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 형이 이 낙인을 가진 제물이었겠지. (77/146)


#77. 형이 이 낙인을 가진 제물이었겠지.
2022.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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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손을 휘적이며 두리번거리던 형은 겨우 방 한쪽에 덩그러니 서 있는 슈가를 발견했다.

그 순간 형의 머릿속을 지배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제물. 신과 거래한 대가.

말라붙어 허옇게 일어난 형의 입술이 쩍 벌어지면서 선홍빛 핏방울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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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 이리와!”

형은 숨이 넘어갈 듯 고함을 쳤지만, 슈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움직이지 않는 슈가를 본 형의 눈가에 핏줄이 툭툭 불거지고,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난 건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광기 어린 눈으로 슈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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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말 안 들렸어? 오라니까 왜 안 와.”

여느 때처럼 다정하지만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어투였다.

하지만 형의 얼굴에 떠오른 기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기에 슈가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덥썩.

치맛자락에 감춰진 슈가의 마른 팔을 우악스럽게 잡은 남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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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뭔가 구역질 나는 감정이 출렁거리는 형의 중얼거림이 혼잣말치고는 너무 커서 슈가의 귀에도 흘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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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잖아. 응? 오빠가 너 때문에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아?”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는 남자의 기묘할 정도로 거칠고 강한 힘에 슈가는 속절없이 질질 끌려갔다.

형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슈가를 데려가는 방향은 다름 아닌 방금 전까지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였다.

기실 그도 고대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다만 한가지 목적밖에 남지 않은 머릿속에서 낙인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생각만 강렬하게 맴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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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슈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형이 자신을 발견했을 때부터 깨달았지만, 이제까지 함께 보낸 세월과의 괴리감으로 이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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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오빠, 갑자기 왜 이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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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빠라고 할 필요 없어.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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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는 거야. 잠깐 멈춰 봐. 오빠!”

비명 같은 슈가의 부름을 무시한 형은 목적하던 것을 보기 위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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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있어. 있다고. 여기 떡하니 있잖아? 하, 하하하. 하하하하!”

갈비뼈에 선명하게 새겨진 낙인을 확인한 남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웃다가 다시 중얼거리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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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있으면 돼. 날 그따위로 취급한 걸 후회하게 해주겠어.”

엄연한 귀족 가문이었던 자신의 가문이 형편없이 몰락하여 다른 가문의 사용인으로 살고 있다는 현실에 진절머리를 내고 가슴 깊이 분노하던 그였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 유산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선조의 일기장을 보면서 어째서 거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지? 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만 했을 뿐.

그러던 어느 날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제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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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일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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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그 일만 하면 가문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도와주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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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데르의 이름을 걸고.’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르위르 가문의 재건을 꿈꾸며 한껏 가벼운 마음으로 뛰어들었던 일은 예상대로 풀리지 않았고,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그 결과…….

-으드드득.

눈을 형형하게 빛낸 형의 잇새로 소름 끼치는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슈가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본래도 그리 튼튼한 몸이 아니었는 데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집은 더욱 궁핍해졌다.

배가 고파 밤에 뒤척이면서도 밖에서 홀로 일하는 형에게 차마 손을 더 벌릴 수가 없었기에 또래보다 몸집이 훨씬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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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혀엉! 그만해! 그만하라고! 왜 이러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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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냐고? 지금이라도 널 대가로 바치면 신께서 우리 가문을 보살펴 주실 거니까!”

제 말을 싹둑 자르고 뒤집힌 목소리로 고함친 형과 눈이 마주친 슈가는 깨달았다.

형은 진심이다.

아이는 곧바로 형이 내뱉은 말들을 되새김질한 후 제 처지를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대가를 바친다. 신. 우리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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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낙인이 그런 의미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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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그래! 바로 그런 의미야! 이제껏 어리석은 조상들과 부모님은 숨기고 피하려고만 했었지만, 난 아니야! 무려 신과 한 정당한 거래를 어기니까 이런 꼴이 된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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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도…….”

슈가는 말을 잇지 못했지만, 형은 핏줄이 터져 벌겋게 된 눈을 굴리며 연신 고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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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부모님이 널 지키라고 하셨지! 그래서 이제까지 숨겨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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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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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같은 짐 덩어리를 남겨두고 속 편하게 죽어버린 분들 말이지! 네가 뭔지 제대로 알았다면, 그따위로 죽지는 않았을 텐데!”

형은 쉴 새 없이 슈가를 향해 악의와 탐욕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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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하기는! 너는 제물이야, 제물! 그렇게 태어났다고!”

그 폭언을 들으면서 슈가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울 듯이 보였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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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물로 태어났다고?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형이 이 낙인을 가진 제물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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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렇지. 나도 한때 그 낙인이 있긴 했었어. 하지만 네가 태어났잖아?”

