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답이 없네, 답이 없어. (75/146)


#75. 답이 없네, 답이 없어.
2022.05.19.


죽음을 앞둔 남자는 벌벌 떨며 살려달라고 빌다가 곧 발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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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날 죽이면 신벌이 내릴 거다! 반드시 신께서 벌을 내리실 거란 말이야! 고대신께서 너를 가만두지 않으실 거다!’

 
악을 써대는 남자의 말은 일견 헛소리에 가까웠지만, 어둠에 몸담고 남의 목숨을 빨아 먹으며 살아가는 여자를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여자처럼 뒷세계에서 오랜 기간 살아남은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불운’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더러운 짓을 하면서 사는 이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그렇기에 뒷세계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만이 가진 원칙,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가 만들어낸, 불운을 부르는 ‘금기’를 어기려 들지 않았다.

여자만 해도 비가 오는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던가, 아이가 건넨 꽃은 받지 않는 등 타인이 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일들을 피하지 않나.

그리고 그런 그녀의 금기 중 하나가 바로…….

-끼기기긱.

낡고 녹슬어 귀를 긁는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뒤로 축 늘어진 인영을 본 여자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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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안 죽었네. 너 정말 질기다.”

여자의 시선 끝에 자리한 남자는 시체 같은 몰골이었지만, 시체는 아니었다.

물을 마시지 못해 허옇게 일어나고 갈라진 남자의 입술이 덜덜 떨리면서 쉬어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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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크윽. 신……께서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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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가 끝까지!”

여자는 남자를 차버리려고 다리를 들었지만, 남자를 건드리는 것조차 찜찜해 결국 더러운 바닥만 거칠게 내려쳤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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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신벌. 그래, 신벌. 저따위 소리를 하기 전에 처리해버렸어야 하는 건데.”

어차피 죽을 놈, 마지막 말이나 들어주자 했던 쓸데없는 자비가 제 발목을 잡을 줄이야.

짜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듯, 찜찜하기 그지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던 여자는 이윽고 쭈그리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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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일단 이거 마셔.”

여자는 미리 준비해온 물그릇을 손끝으로 툭툭 밀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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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을 내린다는 신이 무슨 신인지나 들어보자.”

이미 대륙 전체에서 ‘신’이나 ‘신전’은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일상을 주고받는 장소에 가까워진 지 오래였다.

그나마 신전이 ‘신’과 관련되었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신년이나 연말에 있는 제례 정도로, 그마저도 지금은 신성한 의식이라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웠고.

여자처럼 뒷세계에서 사는 놈들이 암암리에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는 신의 문양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의 위안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나.

그러니 대체 이놈이 말하는 신벌을 내린다는 신이 어떤 신인지 여자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더욱 찜찜했다.

무릇 인간이 느끼는 공포란 미지를 향한 것이 가장 크다고 하지 않았던가.

게걸스럽게 물을 마신 남자는 생선처럼 번들거리는 눈을 치뜨며 여자를 향해 어깃장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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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문의 선조께서 고대신과 거래를 했다. 그러니 내 몸에 선조의 피가 흐르는 한, 신께서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해치려고 하는 너 같은 인간들을 벌하시는 거지!”

손발이 묶여 바닥에서 버르적거리는 웃기는 꼴로 위협적인 말을 쏟아내는 남자를 내려다보던 여자가 빈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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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한가하신 신인가 보구나. 너 같은 놈도 보살피시려고 하고. 그런데 말이야.”

여자는 비소를 머금은 채 노골적으로 엉망진창인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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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보살핌이 상당히 부족했나 봐? 네 지금 꼴을 보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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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제물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

발작적으로 고함치던 남자는 제풀에 제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입을 꾹 다물어 버렸고, 여자의 얼굴은 구겨진 휴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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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젠장. 제물? 그딴 것도 있었어? 아, 진심으로 찜찜한 놈이었잖아?”

남자는 꿀이라도 먹은 듯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 때문에 남자가 내뱉은 ‘제물’이라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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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정말 처리해버려야 할 놈이네.”

여자는 제물이니 신이니 하는 것을 더 묻지 않았다. 깊이 파고들어서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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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생돈만 나가게 생겼네.”

여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남자의 처리를 맡기기로 결정한 후,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틀거리는 남자를 뒤로한 채 여자는 침을 탁 뱉은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이.

경첩이 밀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다시 정신을 잃은 남자 앞에 선 인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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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니 뭐니, 이건 대체 무슨 소리야. 듣고 싶지 않은 걸 들어버렸네.”

아이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여우 눈을 한껏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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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의 형을 찾아와.’

 
그 명령을 받고 몇 시간 후, 그 형이라는 놈을 찾게 된 건 누가 봐도 아주 좋은 일이었다.

심지어 겸사겸사 살펴보라던 하인데르 후작저에 들른 김에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하인데르 후작이 한 짓을 이놈의 입에서 들을 가능성도 아주 높았고.

하지만 아이작은 이번에야말로 일을 제대로 했다고 안심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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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위한…….’

 
하인데르 후작저를 떠나기 직전 보니타 하인데르 후작이 중얼거린 말부터 눈앞에 있는 놈이 지껄인 이야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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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설마 우리 주인님하고 황녀 전하까지 얽혀 있는 건가? 아니, 얽혀 있으니까 알아 오라고 시켰겠지……. 전에 대충 고대신이니 뭐니 하는 걸 듣기도 했고…….”

