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꼭 이렇게 있어야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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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꼭 이렇게 있어야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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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꼭 이렇게 있어야 하는 겁니까?
2022.04.18.
“나를 원한다는 듯이…….”
크라이어의 마지막 답은 그에게조차 희미하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기에 올리비아는 듣지 못했다.
답은 돌아오지 않고 눈은 계속 가려져 있었지만, 딱히 그의 손을 쳐낼 생각은 들지 않아 올리비아는 그 상태 그대로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파닥거리며 손바닥을 간지럽히자, 크라이어의 저 아래에서 열기가 확 피어올랐다.
“어? 갑자기 뭐야.”
눈을 가릴 때도 갑작스러웠지만, 기분 탓인지 손을 뗄 때는 더 갑작스럽고 거친 느낌이라 올리비아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한차례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외면한 채 손만 내밀었다.
“다른 건 됐고, 이건 네가 살펴봐야 될 거다.”
“뭐기에?”
구태여 그가 한 행동을 캐묻지 않고 서류를 받아든 올리비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게 무슨 헛소리야!”
***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사이좋게 서류의 산을 빠르게 깎아내는 사이.
아이작과 앙브흐는 타렌저로 돌아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이마를 맞댄 상태였기에 아이작은 여우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두 번째로 물었다.
“꼭 이렇게 있어야 하는 겁니까?”
“의외로 끈질기시군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해야 최선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머리를 맞대야 하는 건 맞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실천까지 하라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 해야 돼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서로의 숨결이 섞이는 상황에서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호한 앙브흐의 답에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이 아가씨와 만난 이후로 계속 질질 끌려다니는 느낌인데.
아니,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끌려다니고 있잖아.
물론 타렌저에 무단침입한 정체가 불분명한 놈이라는 약점이 잡히기는 했지만, 그 건은 조사를 함께하는 조건으로 넘어가 준다고 했을 텐데.
잠시 자신이 왜 이런 곳에서 이 아가씨와 이러고 있는 것인지 고찰한 아이작은 곧 그런 의문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뭐, 그리 나쁘진 않으니까 상관없나.
결정은 빨라야 살아 남는 데 유리하다는 아켄델 가문의 신조대로, 아이작은 앙브흐와의 동행에서 구태여 몸을 빼지 않기로 했다.
질문이 많긴 하지만, 딱히 거슬리지 않으니…….
“……니까, 아무래도 기사님부터 만나야 하겠죠?”
“죄송합니다. 앞부분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그보다 기사님이라고 하시면.”
“황녀 전하 곁을 지키시는 분이죠. 은빛 머리에 검붉은 눈. 전하께서 대회의에서 그분과 함께 돌아오셨을 때 사교계가 뒤집혔었죠.”
이마를 맞댄 그대로 앙브흐가 고개를 기울였기에 그녀가 이상한 각도로 그를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결국 아이작도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사교계가 난리 날 만한 일이었지 않습니까. 무려 황녀 전하께서 처음으로 손수 고르신.”
“아이참, 그런 쪽으로 소란스러웠던 건 권력 이동에 민감한 이들이었고요.”
“그러니까 제국의 모든 귀족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아무튼 난리가 났던 부분은 기사님의 외모 때문이었어요. 외모? 전체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그런데 왜 그렇게 의아한 표정이십니까.”
앙브흐는 미간을 모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물론 눈이 돌아갈 만한 얼굴이긴 하지만, 솔직히 그것보다는 한눈에 봐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강해 보이지 않아요?”
아이작은 앙브흐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타렌가의 후계자라 그런 건지 사람을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자신은 가문의 비전을 바탕으로 받은 훈련과 본국에서 사냥개 취급을 받으며 기른 눈을 가지고 있으니 그분을 단숨에 알아봤지만, 훈련이라고는 호신술 정도만 익힌 아가씨가 저런 평가를 내리다니.
“그래도 결국 황녀 전하의 남자니 이러니저러니 하던 촉새들도 금방 입을 다물어버렸죠.”
“그렇지요. 입에 올릴 주제는 신중히 정해야 하는 법입니다.”
올리비아가 들었다면 펄쩍 뛰며 부정할 이야기를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나눈 둘은 이야기를 되돌렸다.
“아무튼 르위르 가문에 대해서는 싹 다 뒤집어 봤지만, 나오는 게 없었잖아요. 그러니 슈가가 숨기는 건 아이 자신에 관한 것이고, 저희가 가진 단서는…….”
“검붉은 눈이죠.”
앙브흐의 말을 받은 아이작의 목울대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자신이 따르기로 결정한 분이지만, 여간해서는 얼굴을 맞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슈가와 비슷한, 아니, 거의 흡사한 검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도사리는 것을 떠올린 그는 저도 모르게 등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눈앞에 아가씨가 지극히 평온하게 그분을 만나자고 했지.
“질문 하나 드려도 됩니까?”
“물론이죠. 제가 답할 수 있다면 뭐든 답해드릴게요.”
호의만이 담긴 앙브흐의 답에 아이작은 이마를 슬쩍 떼어내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든 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담스러워서요.”
“부담스럽다면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질문이 뭐죠?”
자칫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아이작의 답에도 앙브흐는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무섭거나 공포스럽거나 꺼려지거나 어렵거나 무섭지 않으십니까?”
“무섭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셨네요.”
“중요해서 두 번 말했습니다.”
굉장히 진지한 아이작의 태도에 앙브흐도 자세를 바로 하며 상당히 진지하게 답했다.
