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세상을 정화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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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세상을 정화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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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세상을 정화해야지요.
2022.05.12.
남자의 등 근육이 꿈틀거리기 무섭게 그레타의 가시가 빽빽이 돋은 경고가 울렸고, 남자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본래 온몸이 경련을 일으킬 만한 고통이었지만, 그레타의 경고가 먹힌 건지, 혹은 낙인의 영향인지 남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 몸을 쥐어뜯는 건지, 혹은 안쪽부터 잘근잘근 저며내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불로 지져대고 있는 건지.
혹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건지 모를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고통과 역겨움에 남자의 눈에서 툭,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의 의식이 현실과 유리되어 붕 뜨는 듯한 감각과 함께 귓가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지독한 목소리가 울렸다.
“으, 허억!”
그 직후 남자는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꿈틀거리는 등에서 흰 김이 피어올랐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그레타는 한순간 이십 년은 늙은 얼굴을 양손으로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한 듯했지만, 기실 낙인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낙인이 새겨진 본인만 알 수 있기에 그레타는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티슨.”
“네.”
“좀 어때?”
그레타의 질문에 티슨, 이제는 고대신의 노예가 된 남자는 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있는 화상으로 인해 흉하게 얽힌 흉터도 딱딱하게 굳어져 칼로 빚어내도 아프지 않은 굳은살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느릿하게 주먹을 쥔 그의 손아귀 안에서 흐르는 힘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로 상상도 하지 못했던 힘이 핏줄을 타고 흐르며 몸 안의 장기 하나하나를 전부 깨우고 있었다.
티슨은 주먹을 꽉 쥐며 자신이 느낀 바를 그대로 토해냈다.
“좋습니다.”
아주 단순했지만, 그레타가 정확히 원했던 답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단지 주어진 힘에 감격하여 마음으로부터 굴복하는 것.
“그래. 원하던 꿈이 이루어진 기분은 어때?”
“그 또한 좋습니다.”
망설임 없는 답에 그레타는 뱀처럼 비릿하게 웃었다.
눈앞에 있는 도구는 그가 원해서 기꺼이 고대신의 낙인을 새기고자 했다.
그러니 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네가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네. 세상을 정화해야지요.”
이번에도 한치의 주저 없이 답하는 검붉게 물든 티슨의 눈에서 일렁거리는 건 오롯한 광기였다.
신을 향한 맹신이라기보다는 그저 혼돈과 공포를 원하는 광기라는 것을 그레타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도구로 쓰다 버릴 것이니 도구로서의 쓰임만 잘하면 티슨이 무슨 생각을 하건 아무 상관없었으니까.
크라이어와 같은 낙인을 가졌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
눈앞의 도구도 정화되어야만 하는 대상이다.
그리고 티슨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낙인을 받아들이고 신을 위해 몸을 바쳤다.
제국의 하인데르 후작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가슴에 한이 맺혀 온 세상을 불태우기 결정한 보니타처럼, 티슨 역시 속 깊은 곳에 응어리진 끈적거리는 어둠 때문에 온 세상이 불타오르길 바랐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신의 뜻대로.”
서서히 어두워지는 신전의 지하에서 티슨의 등에 새겨진 낙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
짧지만 강렬했던 외유를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온 올리비아는 일단 황제와 대면했다.
“더는 유령 소동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 이번에도 깔끔하게 처리했구나.”
황제는 구태여 일의 구체적인 사항을 묻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올리비아가 어련히 잘 해결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올리비아 역시 구구절절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방법을 늘어놓지 않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을 뿐.
“더 시키실 일이 없다면, 물러가겠습니다.”
“황녀.”
“네. 폐하.”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황제가 피곤으로 얼룩진 눈가를 누르며 물었다.
“하인데르 후작을 어찌 생각하느냐.”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해요.”
전혀 답이 되지 않는 모호한 말이었지만, 황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지. 목소리를 내는 일도 후작가의 세력을 확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
“그렇다기보다 새삼스럽게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더군요.”
그렇게 입 밖으로 내서 말하고 나자 올리비아도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았다.
근래 하인데르 후작이 귀찮게 구는 문제들이 전부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크라이어를 걸고넘어진 것부터 시작해서 황녀궁의 기강을 트집 잡고 노르덴국의 외교관 교체까지.
아주 대놓고 노르덴국과 자신을 노리고 떠들어대고 있지 않은가.
회귀 전 삶에서 최후가 좀 찜찜하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큰소리를 낸 적이 없던 후작이다.
물론 회귀 후 올리비아가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니 자연히 다른 이들도 전과는 다른 행동을 하곤 했지만, 보니타처럼 지나치게 특정한 일에 노골적으로 달려드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면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지 않을까.
보니타 하인데르가…….
“흐음. 그렇다면 문제가 되겠군. 후작과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생각을 자르고 들어온 황제의 제안을 가장한 명령에 올리비아는 고아하게 웃었다.
