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부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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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부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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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부족한가.
2022.04.04.
“아, 그것도 기억에 없나? 폐기된 기록이란 대륙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이들을 아예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거야.”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올리비아가 빈정거렸다.
“당신이 자유가 되고 잠자는 고대신이 계속 잠이나 자면, 마법사의 딸이 그 폐기된 기록이 되겠지.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콧김을 훙, 하고 내뿜은 올리비아가 입을 열려다 멈칫했다.
크라이어가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으니까.
가뜩이나 목이 말랐는데 한바탕 말을 쏟아낸 그녀는 팔을 쭉 뻗다 못해 부들부들 떨며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한 끗 차이로 닿지 않았다.
답답함과 갈증을 참지 못한 올리비아가 아예 몸을 틀어 다시 팔을 뻗으려는 찰나.
“그런 식으로 움직여서 발목이 비틀린 거군.”
크라이어는 생각에 잠긴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찻잔을 건넸다.
“다친 다리에 체중을 그렇게 실으면 아픈 곳을 피하려고 본능적으로 다른 부분을 무리하게 사용하기 마련이지.”
그가 건넨 찻잔을 쥐고 달게 마신 올리비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꼼짝도 하지 않을게. 나도 더 아프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빨리 낫고 싶어.”
항복 의사를 밝히는 올리비아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순식간에 비어버린 그녀의 찻잔을 가득 채워준 크라이어가 소파의 암레스트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만약에 말이야.”
“응?”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폐기된 기록이라면, 과거를 찾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답지 않게 꽤 고심해서 꺼낸 말에 올리비아는 찰나의 고민도 없이 부정했다.
“상관없어.”
너무나도 간단하고 지나치게 단호한 답에 크라이어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내가 당신이 필요하니까.”
거짓 한 조각 섞이지 않은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진실로 그녀는 그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생애 처음으로 남의 바짓가랑이까지 잡으며 애원도 하지 않았던가.
크라이어는 말문이 막힌 듯 그림자에 반쯤 먹힌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올리비아는 태연하게 찻잔을 마저 비워냈다.
“내가 폐기된 기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지 않은 건가?”
분명 대륙에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기에 존재조차 말살해 버렸다는 것이 폐기된 기록이라 하지 않았나.
저 말을 어떻게 해석해도 도저히 ‘상관없다’라고 넘어갈 문제가 아닐 텐데.
“뭐, 밝혀지면 대륙 공적으로 지정되고 온 대륙의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달려들겠지.”
폐기된 기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순간 대륙의 공적이 되어 쫓겨 다닐 것이 뻔했지만, 올리비아는 진정으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 건 이미 지난 생에서 당신이 다 했던 거고, 이제 나도 있는걸, 뭐.”
“그렇게 간단하게…….”
“간단해. 그리고 아주 단순하지.”
올리비아는 그가 건네주고 그가 채워준, 이제는 그녀가 전부 비워버린 찻잔을 꼭 쥐고 크라이어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
그가 아니라면 이번 생에서도 똑같은 죽음을 맞을 테니까.
게다가…….
“만에 하나, 당신이 폐기된 기록이라면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폐기될 만한 짓을 저질렀을 테니 당연히 이유가 있을 테지.”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런 일을 저질러야만 했던 이유 말이야.”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올리비아는 가슴을 활짝 펴고 작은 주먹으로 탕탕 두드리며 당당히 답했다.
“당신이잖아!”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그를 향한 근거도, 근원도 알 수 없는 끝을 모르는 믿음.
‘당신을 믿지.’
그리 말하며 자신을 가리켰던 순간의 그녀의 푸른 눈은 푸른 섬광이 되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당신이 필요해.’
크라이어는 서서히 아릿해지는 심장의 통증을 느끼며 물었다.
“내가 진실로 폐기된 기록이고, 그 사실이 대륙 전체에 알려져 온 대륙을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지 않나.”
“대륙을 적으로 돌리지, 뭐. 세계 평화, 그러니까 고대신에게 정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 이 한 몸 부서져라 일하고 있지만, 대륙이 당신을 적대한다면, 나에게도 대륙은 적이 될 거야.”
그리고 지금, 전 대륙을 적으로 돌린다 해도 자신을 택하겠다는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의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심장이 저 위에서 저 아래까지 떨어지는 순간, 낙인이 불타는 듯 지글거렸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그 어느 쪽도 기껍다는 듯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눈가를 길게 접으며 웃고 있었다.
그는 올리비아가 야무지게 물어뜯었던 제 어깨를 매만지며 입술을 뗐다.
“대륙 전쟁을 막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 물론 그런 거국적인 뜻도 있긴 하지만, 네 번이나 죽고 나니 일단 나 먼저 살고 봐야겠더라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제 몸보신을 주장한 올리비아는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만약 대륙이 당신을 공적으로 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 싹부터 내가 싹 다 뽑아버릴 거야. 내가 그 정도 능력은 되거든.”
그녀의 말은 결코 허세나 허풍 따위가 아니었다.
대륙에서 유일한 제국. 대륙과 함께 시작된 가문인 볼셰이크의 제국.