“전혀 무섭지 않아요. 꺼려지지도 않고, 어렵거나 공포스럽지도 않아요.”
그녀의 답에 아이작은 아까 자신이 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 보는 안목이 꽤 정확한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
“황녀 전하 곁에 계신 분이잖아요. 제 목을 손짓 한 번으로 꺾을 수 있다고 해도 무서울 리가 없죠. 그분은 황녀 전하의 사람이니까요.”
이어지는 답과 천진한 앙브흐의 미소를 본 아이작은 또 생각을 수정했다.
안목은 있지만, 황녀 전하와 관련되면 없어지는 거로군.
“아이작은 그분이 무서운 거죠?”
너무나도 직설적인 질문은 자칫 비웃거나 비꼬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었지만, 아이작은 순순히 긍정했다.
“네.”
“왜요?”
도통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앙브흐에게 아이작은 아주 솔직하게 답했다.
“본능적인 공포죠.”
최상위, 아니 까마득히 높고 높아서 제대로 보이지도, 절대 닿을 수도 없는 강자를 향한 생존 본능이 경고하는 공포.
그건 결코 학습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일정 수준 이상의 무력을 지닌 자라면 누구나 크라이어를 보고 느끼는 감각일 테니까.
당연히 ‘일정 수준’의 무력이 없는 앙브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앙브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흔들지도, 자신을 납득시키라며 종용하지도 않았다.
다만 확신에 가득한 눈을 빛내며 물었을 뿐.
“그래도 갈 거죠?”
어디로, 누구를 이라는 목적어가 전부 빠져 있었지만,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침묵을 지켰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하죠. 그럼 가죠!”
“지금 바로 말입니까?”
“그럼요! 이런 일은 바로바로 움직여야 해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황실에서 내려오는 격언도 있죠.”
“쇠뿔이…… 아닙니다. 볼셰이크 제국의 기묘한 격언이 한두 개도 아니고. 그리고 아직 정리해야 할 게 남았습니다.”
“정리요?”
아이작은 제 눈가를 툭툭 두드리며 답했다.
“검붉은 눈에 관한 건 어디까지나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나온 수상한 단서지 않습니까. 원래 조사를 하려던 건…….”
“아! 그렇죠.”
그제야 떠올린 듯 앙브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진 사용인의 뒷조사를 하다 보니 황녀 궁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단서도 꽤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실종된 이유는 그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건 세 사람이 치정 관계였죠.”
“그 부분은 예상대로였네요.”
방실방실 웃던 앙브흐가 뜬금없이 양손으로 제 팔을 문지르더니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가죠.”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아이작이 입을 열려는 순간.
-똑, 똑똑똑똑똑똑똑똑.
거칠고 강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조급하고 초조한 듯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밖의 사람이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도 앙브흐는 다가올 미래를 직감한 듯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아이작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혼자 가셔야겠네요.”
-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집념이 느껴지는 노크 소리가 무섭게도 울렸다.
앙브흐의 어깨가 한층 더 처지는 것을 본 아이작은 괜히 간질거리는 입을 열고야 말았다.
“아직 슈가의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니…….”
말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않았지만, 앙브흐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럼 조만간 또 봬요! 다음 방문에는 미리 말을 해둘 테니 정문으로 오셔도 될 거예요.”
“아뇨, 괜찮으시다면 되도록 정문은 피하고 싶습니다만.”
“좋아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아이작의 수상한 방문 경로를 허락한 앙브흐는 곧 문을 향해 외쳤다.
“들어와.”
그와 동시에 아이작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말, 정말로! 급합니다. 이대로 결재가 나지 않으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양손을 모아 비는 후작의 보좌관을 마주한 앙브흐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번에 부루퉁하게 퉁퉁하게 부은 그녀의 뽀얀 뺨이 얼핏 보였다.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올 때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알지 못하게 타렌저를 빠져나갔다.
***
“그러니까 실종된 사용인이 알고 보니 르위르 가문 사람이었고, 돈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네. 그리고 전하를 노렸던 여자는 치정문제였습니다. 황녀 전하가 목표가 아니라 전하께서 잠시 입었던, 그 문제의 리본 색이 다른 옷의 주인이 원래 목표였죠.”
“아, 역시 그랬나.”
올리비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데르 후작이 무려 황제 폐하께 상소를 올린 ‘행실이 좋지 않은’ 혹은 ‘품행이 단정치 않은’ 사용인이 그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이었다.
“흔한 이야기였네. 결말도 흔한.”
“한 쌍의 연인 중 한쪽이 둘의 절친과 바람이 나서 세 사람 다 파국을 맞이하는 건 확실히 드문 이야기는 아니죠.”
덤덤하게 말한 아이작이 덧붙였다.
“황녀 전하를 노린 암살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
“그래. 이 사건은 이대로 종결해야겠지.”
피해자가 될 뻔한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에게 공식적인 조치를 취할 수는 없다.
세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로지 그들만이 정확히 알 테니까.
게다가 하인데르 후작이 지나치게 나서며 그 사용인을 내보내라고 하니 더더욱 처리하기 찜찜했고.
“그 사건은 종결입니다만.”
아이작이 말끝을 흐리며 크라이어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가 딱히 숨기지도 않았기에 올리비아도 크라이어를 돌아보았다.
“무엇을 말하건 상관없다. 그녀에게 비밀은 없으니까.”
“아…… 네. 그러시군요.”
뭔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들었다는 표정을 여우 눈 뒤로 간신히 숨긴 아이작이 크라이어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아들이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