“명을 받듭니다. 폐하.”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으로 축객령을 내렸고, 올리비아가 막 서류 더미를 헤치고 문을 나서려는 찰나.
“이제 다리는 괜찮은가 보구나.”
흘리듯 들려온 황제의 말에 올리비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절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요. 짧은 시간 정도는 걸을 수 있어요.”
황제는 올리비아가 입에 올린 도와주는 사람이 그녀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대회의에서 데려와 한시도 곁에서 떼어놓지 않는 기사, 크라이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
그 기저에 깔린 무한한 신뢰와 옅게 묻어나는 걱정에 올리비아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 환한 미소와 함께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
황제의 집무실을 나선 올리비아는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자신을 훌쩍 안아 든 크라이어의 목에 자연스럽게 팔을 감았다.
“기다렸어?”
“아니.”
딱 떨어지는 부정에 올리비아가 토끼 눈을 뜨자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네 걸음 소리를 듣고 황녀 궁에서 바로 왔다.”
“어…… 으응.”
대체 황녀 궁에서 내 걸음 소리는 어떻게 들었으며, 그 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순식간에 어떻게 온 건지 여러 가지 물어볼 것이 많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크라이어라면 그 모든 것이 가능할 테니까.
이윽고 황녀 궁으로 돌아와 집무실에 들어선 올리비아는 곧바로 슈가부터 확인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아이를 훑어본 올리비아는 곧 황제와 했던 이야기를 크라이어에게 그대로 전했다.
“……래서 하인데르 후작 뒤를 캐봐야 할 거 같아. 비약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노르덴국과 뭔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서. 뭐, 단순히 이번 생의 내가 맘에 안 들 수도 있고.”
“하인데르? 보니타 하인데르 후작이라고 했던가.”
“응. 기억하고 있었네?”
크라이어가 제국의 귀족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해서 올리비아가 되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네가 언급했었으니까.”
“아, 내가 좀 짜증을 내긴 했지.”
머쓱한 듯 뺨을 긁적이는 올리비아를 향해 크라이어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기억이 거의 없는 자신은 제 심장을 삽시간에 먹어 치워버린 그녀를 향한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올리비아를 곁에 두고 싶고, 곁에 있고 싶다는 진심만이 확실할 뿐.
감정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자신도 자신이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만.”
“그럼 무슨 의미였어?”
“네가 한 말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다만.”
은근하게 낮아진 크라이어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답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거나, 설레는 등 가슴이 두근거리는 반응을 보였겠지만…….
이미 그가 아니라 슈가에 신경이 쏠려버린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건성으로 답했다.
“당신 기억력도 엄청나게 좋구나. 난 당장 내가 며칠 전에 했던 말도 헷갈리거든.”
눈치라고는 수프에 말아 먹은 듯한 그 답에 크라이어는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한발 물러났다.
“그렇다고 해두지.”
“그렇다니까? 칭찬을 하면 그대로 좀 받아.”
그 와중에도 제 딴에는 챙겨준답시고 크라이어의 팔을 툭툭 두드려준 올리비아는 눈을 뜨지 않는 슈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같이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이미 남자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꽤 거창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도 여자아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때? 계속 이 상태였어?”
“그래. 깬 적은 없다.”
슈가를 데려온 이유가 이유인 만큼, 일부러 다른 이의 손에 맡기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녀의 집무실로 데려왔다.
슈가 곁에 자리 잡고 앉은 올리비아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혹시 겉으로 보이는 곳에 있었어?”
“아니.”
“역시나, 그러면 일단 애가 정신을 차려야 뭐라도 물어보고 확인을……으악!”
눈꺼풀이 잘게 떨린다던가, 느릿하게 올라온다던가 하는 전조도 없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슈가를 본 올리비아의 엉덩이가 의자에서 붕 떴고, 그런 그녀의 등을 받쳐 뒤로 넘어가지 않게 잡아준 크라이어가 슈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신 차렸군.”
덤덤한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는 그에게 기댄 채 의심스럽게 슈가를 훑어보았다.
“정신 차린 거 맞아? 애가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슈가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더니 그보다 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검붉은 눈과 마주한 올리비아는 언제 정신을 빼놓고 놀랐냐는 듯 서리가 한 겹 내린 서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슈가 르위르?”
하지만 슈가는 그저 눈을 다시 느릿하게 깜박거리기만 했기에 올리비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크라이어의 가슴팍에 기댄 뒤통수를 꾹 눌렀다.
“초점 있는 거 같아?”
“아니.”
“그러면 정신 차린 게 아니잖아?”
그의 답에 올리비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아이 상대로 표정 관리하기 힘든데, 언제 제대로 눈을 뜰지 알 수가 없으니 계속 얼굴을 굳히고 있어야…….”
“내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