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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기억이 나지 않는다. (67/146)


#67.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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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의 질문에 반응한 건 크라이어가 아니라 올리비아였다.

그녀는 작살 맞은 참치처럼 어깨를 크게 튕기다 발뒤꿈치에서 오는 통증에 신음을 삼켰고, 아이작은 대체 언제 다가왔는지 코앞에 있으면서도 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크라이어를 마주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아주 잠시 끙끙거리던 올리비아가 크라이어에게 가려진 아이작을 향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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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작의 생존본능이 아주 요란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대답을 잘 하지 않으면 자신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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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올리비아가 당장이라도 아이작의 멱살을 잡고 답을 뽑아낼 기세로 몸을 움찔거리자, 크라이어의 검붉은 눈동자가 이전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이작은 살기 위해 답을 정리하고 답을 고를 시간조차 얻지 못한 채 외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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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눈동자를 한 아이를 만났습니다!”

필사적인 그의 외침은 아주 정확히 올리비아의 귀에 내리꽂혔다.

그녀는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어 잠시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천천히 모로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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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에 아이작은 미처 하지 못한 설명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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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눈동자요. 제가 평생 살면서 딱 한 번 본 적 있는 눈 색입니다. 제 견문으로 전 대륙 사람들의 눈동자 색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건 아주 독특하고 희귀한 색이지 않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아이작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볼셰이크를 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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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붉은 머리와 잡스러운 색이 섞이지 않은 푸른 눈동자 혹은 제비꽃 색 눈동자, 두 가지 모두를 가진 이가 볼셰이크 뿐인 것처럼요.”

아이작이 입을 다물자 뒤통수를 너무 힘차게 맞아서 정신이 살짝 날아갔던 올리비아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느릿하게 숨을 가다듬는 몇 초 동안 아이작은 삶과 죽음을 몇 번이나 오갔다.

아이작의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고 그가 탈출로를 그리다 수십 번 절망한 후에야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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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결국 눈동자 색이 같은 크라이어의 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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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볼셰이크처럼.”

황당함으로 열이 오른 눈가를 꾹 누른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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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녀는 한껏 앞으로 내밀었던 몸을 소파 뒤로 깊숙이 묻으며 볼셰이크의 푸른 시선으로 여전히 아이작을 가리고 선 단단한 크라이어의 등으로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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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눈동자 색이 같다고, 라는 말이 쏙 들어갈 만한 설명이네.”

아이작의 말은 언뜻 미친 소리처럼 들렸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또 그럴 듯했다.

그의 말대로 검붉은 눈이 흔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살아갈 길에 빛이 들자 아이작은 재빠르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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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이는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하고, 타렌 가문에 빚을 많이 져 빚 청산이 되기 전까지는 가문의 이름을 맡긴 르위르 가문의 후손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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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위르 가문의 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소릴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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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렌저에서 이전 자료를 모조리 뒤졌습니다만, 르위르 가문에서 검붉은 눈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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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아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보다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야? 그 아이가 크라이어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거.”

올리비아의 입에서 ‘크라이어의 자식’이라는 문구가 떨어진 순간, 아이작은 그야말로 목이 떨어진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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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결국 황녀 전하의 남자니…….’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치고 지나는 앙브흐의 말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그, 그렇지. 황녀 전하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됐지.

그렇지만, 숨기는 것 따위는 없다고 황녀 전하 앞에서 말을 하라고 허락한 건 주인님이면서!

아이작은 심히 억울하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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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제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슈가가 혹시 크라이어의 아들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는 앙브흐와 대화 중에 튀어나온 가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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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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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능성이든 열어두는 게 중요하잖아요!’

 
앙브흐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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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닮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여자아이라 그럴 수도 있어요. 딸들은 어릴 때 어머니를 닮는 경우가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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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아이작은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슈가는 지나가던 원숭이가 봐도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로 보였지만, 실은 남자라는 사실을.

아이가 감추는 것이 단순히 성별은 아닐 테지만, 그 또한 뭔가 아이가 가진 비밀과 연관되어 있겠지.

게다가 실제로 검사하지 않는 이상 그가 틀린 것일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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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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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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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눈동자 색이 검붉은 색이었어요.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확히 말하면 그분 외에는 본 적이 없는 색이요. 게다가 만약 그분의 딸이라면 사라진 사용인이 슈가를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며 중요하다고 강조한 이유를 끼워 맞출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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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럴 듯하게 들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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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그러니까 확인해 봐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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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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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봐야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었는데.

