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어느 곳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76/146)
76. 어느 곳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76/146)
#76. 어느 곳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2022.05.23.
“없지 않지요.”
아이작은 눈가를 긁적이며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고요히 가라앉은 밤바다처럼 그를 응시하는 크라이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알게 되었으니까 모를 때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게다가 ‘신’이라니, 그거 진짜 ‘신’ 맞지요? 그런 것을 상대로 하는 일에 어중간하게 알고 뛰어드느니 최대한 많은 것들을 아는 편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제게도. 그리고 제게 일을 시키는 두 분께도요.”
입을 다문 아이작을 응시하던 크라이어가 그 무거운 입을 드디어 열었다.
“신이 적이라는 걸 어찌 확신하나.”
“신을 위하는 일이었다면 이렇게 조용히 비밀리에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황녀 전하께서 계시니 당연히 제국 단위로 대대적으로 제국민들을 동원해서 뭔가 했겠지요. 게다가 전하께서 세계 평화를 강력하게 주장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분이 모시는 신이라면 숨길 이유가 없지요.”
숨도 쉬지 않는 건지 줄줄 자신의 생각을 쏟아낸 아이작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노르덴 국의 그 신전은 아무리 봐도 좋은 의도를 가지고 짓는 것 같지 않아서요.”
감으로 하는 판단을 경계하는 그였지만, 갈고 닦은 감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신전 주변을 떠돌던 기묘하게 꺼림칙하던 공기와 미친 듯이 불길하다며 중얼거리던 어느 건축가의 눈에 서린 지독한 두려움까지.
“그러니까 이렇게 청합니다.”
아이작은 느릿하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가슴에 주먹을 대고 말했다.
“제게 알려주십시오. 모든 것을.”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올리비아는 저를 바라보는 크라이어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수없이 많은 말이 오갔다.
아이작은 ‘모든 것’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전해야 하는 걸까.
기실 ‘고대신’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제삼자가 들었을 때 우스갯소리 한번 거창하게 한다며 넘길 만한 것들 뿐이다.
일단 마법사의 존재가 그랬고, 더 나아가면 크라이어의 부활과 올리비아의 회귀가 그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순간.
아이작은 등줄기로 우수수 소름이 돋는 느낌과 함께 몸 전체를 짓누르는 압력에 이를 악물었다.
눈 한 번 깜박하는 사이에 아이작의 코앞에 선 크라이어가 그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네 말대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다. 아니, 어느 곳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그래도 이야기를 들을 텐가? 라는 뒷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작은 제 목을 쥐고 흔드는 크라이어의 존재감에 오히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미 드린 목숨 아닙니까. 제가 달리 또 어딜 가겠습니까?”
“믿을 수 없을 거다.”
“믿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없습니다만.”
드물게 열린 여우 눈에 넘실거리는 단단한 심지를 마주한 크라이어는 아이작과 마주한 후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노예를 섬기는 기분이 어떤지부터 물어봐야 하나.”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로 시작된 크라이어의 이야기는 고대신과 노예의 낙인, 마법사와 부활, 전쟁과 회귀, 그리고 정화를 빙자한 멸망 등. 정말로 믿을 수 없는 황당한 것들로 연결되었다.
“……해서 정확히 말하자면 신이 아니라 마법사를 상대하면 된다.”
너무나도 황당하고, 지나치게 어이없는 이야기를 더할 나위 없이 덤덤하게 마친 크라이어는 입을 다물었지만, 아이작은 입을 벌린 채 헛숨만 내쉬었다.
얼마간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천장에 새겨진 무늬를 봤다가 카펫의 섬세한 짜임을 봤다가를 반복하던 아이작이 입을 열고 처음으로 한 소리는 다름 아닌…….
“이렇게 말을 많이 하시는 건 처음 봤습니다만. 어느 정도 이상 말을 하면 안 되는 저주는 없……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근래 주인님이 꿈에 나타날까 무서워서 불면증도 생겼으니까.”
“정말로 믿는 거야?”
언제 식은땀을 흘렸냐는 듯 너스레를 떨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아이작을 본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고. 게다가 황녀 전하께서는 볼셰이크니까요.”
“뭐야, 그 이상한 믿음은.”
“하하. 저희 가문에도 볼셰이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좀 많이 아는 편이고요. 저희 가문 선조께서는 다른 세계에서 빙의한 분과 얽히셨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시간을 되돌리는 회귀도 볼셰이크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아이작은 어둠 그 자체처럼 저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크라이어를 보면서 볼을 긁적였다.
“솔직히 주인님께서 이제까지 실력을 숨기고 노르덴 국의 기사 노릇을 했다는 것보다, 부활한 고대신의 노예라는 쪽이 더 믿음이 갑니다.”
“노르덴 국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적어도 제국은 아니죠. 하다못해 제국의 기사라도 됐다면 믿었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명쾌한 감상을 내놓은 아이작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타렌 영애도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회귀와 전쟁, 노예와 낙인은 몰라.”