형, 아니 남자는 뭐가 문제냐는 듯 슈가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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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물이 될 운명은 내가 아니라 너였다는 말이지!”

슈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진실을 알았으니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으니까.

기실 말을 섞는다고 말이 통하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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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제물을 바쳤다면 우리 가문이 이렇게 형편없이 무너지진 않았을 거라고! 당대에 한 명! 딱 한 명을 바치면 지금쯤 제국의 이름은 볼셰이크가 아니라 르위르가 되었을 텐데!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너를 대가로 바치겠어! 고디신이시여!”

그 순간 거멓게 죽어가던 슈가의 검붉은 눈동자가 크게 출렁거렸고, 작게 벌어져 색색거리는 숨만 내뱉던 입술 사이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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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고대신.”

아이 스스로조차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문 너머에서 비스듬히 벽에 기대있던 크라이어의 귀에는 닿고도 남을 만큼 큰 소리였다.

다음 순간. 문이 열리는지도 보지 못했건만, 바깥의 서늘한 공기가 한순간 밀려들어 슈가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기 무섭게 남자는 양쪽 어깨가 빠진 채 팔을 축 늘어뜨렸다.

-으지직.

마치 번개와 천둥처럼, 덜렁거리는 팔을 본 후에야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밀려들어 남자는 한껏 입을 벌린 채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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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 끄아아악! 으아아! 으아아아아악! 아아아악!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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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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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억!”

귀를 막으며 미간을 찌푸리는 올리비아의 한마디에 크라이어는 남자의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내려쳤고, 남자는 그대로 눈을 뒤집은 채 엎어졌다.

뒤이어 올리비아가 남자를 마치 더러운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발끝으로 툭 두드리자 크라이어가 지체없이 남자를 발로 차 방 한구석으로 보내버렸다.

이윽고 슈가를 일으켜 세우고 낙인을 가려준 올리비아가 아이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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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았지만, 슈가는 생략된 단어들을 알 수 있었다.

저기 널브러진 형이라고 부를 수 없는 짐승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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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이는 울지 않았지만, 목이 메이는지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도 올리비아는 슈가를 위로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다독이지도 않았고, 네 형이 쏟아낸 말들은 결코 진심이 아닐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슈가는 어린아이였지만, 멍청이가 아니었으니 껍데기뿐인 말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니까.

올리비아는 그저 기다렸다. 슈가가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슈가에게는 일 초가 천년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아이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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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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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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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죄로 다스려 주세요.”

슈가의 말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기울이자, 남자의 등을 무릎으로 누르고 포박하던 아이작이 여우 눈을 둥글게 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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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 제 입으로 제국이 볼셰이크가 아니라 르위르가 되었을 거라고 지껄이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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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죄로군.”

입매를 비튼 크라이어의 사나운 말에 아이작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남자의 빠진 팔을 좀 더 세게, 쥐어짜듯이 묶었다.

그 정도 고통이면 눈을 뜰만도 하건만, 크라이어가 대체 어떻게 때린 건지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거취가 지나치게 간단하고 대단히 빠르게 결정된 후, 슈가는 제 옷을 움켜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없었지만, 간헐적으로 숨을 들이켜는 불규칙한 숨소리로 아이가 애써 울음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느릿하게 잘게 떨리는 작디작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순간 아이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지만, 참으로 고집스럽게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올리비아 역시 울고 싶으면 울라거나, 쏟아내면 편해진다거나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람마다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고, 자신이 입을 떼면 자칫 울음을 강요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이 방에 슈가가 들어오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이에게 온기를 나누어주며 기다렸을 뿐.

그 사이 아이작이 남자를 들쳐멘 채 방에서 사라졌고, 크라이어는 가라앉은 눈으로 올리비아와 슈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문밖에서도 들릴 만큼 크게 패악을 부린 남자의 말을 반추하던 크라이어는 곧 눈을 깊이 감았다 떴다.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올리비아와 눈이 마주쳤고,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본 크라이어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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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진 아이의 무게에 반사적으로 짧은 신음을 내뱉은 올리비아는 갑자기 사라진 온기에 눈을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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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둘까.”

어느새 아이를 안아 든 크라이어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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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은 좀 그러니까, 다른 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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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 머무르게 할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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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글쎄.”

올리비아는 지금 당장 아이의 거취를 정하지 않았다. 더해서 묻지도 않았다.

쓰레기를 치우는 일과는 달리 아이의 미래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여도 상관없을 만큼 신중히 결정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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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는 크라이어에게 안긴 슈가의 이마께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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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쉬렴.”

그 말이 아이의 파란 머리꼭지에 내려앉는 순간, 어쩐지 슈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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