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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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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는 지금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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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건 황녀 전하께서 나쁜 신에게 맞서 싸우고 계신다는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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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면 충분해.”

올리비아는 그렇게 잘라내려 했지만, 언제나 순순히 그녀의 말을 들었던 앙브흐는 물러나지 않았다.

앙브흐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푸른 피가 흐르는 귀족다운 표정으로 한차례 무릎을 굽혔다 편 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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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 구명 받은 목숨이에요. 그러니 전하를 위해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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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아도 돼.”

누가 들어도 단호한 거부였지만, 그 정도로 물러날 앙브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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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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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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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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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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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게요! 쓰게 해주세요! 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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