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동……료 맞지.
(69/146)
69. 동……료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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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동……료 맞지.
2022.04.28.
슈가는 눈도 한번 깜박하지 못한 채 저도 모르게 그가 한 것처럼 검지를 입술에 붙였고, 크라이어는 아이에게 시선을 둔 채 기감으로 집 안 전체를 훑으며 숨겨진 공간, 혹은 뭔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을 더듬었다.
그리고 아켄델의 비전을 이은 아이작조차 듣지 못한, 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만큼 지나치게 희미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아마 크라이어 외에는 전 대륙을 뒤져도 이 집에 숨겨진 공간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스으으.
거의 들리지 않는 바람이 흐르는 소리를 따라가던 크라이어가 한순간 슈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덜컹.
눈 한 번 깜박하는 사이 슈가가 몸을 뉘이던 침대가 뒤집혀 있었고, 그 아래 시커먼 구멍이 보였다.
이제껏 살아온 집에 저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슈가는 입만 뻐끔거렸고, 크라이어는 그런 아이를 잠시 눈에 담다가 곧 구멍 속으로 손을 뻗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끝에 걸리는 감각으로 무언가를 꺼낸 그는 슈가가 무어라 할 사이도 없이 왔던 때처럼 갈 때도 한낮의 유령처럼 사라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더군. 그리고 검붉은 눈동자는 확실하다.”
“아, 왔어?”
올리비아는 그가 불쑥 나타나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한껏 반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대로라면 몸 한 부분을 제물로 바쳐지거나, 주기적으로 피를 뽑힌다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고약한 소리를 환한 얼굴로 내뱉은 올리비아는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꾸러기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당신 아들은?”
키득키득 웃는 가벼운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크라이어의 눈매가 금방 누그러졌다.
“여장을 하고 있더군.”
“여장?”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올리비아가 토끼 눈을 뜨고 목을 쭉 뺐다.
그렇게 한다고 여기서 슈가가 보일 리 없건만, 올리비아는 점점 더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동그란 이마를 꾹 눌러 목을 집어넣은 크라이어가 답했다.
“그래. 취향인지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거야 뭐, 본인에게 물어보면 알 일이지. 그보다 손에 든 건 뭐야?”
올리비아가 손짓하자 크라이어는 순순히 그녀에게 구멍 속에서 꺼낸 물건을 건넸다.
“짐에 숨겨진 공간이 있더군. 그 안에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흐응.”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봐도 얇은 책으로 보이는 것을 이리저리 살피던 올리비아가 책을 코로 가지고 가더니 킁킁거렸다.
“꽤 오래된 것 같아.”
낡은 종이 특유의 냄새와 아주 옛날에나 쓰였던 잉크 냄새가 뒤섞인 책의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검은 가죽으로 된 책의 표면을 쓸어내리던 올리비아는 갑작스럽게 찜찜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거 사람 가죽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사람 가죽은 아니다.”
덤덤하지만 확신에 찬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는 금세 안심한 듯 책을 만지작거리다 멈칫했다.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건데.”
“글쎄.”
모호한 답을 흘린 크라이어는 한쪽 눈을 찡그리듯 웃었고, 올리비아는 더 자세히 캐묻지 않기로 했다.
오래 묵은 데다 보존 상태도 썩 좋지 않은 책을 조심스럽게 펼친 올리비아는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책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뭔가 불쾌하기도 하고 아리송하기도 한 표정을 짓던 올리비아는 마지막 장을 펼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거 일기…… 같기는 한데.”
“일기라고?”
“응. 일기라고 하기에는 뭔가 엄청나게 괴로워하고, 한탄하고, 절망한 흔적뿐이지만.”
올리비아는 일기장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지어 한 사람이 쓴 것도 아니야, 아마도 대를 이어서 써온 거 같아. 내용은 하나같이……음.”
괴로워, 살려줘, 힘들어, 죽고 싶다 등등 온 세상의 어두운 감정들만 끌어모아 채워 넣은 듯한 일기장을 뒤적거리던 그녀는 다시 마지막 장으로 돌아왔다.
“이게 대체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조금만 더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아아, 지금 그런 기분이야.”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인 후 끙끙거리기 시작한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의 검붉은 눈동자가 핏물이 넘치듯 크게 일렁거렸다.
“그런 기분이라니, 설마 일기장에 독이…….”
그녀에게 건네기 전에 독이나 함정 같은 위험 요소들이 있는지 살피긴 했지만, 자신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독이 묻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답지 않게 성마른 손짓으로 올리비아의 턱을 잡아 올린 그의 말에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그 왜 있잖아. 목욕하는 중에 흥얼거리던 노래 가사 뒷부분이 기억나지 않아서 꽉 막힌 기분.”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멀쩡한 것 같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잡은 턱을 놓지 않고 이리저리 살피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던 올리비아가 툭 내뱉었다.
“걱정했어?”
“속이 전부 뒤집힐 만큼.”