아이작은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했다.

애초에 크라이어를 모시기로 결정했을 때도 주변에서 쑥덕대는 소문이 아니라 자신의 안목만을 믿었던 그다.

하지만 그의 안목은 어디까지나 크라이어가 절대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는 것에 국한되어 있을 뿐.

아이작은 진심으로 크라이어나 황녀의 관계, 혹은 크라이어가 하는 일이나 그의 이야기 같은 건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살아남으려면 자기 깜냥을 잘 알고, 그 이상의 일이라면 관심을 두기는커녕 보거나 듣지도 말아야 하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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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들어버렸으니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는 글렀네.”

물론 오늘 들은 이야기에 대해 입을 떼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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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니 뭐니, 이건 빨리 해결되긴 그른 문제잖아.”

차라리 정치적으로 얽힌, 흔하디 흔한 권력 싸움이었다면 모르쇠로 시키는 일만 하면서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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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대체 내가 누굴 모시고 어디로 뛰어든 거야.”

본국으로 돌아가면 어차피 죽을 테니 제국에서 살길을 찾고, 아주 튼튼한 줄을 잡았다고 생각했건만 마법사를 보면 피하라고 하질 않나, 노르덴 국에서 봤던 이상한 신전도 그렇고 이젠 고대의 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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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바에야 아예 전체 이야기를 해달라고 매달려야겠네. 황녀 전하께 매달…… 아니, 그러다가 또 끔찍한 시선을 받게 될 테니…… 하아. 답이 없네, 답이 없어.”

아이작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더러워 질대로 더러워진 남자를 밀가루 포대처럼 어깨에 걸친 후 밤의 거리에 녹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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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의 밤을 가로지른 아이작은 어디론가 도망쳐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픈 마음과는 달리 곧바로 황녀 궁에 들어섰다.

사람을 짊어지고 황녀 궁을 지키는 기사들의 눈을 피한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이작에게는 그보다 훨씬, 훨씬 더 힘든 일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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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인데르 후작저에서 나온 여자 뒤를 밟았더니 저놈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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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자는 뒷골목에서 꽤 오래 살아남은 것으로 보였고, 이 남자를 하인데르 후작의 명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아이작의 말에 올리비아는 의아함을 감추지도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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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렌가의 사용인에다가 여기저기 빚을 지고 있고, 치정사건이 일어날 만한 관계에 얽힌 이런 놈이 하인데르 후작과 관계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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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게 말입니다.”

아이작은 정말로 말을 꺼내고 싶지 않은 듯 여우 눈을 더욱 가늘게 떴지만, 올리비아는 가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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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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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듣긴 들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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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어 아들 이야기는 냉큼 꺼내더니 무슨 일이기에 머뭇거려?”

올리비아의 말에 아이작은 불에 댄 것처럼 크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녀의 말이 더없이 날카로운 검이 되어 그의 목젖에 검끝이 닿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이라도 아이작의 목을 잡아 뜯을 듯한 검은 올리비아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크라이어의 살기였고.

아이작은 세상 다 살았다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을 삼켰고, 올리비아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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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아들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라서 그래?”

장난스럽게 말을 던진 올리비아는 뒤따르는 다급한 아이작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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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신이라고 하더군요.”

아이작은 하인데르 후작저를 살피러갔을 때부터 남자를 발견할 때까지의 일을, 구체적으로 그가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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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입니다만, 제가 노르덴국에서 본 그 신전도 이 신이라는 작자와 연결되어 있는…… 거겠죠? 가기 전에 고대신이니 뭐니, 마법사도 그렇고.”

제발 연관이 없기를 바란다는 듯한 그의 희망은 당연하게도 헛되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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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고대 신이라니 아주 정확하게도 말했네.”

명쾌한 답이 돌아왔지만, 답을 낸 올리비아나 답을 들은 아이작이나 대단히 찜찜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몇 번 입을 뻥긋거리던 아이작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여우눈을 축 늘어뜨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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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고대 신이라는 거, 황녀 전하와 우리 주인님하고도 아주 깊은 관련이 있는 거고요?”

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올리비아의 뭘, 그런 걸 새삼스럽게 물어보냐는 듯한 표정을 본 아이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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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네가 죽을 상이야. 관심 없었다는 거 알아. 그래서 일부러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네가 지금 뭔가 더 알게 되었다고 네가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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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고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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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묻는 아이작을 향해 올리비아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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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를 보면 피하라는 아주 해괴한 명령을 내리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았잖아. 그 정도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는 뜻 아니겠어. 노르덴 국에 가기 전에 해준 이야기들이 높으신 분들의 해괴한 망상같은 거라고 생각했겠지.”

아이작은 처음부터 ‘고대신’이라는 연결고리에 강제로 얽히게 된 앙브흐와는 달랐다.

제 발로 찾아와 써달라는 드문 능력의 아켄델 가문의 후예.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했으면서도 크라이어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 그의 판단을 올리비아는 존중했고, 당사자인 크라이어는 아무래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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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시피 네가 알 건 모르 건 상관없어.”

재차 입을 열려던 올리비아는 바로 따라붙는 아이작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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