그 제국의 유일한 황녀이자 차기 황제인 올리비아는 폐기된 기록 한둘쯤 지워버릴 수 있을 권력과 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제까지 계속 당신한테 죽었다는 소리하고 대륙 전쟁에서 형편없이 졌다는 소리만 해서 나의 제국이 하찮거나 힘이 없는 게 아니야.”
올리비아의 자부심 가득한 말에 크라이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제국의 황녀궁에서 지내면서 보고 느끼는 것들 전부가 ‘얼마나 제국이 대단한가’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대륙 전체의 지배자를 모으는 대회의를 사전에 말도 없이 당겨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거기서 올리비아가 그를 지목해 데리고 간다고 모든 나라에서 젊은 기사, 아니 그럴듯한 부군 후보를 우르르 보내지 않았던가.
아마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올리비아의 손짓 한 번과 말 한마디만으로 대륙의 작은 왕국 정도는 지워버릴 수 있으리라.
크라이어는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속삭였다.
“나를 지켜주겠다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군.”
“기억도 없으면서.”
그의 손끝이 닿은 곳부터 간질간질거려 올리비아는 일부러 툴툴거리며 내뱉었다.
“기억하는 한 처음이라면.”
그에 크라이어는 귀 뒤로 넘긴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글 감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부족한가.”
별것도 아닌 말인데도 은근한 그의 목소리 때문인지, 머리칼 끝에 느릿하게 감기는 손가락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검붉은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봐서는 안 될, 아니, 봐도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숨이 막히도록 진득한 감정 때문인지.
그렇게나 차를 많이 마셨는데도 올리비아는 순식간에 바싹 목이 말라 입만 뻐끔거리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여기군요.”
코끝까지 덮었던 로브 후드를 살짝 젖힌 앙브흐가 주변을 살피자, 아이작이 얼른 그녀의 로브 후드를 도로 끌어내리며 말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아, 절대 벗지 말라고요? 알아요. 벗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살짝 올리시는 것도 안 됩니다. 가뜩이나 코 아래쪽에 드러난 부분만 봐도 귀하신 분이라는 티가 나니까.”
콧방울도 다 덮어버린 후드로 인해 밖에서 보이는 건 고작해야 입술과 턱선뿐이건만, 과장이 심하다는 생각에 앙브흐가 입을 열려는데 아이작이 빨랐다.
“피부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런 곳에서 그런 피부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애초에 변장을 좀 하고 오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더럽게 보이려고 뭘 좀 바르긴 했잖아요.”
“그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니까요.”
티격태격하던 둘의 주위로 슬금슬금 음침한 인상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기에 아이작이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스걱.
그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이의 얼굴에 가로로 긴 선이 생기면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얼굴에서 피를 흘리던 이는 그 피가 뺨을 흠뻑 적시고 턱을 따라 땅에 떨어진 후에야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피 냄새에 민감한 이들의 코가 벌름거리기 시작했고, 다가서던 이들 모두가 멈춰 서거나 그대로 뒷걸음질 쳤지만, 누구도 비명을 지르거나 악을 쓰며 달려들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생존본능에 충실하게 살아온 이들이었기에 그들 앞에서 로브 후드를 걷어내 얼굴을 보인 여우 눈으로 웃고 있는 남자가 내뿜는 죽음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았으니까.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에게 다가섰던 이들 중 살아서 돌아갈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기에 그들은 빛을 본 바퀴벌레처럼 흩어졌다.
앙브흐 역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 눈을 가린 건 아니었기에 그 모든 일을 뻔히 보고 있었다.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남자가 신음을 삼키며 물러가고 땅에 떨어진 핏방울과 둘만 남은 자리.
앙브흐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강한가요?”
“아니요.”
“강한 거 같은걸요?”
“강하다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저는 강한 축에는 못 듭니다. 잔재주는 잘 부리지만요.”
“저게 잔재주라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앙브흐가 핏방울이 아니라 아예 핏자국이 남은 땅을 가리키자 아이작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보다 일단 이 집에 누가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안쪽에서 인기척은 느껴집니다.”
아이작은 고개를 살짝 들어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을 흘긋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이고, 발걸음이 아주 가벼우니 어린애거나 마른 성인이겠군요.”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며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앙브흐가 감탄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예요?”
“벽이 얇아서요. 이 주변 집은 거의 다 이런 식입니다. 아마 황궁의 기사가 주먹으로 내려치면 집 전체가 무너질 겁니다.”
“네? 무슨 종이로 지은 집도 아니고.”
“이 집이 그만큼 형편없고, 황궁의 기사가 그만큼 강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무튼 사람이 있어 그냥 들어갈 수는 없으니 일단 문을 두드릴까요.”
그가 손을 들자 앙브흐가 손목을 잡아 내리며 방긋 웃었다.
“이런 노크는 제가 하는 편이 상대방의 경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되겠죠?”
“현명하시군요.”
순순히 물러나긴 했지만, 아이작은 본래 자신의 계획이 조금 미뤄지는 것뿐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