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검붉은 색이었죠.
(64/146)
64. 검붉은 색이었죠.
(64/146)
#64. 검붉은 색이었죠.
2022.04.11.
물구나무서서 봐도 귀하고 높으신 분 같은 앙브흐가 티끌 없이 선량한 얼굴로 물었지만, 슈가는 제 머리카락 끝을 휙 빼내며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몰라요. 집에 며칠째 들어오지 않아서. 오……빠 소식을 알려주러 오신 줄 알았어요.”
실망이 뚜렷하게 드러나던 아이의 얼굴은 말의 끝으로 갈수록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오……빠를 안다고 했으면서, 집까지 찾아와서 그 행방을 찾는 사람들.
얼굴이 갈라져 피를 흘리던 남자가 떠오름과 동시에 아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이런. 우린 네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단다. 다만 너희 오빠를 찾고 있을 뿐이야.”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지만, 창백하게 질린 아이의 안색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앙브흐가 무어라 다시 입을 열려는데 아이작이 먼저 말했다.
“이만 돌아가죠.”
“정말요?”
“네.”
단호하게 답하면서도 먼저 움직이지는 않는 그를 본 앙브흐는 슈가를 한 번, 집 안을 한 번 본 후 먼저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가 없어 닫히지 않는 문을 지나면서 로브 후드를 눌러쓴 앙브흐가 안쪽으로 소리쳤다.
“문을 고치러 바로 사람이 올 거야. 문만 고치고 갈 거니까 너무 겁내지 말렴!”
바로? 앙브흐의 말에 아이작이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는 이런 동네에서 흔한 아주 작은 구멍가게로 향했다.
슈가의 집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가게는 늙었지만, 우람한 팔뚝을 자랑하는 노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 집, 문 좀 제대로 고쳐줘. 문고리가 망가졌거든.”
앙브흐는 그리 말하며 타렌가의 문장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고, 노인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곧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이윽고 노인이 부른 이들이 우르르 슈가의 집으로 몰려가는 것을 본 아이작이 물었다.
“타렌가의 가게였습니까?”
“네.”
“정말로 타렌이 없는 곳은 없군요.”
“뭐, 그렇죠.”
방긋 웃은 앙브흐가 가게를 나서며 물었다.
“아이에게서 더 물어볼 것이 없었었어요? 집 안이라도 좀 뒤져 봤으면 뭐라도 건졌을 수도 있을 텐데.”
아이작은 슈가의 집을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집 안에 뭔가를 숨겼다면 이미 이 근처 놈들에게 털렸을 겁니다. 몰락했어도 귀족이었던 이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저 아이, 숨기는 것은 확실히 있습니다.”
“역시 사라진 오빠의 행방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걸까요?”
“아뇨, 그 오빠에 관해서는 진실만을 말했습니다만.”
“아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으로요.”
사기꾼 냄새가 풀풀 나는 말이었지만, 아이작은 하늘에 대고 맹세코 진실을 말했다.
말 그대로 아켄델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 중 하나가, 상대의 기만과 거짓을 간파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그런 것이 비전에 있는 만큼 반대로 자신이 상대를 기만하고 진실보다 더 그럴싸한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비전 중의 하나였다.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적어도 저 아이가 제국의 첩자 수준으로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빠에 관한 답변은 전부 진실입니다. 뭐,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믿어요. 황녀 전하께서 믿으시니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앙브흐는 해맑게 답했고,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요?”
“글쎄요. 가문이 거의 망하긴 했지만, 어쨌건 귀족 가문이었으니 그 가문의 문제나, 혹은…….”
아이작이 잠시 말을 끊자 앙브흐는 조바심을 내며 그의 팔을 흔들었다.
“혹은?”
“아이 자신이 가진 문제겠지요.”
앙브흐가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동안 슈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관찰한 아이작은 아이의 몇 가지 특이한 사항을 알아챘다.
첫째로 얼굴을 제외한 맨살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
날이 서늘하긴 했지만, 집 안에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을 만큼 추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이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서 그렇게 입었다고 하기에는 아이의 얼굴과 머리의 경계 부근에 아기처럼 땀이 살짝 맺혀 있었고…….
둘째로 아이는 자신의 몸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감각을 느낄 신경도 없는 머리카락 끝을 앙브흐가 아주 잠시 잡은 것만으로도 얼굴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었지.
첫 번째와 이어 생각해보면 아이가 자신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면 몸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 눈이요.”
“네. 저도 봤습니다.”
“꽤 익숙했죠?”
“정확히 같은 색은 아니었습니다만.”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던 둘은 동시에 말했다.
“기사님 눈동자 색하고 비슷했어요.”
“흐릿하지만 검붉은 색이었죠.”
***
“하인데르 후작이 대체 왜 이런 사소한 것에 손을 뻗는지 알 수가 없네.”
올리비아가 서류 모서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중얼거리자 차원 이동한 여동생이 있었다는 볼셰이크 공작의 기록에서 마지막 챕터를 앞두고 있던 크라이어가 고개를 들었다.
“하인데르 후작?”
“응. 왜 전에 당신 문제로 시비 걸러 왔던 후작.”
“아아, 나를 돌려보내라고 했던가.”
“그래. 꼬장꼬장하게 따지고 들어서, 내 마음이야! 라고 큰소리를 쳤었지.”
턱을 치며 들며 한껏 오만하게 말하는 올리비아를 본 크라이어는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기에?”
“아아, 황녀 궁의 사용인 중 품행이 단정치 못한 이가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올리비아는 피식피식 웃으며 모서리를 긁던 서류 끝을 잡아 올렸다.