잠깐의 틈도 없이 돌아온 답에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천천히 팔랑거렸다.
왜 당신이 내 걱정을 하느냐고 물어보려고 했더니, 다른 것부터 물어봐야겠네.
걱정했다는 거 같은데, 속이 뒤집히다니 무슨 말이지.
“그게 무슨.”
올리비아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내 애간장을 태웠다는 말이다.”
귓바퀴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고 은근해서 올리비아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등줄기가 바짝 섰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챈 크라이어는 한 발 크게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왜 걱정했냐고 묻고 싶은 눈치인데, 같은 목표를 가진 유일한 동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나.”
입꼬리를 살짝 비튼 그가 꺼낸 말에 올리비아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그렇지. 응. 동료. 동료지. 맞아. 응. 동……료 맞지.”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답을 얻었는데도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니, 만족스럽기는커녕…….
그 순간 올리비아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크라이어의 시선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 제가 어떤 표정인지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눈을 반쯤 내리깐 그녀는 곧 제 손에 들린 아주 좋은 회피 거리에 온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으음, 으으으음. 으음.”
올리비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제일 마지막 장을 툭툭 두들겼다.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글자들이 제멋대로 뒤얽혀 어떤 문장을 나타내기도 했고, 말도 안 되는 단어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듯 휘갈긴 글자들을 더듬던 그녀가 일기장에 거의 코를 박을 듯 얼굴을 들이대자 크라이어가 옅은 한숨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조금 멀리 두고 보는 편이 전체 형태를 볼 수 있지 않나. 뭔지 모를 글자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크라이어는 일기장 속으로 당장 들어갈 기세인 올리비아를 막기 위해 일단 그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막고 그럴듯한 말을 했다.
그리고 그의 그럴듯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올리비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큰 그림! 어디서 많이 봤는데, 생각이 날 듯 말 듯, 뭔가 했더니, 이거 지도야 지도!”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에게 일기장을 떠넘긴 후 품속에 있던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도저히 품 안에서 나올 두께가 아닌 듯한 두툼한 서류 뭉치를 본 크라이어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눈을 번뜩였다.
“이딴 상소를 올린 관리자가 책임지는 지역이야!”
***
“이거…… 우연인가?”
일기장의 지도에 표시된 장소에 도착한 올리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여기 거기 맞지? 출발하기 전에 내가 말 했던 게 맞잖아.”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묻는 그녀의 말을 크라이어가 긍정했다.
“그래. 요즘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고 했던 곳이다.”
“이곳을 책임지는 관리자가 황제 폐하께 직접 상소를 올려 읍소할 만큼 겁을 집어먹었지.”
[수도 외곽의 한 구역에 위치한 공원에서 기묘한 현상이 자꾸 일어나 조사대를 파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고 조사를 나섰던 경험 많은 이들조차 다시는 나서지 않아 민심이 불안하오니 부디 굽어살피어 주시옵소서. 이 현상이 해결되지 않으면 심신미약으로 저는 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습…….]
올리비아가 말도 안 된다며 고함쳤던 서류의 내용이었다.
“대체 얼마나 겁이 많으면, 민심을 핑계로 황제 폐하께 직접 그만두겠다며 하소연 한 거야? 라고 생각했더니.”
혀를 쯧쯧 찬 올리비아는 기분 탓인지 어딘가 음산한 공원을 휙 둘러보았다.
통제하는 이도 없는데 대낮에도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고 무서운 일이 구체적으로 뭔지 적혀 있질 않으니 뭘 조심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일단 좀 둘러 볼까? 이 절망밖에 없는 일기장이 말하려는 게 뭔지도 찾아볼 겸.”
크라이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올리비아가 왼편을 가리켰다.
“그럼 당신은 저쪽으로 가서 살펴봐. 나는 이쪽으로 갈게.”
제 가슴을 한번, 오른편을 한번 가리키는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함께 움직이지.”
“굳이? 공원 부지가 꽤 커서 양방향으로 살피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릴…….”
“네게서 눈을 떼고 싶지 않다.”
매우 논리적인 올리비아의 말은 감성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크라이어의 말에 단숨에 힘을 잃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크라이어는 감성에 논리를 더했다.
“게다가 그 발로 돌아다닌다고? 내가 안고 다니면서 두 사람의 눈으로 보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크라이어의 시선이 박힌, 제 발을 감은 하얀 붕대에 올리비아는 반박할 말이 궁해졌다.
“그, 렇긴 하지. 그러면…….”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크라이어는 능숙하게 그녀를 한 팔로 안아 들었다.
“왼편부터 훑어서 크게 원을 그리면서 중앙으로 좁혀 들어가겠다.”
“으응.”
둘은 한동안 그렇게 공원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뭐 느껴지는 거 있어?”
“아니. 보이는 건?”
“없어. 당신은?”
“딱히 없다.”
이런 대화를 공원을 둘러 보는 내내 몇 번이나 주고받았을까.
처음 지점으로 돌아온 올리비아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며 선언했다.
“나 좀 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