언제나 후회는 늦는 법이라며, 도망갈 수 있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가라던 조상님들의 충고를 뼛골 깊이 새겨야 했거늘.

앙브흐와 나눈 대화를 빠짐없이 전하면서 아이작은 후회하고 또 후회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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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선 확인을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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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아무리 그래도 너무 끼워 맞춘…….”

아이작의 말을 자른 올리비아가 말을 하다 말고 문득 멈췄다.

정작 당사자인 크라이어가 굳게 입을 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전보다 더 미심쩍은 눈길로 셔츠 너머로도 느껴지는 잘 잡힌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넓은 등짝을 위아래로 훑었다.

설마 설마 했더니. 정말로?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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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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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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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가 그를 부르기 무섭게 이제까지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답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아이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기억이 안 난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다니요?

그 답이 아닌 거 같습니다만! 그 답은 정말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아닙니다만!

슈가가 진짜 크라이어의 아들이어도 문제가 되는 답이고, 아들이 아니어도 문제가 되는 답이 아닌가.

저질러 놓고 모르쇠 하는 책임감 없는 쓰레기냐, 제가 한 짓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등신이냐, 라는 어느 것도 고를 수 없는 선택지로 돌진하다니!

이제까지 침묵하다가 하필 골라도 절대 정답이 될 수 없는, 아니, 아예 정답 근처에도 못 간 답을 내놓느냐고!

아이작은 제 주인이 눈치라고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는 것이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만큼 지독하게 강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물론 크라이어가 과거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올리비아의 표정도 떨떠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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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억이 안 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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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전혀 기억에 없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자 집무실에는 무덤 같은 침묵이 내렸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 침묵에 깔려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림자에 한발을 걸쳤다.

나는 여기서 나가야겠어.

그 결심을 알아본 건지, 아니면 밤에 널 처리하겠다는 건지 살짝 헷갈리는 눈빛이긴 했지만, 마침 크라이어도 그를 향해 눈짓했다.

아이작은 온다간다 인사할 여유도 없어 크라이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그림자로 녹아 사라졌다.

집무실에서 멀어지는 아이작의 기척을 확인한 크라이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확연히 가라앉은 그의 주변 공기가 그럴 리 없을 텐데, 쩌적거리며 얼어 갈라지는 듯했다.

올리비아는 석상처럼 우두커니 그 자리에 굳어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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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리와.”

그녀의 손짓에 마법이 풀린 것처럼 크라이어의 손끝이 움찔거리더니 순식간에 그가 올리비아와 코앞까지 다가섰다.

소파에 앉아 크라이어를 올려다보던 올리비아가 손을 뻗자 그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몸을 숙였고, 올리비아는 어렵지 않게 그의 양 뺨을 양손으로 콱 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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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 기억나지 않는 거라면 그렇게 어린아이가 있을 리가 없잖아. 설마 부활한 이후의 기억도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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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눈을 뜬 이후로 기억을 잃은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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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으로 당신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그 짓거리마저도 지웠을 가능성은?”

올리비아의 질문에 크라이어는 바로 아니라는 답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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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까지 했다면 당신 자식일 수도 있겠네. 그런데 말이야.”

잠시 말을 끊은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농담으로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웃음이었지만, 크라이어는 그 미소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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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기억에 없다면, 그 애는 절대 당신 아들이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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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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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마법사의 딸. 그러니까 이름이…… 그…… 그웬델? 그웬돌린?”

마법사의 딸이라고만 했더니 이름을 잊었기에 연신 다른 이름을 내뱉은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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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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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여자가 버티고 있잖아.”

거기까지 말한 올리비아가 입을 다물자 크라이어의 검붉은 눈동자에 더할 수 없이 예리한 검이 날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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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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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당신을 사랑, 아니 이건 사랑을 모욕하는 것 같으니까.”

고개를 흔든 올리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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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집착하는 게 분명한 그 여자가 과연 당신이 자식을 보는 것을 눈 뻔히 뜨고 보고 있었을까?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 나이가 안 맞잖아. 말을 들어보니 당신이 부활해서 바로 아이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10년 전에는 부활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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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몇 개월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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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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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눈동자를 가졌지만, 내 아이일 수는 없군.”

올리비아의 말을 받은 크라이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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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이가 부모의 눈동자 색을 그대로 빼다 박을 확률도 반반이야. 볼셰이크가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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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이크는 아니라고?”

그의 질문에 올리비아는 제 머리카락 끝으로 흘긋 시선을 두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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