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너를 만나서 나는 달라졌다. (78/146)


#78. 너를 만나서 나는 달라졌다.
2022.05.30.


집무실로 돌아온 올리비아와 크라이어 사이에는 침묵이 내렸다.

각자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올리비아는 슈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가지 방안을 꼽아보았고, 크라이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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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었다고 했지.”

문득 터져 나온 앞뒤 없는 크라이어의 말에도 올리비아는 그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쇄골 부근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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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그놈에게 낙인이 있었지만, 슈가가 태어나면서 바뀌었다고.”

아래로, 더 아래로 침잠하는 검붉은 눈을 마주한 올리비아는 지체없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발에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까치발을 들어 퍼런 핏줄이 돋은 그의 손등에 제 손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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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낙인이 형에게서 동생으로 옮겨갔다고 했지.”

올리비아는 그리 말하면서 힘주지 않고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힘이 탁 풀려버린 그의 손은 그 온기를 따라 순순히 아래로 내려오다, 곧 제 손으로 온기를 움켜쥐었다.

한동안 그녀의 손을 잡고만 있던 크라이어의 주변에서 시퍼렇게 날이 서 있던 공기가 누그러지자, 올리비아는 손을 빼내어 제 관자놀이를 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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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인 문제도 있지만, 더 의문스러운 점이 있어.”

아랫입술을 혀로 살짝 핥은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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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위르 가문은 고대신과 ‘거래’를 했잖아. 그렇다면 마법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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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마법사는 어떤 식으로 고대신과 얽혀 있는지 알아봐야 하겠군.”

척하면 척이라고. 한마디로 제 의도를 파악한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는 쉴 틈 없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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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마법사나 그 딸이나 이제까지는 그 고대신을 떠받드는 ‘사제’라고 여겼잖아. 그런데 만약 아니라면? 그것들도 그저 ‘거래’를 한 거라면?”

그녀는 몇 번이고 홀로 거래를 반복하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거나, 머리를 끊임없이 까딱거렸다.

지금 잡은 단서로 크라이어의 낙인을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낙인, 고대신, 거래, 노예, 마법사, 대체제, 대가 등등.

올리비아의 머릿속에 특정 단어들이 휘몰아치다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느낌에 암레스트를 신경질적으로 툭툭 두드린 올리비아는 크라이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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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란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하잖아. 그렇다면 마법사와 거래한 고대신이 받을 대가는 ‘세계의 정화’라는 개짓거리인 걸까? 그렇다면 마법사가 받은 대가는? 아니, 애초에 마법사는 죽었잖아? 그렇다면 고대신의 거래 상대는 마법사가 아니라 마법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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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정신없이, 아니 정신이 나간 것처럼 쉬지 않고 중얼거리던 올리비아의 입이 크라이어의 손에 막혔다.

미지근한 숨결을 막은 거칠고 마른 그의 손이 이윽고 느릿하게 그녀의 입술을 쓸어내리며 턱 부근을 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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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부터 쉬어.”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켠 올리비아는 곧이어 들이킨 만큼 내뱉으며 허탈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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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무 초조해.”

부지불식간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진심에 크라이어는 말없이 다시 손을 뻗었다.

끌어당기는 그의 힘에 저항하지 않고 단단한 품에 안긴 올리비아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죽이다, 고개를 숙인 채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지금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니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를 만난 이후 늘 흔들리는 건 크라이어였고, 올리비아는 그런 그를 단단하게 잡아 주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올리비아가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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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을 봤을 때, 그때 말이야. 날 향해 검을 겨눈 놈을 보고 생각했어. 또 실패했구나.”

황성이 무너지고 온 사방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던 그때.

올리비아는 이전처럼 다음을 기약하며 울분에 찬 채 이를 갈지 못하고 체념했다.

마지막에는 눈앞에 있는 놈이 크라이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환상을 깨부숴버리고 나왔지만, 그때 그 생생했던 검날의 감촉이 이 그녀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이번에도 또? 크라이어가 곁에 있는데도 또 실패하면?

그러면 다음이 있나? 다음이라는 게…… 있으면 어떻게 하지?

다음이 없다면 없는 대로 두려웠고, 있다면 있는 대로 불안했다.

그녀를 죽이고 또 죽였던 남자가 가진 굴레를 가슴을 치며 자신 있게 말한 것처럼 벗겨낼 수 있을까?

신이라는 존재를 직접 상대할 수 없으니, 마법사를 상대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결심했다.