“그 사용인을 반드시 내쫓고 적절한 인선을 다시 기용해야 한다고 무려 황제 폐하께 상소를 올렸어.”
“황녀 궁의 사용인을 바꾸라고 상소를 올렸다고?”
“잘못 들은 거 아니니까 확인할 필요 없어. 이 서류에 정확히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팔랑팔랑 흔들리는 서류에 선명하게 찍힌 하인데르의 문장이 오늘따라 어찌나 가벼워 보이는지.
올리비아는 이내 그 서류를 옆으로 던져버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인데르 후작이 근래 가문에 우환이라도 생긴…… 아니, 이런 이야기는 하면 안 되지만. 아무튼 왜 이리 안 하던 짓을 자꾸 할까.”
이런 헛소리를 자주 하던 이였거나 가문이 한미하다면 그냥 황제 폐하의 관심이 많이 필요하구나, 하고 넘어갈 텐데.
그 하인데르 가문의 그 보니타가 아닌가.
그냥 무시해버리고 싶지만, 제국 내에서 괜한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가뜩이나 강대하다 못해 직접 상대는 못 하고, 그 하수인을 자처하는 빌어먹을 마법사만이라도 처리하려고 발버둥 쳐야 하는 고대신을 적으로 두고 있는 마당에…….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내부의 적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전쟁이 터져도 끝까지 제국에 충성하다가 죽는 충신도 아니고,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이 자꾸 손톱 아래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렸다.
크라이어는 올리비아가 멀찍이 밀어둔 서류를 집어 들고 살피며 입을 열었다.
“보통 그런 경우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시한부이거나.”
“뭐?”
“사람이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기 시작하면 말이야.”
“아아, 그런 경우…… 뭐? 시한부?”
올리비아가 토끼눈을 뜨며 귀 끝을 쫑긋거리자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시한부이거나, 혹은 이제껏 준비해왔던 큰 계획의 준비가 끝나서 실현 단계인 거지.”
“둘 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전제인걸?”
“이런 일이 있기 전에는 존재감이 없다고 할 만큼 어떤 일에도 나서지 않는 자라고 하지 않았나.”
“칩거라고 할 만큼 저택에서 나오는 일이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야. 하인데르 후작가는 꽤 큰 가문이고 당연히 그에 따른 의무도 많거든.”
“그러고 보니 가진 것이 많은 자일수록 일도 많이 해야 한다, 라고 했던가?”
언젠가 읽었던 볼셰이크의 역사서 중 아주 대문짝만한 크기로 굵게 표시되어 있던 문구였다.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에 광기가 반들거림과 동시에 마른 웃음이 터졌다.
“그럼! 가진 게 많은 만큼 짊어져야 하는 일도 많아야지! 그게 바로 제국의 근간이야! 그러니까 내가! 어? 내가! 매일매일 이렇게 서류의 산맥을 파고 또 파서 없애버리고 있잖아!”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격해지다 마지막에는 거의 실성한 듯 웃음기까지 섞여 있었다.
누구든 그녀의 집무실에서 하루 이틀 정도 같이 보내다 보면, 올리비아가 왜 저러는지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해도 해도 끝없이 밀려오는 서류와 끝나지 않는 일의 파도를 아주 뼛속 깊이 체험할 수 있을 테니까.
심지어 이렇게 일에 치여 피골이 상접하는 이는 비단 올리비아뿐만이 아니었다.
볼셰이크는 대대로 그래왔으니까.
“대체 우리 조상님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볼셰이크는 대대로 회귀, 빙의, 환생, 차원 이동까지 골고루 하고 세상의 일이란 일은 다 끌어모아 처리하는 걸까.”
서글픈 듯 중얼거린 올리비아는 집무실에 쌓인 서류 더미를 멀거니 바라보다 제 아래에 문신처럼 짙게 자리 잡은 그림자를 긁적였다.
“저게 오늘 다 처리해야 되는 거라니! 내일 세계 멸망을 해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반드시 오늘 해야만 하는 일이라니!”
“그러다 뒤로 넘어간다.”
“넘어가긴 어디로 넘어가, 지금 나 앉아 있는 곳 안 보여?”
다친 발 때문에 소파에 푹 파묻혀 쌓인 서류를 책상 삼아 일을 하던 올리비아가 눈가가 벌게진 채 외치자 크라이어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마치 고양이를 진정시키듯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눈을 덮었다.
미지근한 온기와 함께 익숙한 향기,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거의 뒤로 넘어갈 듯 숨을 헐떡이던 올리비아의 호흡이 서서히 고르게 변하자 크라이어가 속삭였다.
“대체 이 작은 머리로 뭘 그리 많은 생각을 하는 건지, 이마가 펄펄 끓는군.”
“골치가 아파서 그래.”
“이만큼 열이 나는데 조금 쉬는 게 어떤가.”
언젠가 그의 곁으로 가지 않겠다던 결심은 이미 잊은 건지, 이전처럼 그가 의식되지 않아서 그런 건지 올리비아는 거리낌 없이 그의 서늘한 손에 제 눈을 부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쉬어도 일은 그대로잖아. 대신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뜩이나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해서 억지로 앉힌 보좌관을 또 울게 만들 순 없어.”
평범하게 생각하면 황제와 황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보좌관의 자리는 대단히 영광스럽고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겠지만, 볼셰이크 제국에서는 아니었다.
황족이 치여 죽을 만큼 일을 하는데, 보좌하는 사람은 어떻겠나.
올리비아가 길게 내쉰 한숨이 그의 손날을 간지럽히자 크라이어는 반쯤 충동적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