“그렇다면 고대신의 존재만 알고 있다는 거군요. 그 이상 알리실 의향은.”
“글쎄.”
모호한 답을 한 올리비아가 고개를 기울이자 아이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 영애라면 전부 믿고 지금보다 더 열성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 것 같습니다만. 전하께서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돌아오셨다는 걸 알면 펑펑 울지도 모릅니다.”
“우는 영애 달래는 재주는 없으니 일단 그 부분은 묻어둘까.”
꽤 심각한 얼굴로 그리 말하는 올리비아를 본 아이작이 무어라 더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구태여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영애의 이야기를 꺼내고 더 이어나갈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까.
애초에 왜 갑자기 타렌 영애를 떠올린 거지?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도 잠시. 아이작은 이내 크라이어 앞에 다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여우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노예를 모시게 된 기분은 과히 나쁘지는 않다. 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아이작은 알고 싶어하지 않았던 이야기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었다.
***
“으, 으으윽.”
타는듯한 갈증을 느낀 남자가 목을 긁는 듯한 신음을 내며 간신히 눈꺼풀을 올렸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도 간신히 몇 모금 마신 탓에 시야가 지나치게 좁고 흐려서 그는 한동안 이곳이 자신이 갇혀 있던 헛간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몇 번이고 바들바들 떨리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린 남자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순간.
“오……빠? 오빠, 내 말 들려?”
귓가로 익숙한, 오매불망 만나고 싶었던 동생의 목소리가 울렸다.
남자의 눈이 희번뜩하게 뒤집어지는 것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던 아이는 긴장으로 차가워졌는데도 땀이 흥건한 손을 치맛자락에 문질렀다.
이 자리에 서기 전까지, 아니 형이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슈가는 그저 형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사했을 뿐이었다.
아니, 이 방에 들어오기 직전에 조금 이상한 말을 듣기는 했지만…….
‘혀, 형을 찾았다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 네 형을 찾았지.’
어쩐지 미적지근한 올리비아의 반응에도 슈가는 그저 기쁘기만 했다.
세상에 단 둘 뿐인 가족이었고, 어딘가로 나갈 수 없어 집 안에만 갇혀 지내는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형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슈가는 검붉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올리비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 송구합니다만.’
‘괘념치 말고 물어보렴.’
올리비아의 허락을 받은 슈가는 목 끝까지 올라왔던 의문을 한 번에 와르륵 쏟아냈다.
‘형은 무사한가요? 다친 곳은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집으로 돌아갔…….’
‘그만. 네 형은 어디 잘리거나 부러진 곳 없이 멀쩡해. 한숨 푹 자고 있고, 집이 아니라 저 방에 있어.’
매끈하게 정돈된 손톱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슈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몇 걸음만 떼면 바로 갈 수 있는 곳에 형이 있었으니까.
아이의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모양새가 당장이라도 형에게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올리비아는 한동안 슈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작이 풀어낸 형이라는 놈이 자신을 죽이려던 뒷골목의 여자에게 지껄인 말들을 전부 들었기 때문이다.
제물. 고대신. 아직 바치지 않았다.
형이라는 놈은 분명히 르위르 가문과 고대신의 더러운 거래를 알고 있고, 슈가가 그 대가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제까지 슈가를 숨겨왔기에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애써 좋게 생각하려고 했건만.
죽음의 위기에서 튀어나오는 본심이라는게 제물을 아직 바치지 않아서…… 라니.
하지만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슈가에게 한다 해도 아이는 믿지 않겠지.
슈가를 데려온 후 르위르 가문에 대해 조사한 바로는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집 밖으로 거의 걸음하지 않았고, 부모님은 아이가 어렸을 때 사망.
그 이후로 쭉 형이 타렌 가문에서 사용인으로 일하면서 아이를 건사해왔으니 슈가 입장에서는 형이 은인이요, 의지처이리라.
그러니 너를 보호한답시고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형을 만나지 못하게 하면,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와 같은 눈동자 색인데도 전혀 다른 감정이 넘실거리는 슈가의 눈을 마주한 채 쓴웃음을 삼켰다.
똑똑한 아이이니 부디 못 들을 말을 듣기 전에 제 형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형을 보러 가고 싶은 거니.’
‘네! 형을 만나고 싶어요!’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하며 당장이라도 형이 있다는 방으로 뛰어갈 듯이 몸을 기울이는 슈가에게 올리비아는 아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속삭였다.
‘듣고 싶지 않다면 언제든 문을 박차고 나오렴. 그러지 못하겠다면 혼잣말을 해도 좋아.’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슈가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올리비아는 의문을 풀어주지 않고 덧붙였다.
‘그래, 혼잣말은 빌어먹을 고대신, 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거기까지 떠올린 슈가를 현실로 불러들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형의 목소리였다.
“슈……가? 슈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