그걸 위해 크라이어를 끌어들였지만, 지금까지 이전 생과 다른 무언가를 이루었나?

간신히 발견한 고대신의 흔적들도 전부 우연의 산물일 뿐.

심지어 그 흔적들조차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이 아닌, 그저 그런 추측들만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 않나.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고대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크라이어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으니까.

심지어 ‘신’이라니, 맞서 싸우거나 대비할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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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어.”

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에 올리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니 지독할 정도로 그 사실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기에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올리비아는 텅 빈 눈으로 텅 빈 손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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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또…… 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올리비아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하자 크라이어는 그대로 그녀를 당겨 안았다.

올리비아가 제 얼굴을 보이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녀를 돌려 뒤에서 안은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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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도 운명도 아니야. 그만큼 움직였기에 이 손으로 얻어낸 것들이지.”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손을 잡은 채 돌려 손바닥을 위로 오게 만들었다.

그는 제 손안에 쏙 들어오는, 저보다 훨씬 작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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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렌가의 여자를 구하지 않았다면, 실종된 사용인에 대해 알 수 있었을까, 아이작을 거두지 않았다면 낙인이 있는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까.”

그는 올리비아의 손바닥이 비어 보이지 않도록, 깍지를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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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네가 나를 잡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지옥의 바닥을 긁고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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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금도 당신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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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졌다. 완전히 달라졌어.”

쇄골에 박힌 낙인은 흐려지는 일 없이 선명하기만 했고,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대신의 노예였다.

그런데도 크라이어는 심장을 갈라 꺼내 보여 줄 수 있을 만큼, 아니 보여주고 싶을 만큼 진심이었다.

내가 너를 만나.

내가 네 손을 잡아.

내가 네 곁에 머물러.

내가.

아아, 그래.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저 곁에 올리비아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썩어 문드러지던 자신이 간신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부디 믿어주기를. 부디 알아주기를. 부디 이것만은 전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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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나서 나는 달라졌다.”

귓가로 스미는 진심만이 담긴 깊이 잠긴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내쉬었다.

마치 그 말이 그녀의 숨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그렇게 그 순간 둘은 서로의 숨구멍이 되었다.

올리비아는 텅 비었지만, 어쩐지 지금만큼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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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크라이어는 그녀를 제품으로 당기며 올리비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둘은 서로의 체온과 마음에 그렇게 오랫동안 기대고 있었다.

***

거취가 정해지지 않은 슈가가 침묵을 지키며 황녀궁에 머문 지 며칠이 지났다.

올리비아는 붕대가 풀린 제 발목을 이리저리 내려다보다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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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얇아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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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아서 그렇다. 얼마간 제대로 걸어 다니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녀의 발목을 잡고 복숭아뼈를 스치듯 쓸어올리는 크라이어의 손길이 간지러워 올리비아는 등을 둥글게 웅크리며 발에 힘을 줬다.

하얀 발등에 파란 핏줄이 비치는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크라이어는 곧 한 손에 다 들어오는 작은 발을 놓아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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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디로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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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했는데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았어?”

올리비아는 토끼 눈을 뜬 채 제 옷차림새를 요리조리 살폈지만, 늘 입던 그 복장 그대로였기에 옷으로 외출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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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보고 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답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그러니까, 지금 날 계속 보고 있다는 말인가? 왜? 아, 아아.

며칠 전 그의 품에 한동안 안겨 있다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때를 떠올린 올리비아가 민망한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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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괜찮아. 그때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됐었어.”

어린애도 아니고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누그러지는 순간, 슈가가 그랬던 것처럼 스륵 잠들다니.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이불을 얼마나 찼던지.

그런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이어는 한마디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금 그녀에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늘 너를 보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전해지기나 할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과의 거리가 ‘그런’ 의미로 가까워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올리비아다.

전해지면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며 도망갈 테고, 전해지지 않으면…… 한숨만 나올 테니 입을 다무는 편이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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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아무튼 오늘은 변복하고 나가는 건 아니고. 하인데르 후작저로 갈 거라 제대로 차려입고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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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살피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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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명이 아니더라도 꼭 한번 가봐야겠어.”

올리비아는 별안간 몸을 살짝 숙이더니 목소리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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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데르 후작도 고대신과 관련이 있는 게 확실해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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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굳이 목소리를 낮출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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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나도 알지만, 하인데르 후작과 고대신이라니 조합이 좀.”

잠시 말을 끊은 올리비아는 한층 더 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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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이 아니라 많이 위험한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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