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네가 날 후궁으로 들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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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네가 날 후궁으로 들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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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네가 날 후궁으로 들였잖아.
2022.03.31.
반쯤 넋을 잃고 집무실로 돌아온 올리비아는 푹신한 소파에 몸이 푹 파묻힌 후에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힘없이 손을 휘저어 마른 목을 축이려던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으며 반사적으로 붕대로 감긴 제 발을 잡고 웅크렸다.
“으윽.”
“벗고 있지 말라고 해서 옷을 입고 왔더니…… 정말이지 한시도.”
“눈을 못 떼겠다고? 됐으니까 이것 좀 어떻게 할 수 있어?”
웅크린 작은 등 위로 옅은 한숨과 함께 크라이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리자 올리비아는 그의 말을 끊으며 끙끙 거렸다.
“잠시 아플 거다.”
“지금보다 더 아플까. 방법이 있다면 그냥 해줘.”
“참을 수 없다면 그냥 물어.”
그리 말한 크라이어는 곧바로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붕대로 감긴 가는 발목을 쥐었다.
“뭐? 물긴 뭘 물어? 왜 전하고 달리 이렇게 가까이 오는…… 악!”
올리비아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바로 앞에 있는 크라이어의 어깨를 콱 물었고, 그는 제 어깨를 조금 더 들이밀며 속삭였다.
“잠시면 되니까.”
일 초가 천추 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너무 아픈 나머지 생리적인 눈물을 방울방울 매단 올리비아의 코가 빨갛게 물들 무렵.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발목까지 살짝 비틀린 거지. 제대로 맞췄으니 오래가진 않겠지만, 통증이 심했을 거다.”
“으으.”
여진 같은 통증에 그의 어깨에 이빨을 박은 채 눈을 꾹 감고 있던 올리비아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귓바퀴를 타고 웃는 듯 진동하는 크라이어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괜찮아졌나.”
“그…… 으, 후우. 괜찮아. 솔직히 말하면 그냥 아릿한 정도야. 뒤꿈치가 문제가 아니었구나.”
물고 있던 어깨에서 입을 떼어낸 그녀는 눈가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방울을 그 위에 톡톡 떨어뜨리며 답했고, 크라이어는 곧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하얀 붕대로 감긴 제 발을 노려보는 올리비아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는 제 어깨를 흘긋 살핀 후 입을 열었다.
“그나마 맨살을 물게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라고 할게.”
그의 어깨에 번진 얼룩을 본 올리비아가 민망한 듯 마른 웃음을 흘리다 멈칫했다.
“셔츠는 어디에서 가지고 온 거야?”
“사용인이 늘 여분으로 준비해두더군.”
“내 집무실에? 당신 셔츠를?”
“그래.”
뭐야, 그거. 왜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거야?
왜 내 집무실에, 황녀의 집무실에 당신 옷 여분이 있는 거야?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폭풍을 만난 나비의 날개처럼 정신없이 팔랑거렸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크라이어는 그녀의 주름진 미간을 톡 두드리며 덧붙였다.
“네가 날 후궁으로 들였잖아.”
“아니잖아!”
후궁의 ‘후’ 자가 튀어나온 순간 올리비아가 바락 부정했지만, 크라이어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가능성도 대비하는 게 우수한 황궁 사용인의 소양이겠지.”
“그런 가능성이 어디 있어! 없어! 없잖아?”
어이가 가출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한 계단 올라갔지만, 크라이어는 피식 웃기만 했을 뿐.
그의 반응에 또 무어라 말을 하려던 올리비아는 그만 힘이 쭉 빠져 소파에 다시 푹 파묻혔다.
그녀는 이제 발이 아니라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낙인 말이야.”
뜻하지 않게,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어쨌건 크라이어의 벗은 몸을 봐버린 올리비아는 그의 쇄골 근처에 박혀 있던 낙인을 그제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얼이 빠진 채 그에게 안겨 달랑달랑 다리를 흔들고 집무실로 돌아가던 중 무심결에 돌린 시선에 그의 낙인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낙인을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리라.
그가 ‘노예 낙인’이라고 처음 보여줬을 때는 그 낙인을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낙인을 거의 파내듯 긁어내렸고, 그를 막기 바빴으니까.
“낙인?”
낙인에 통증을 일으키는 올리비아가 낙인을 언급하자 크라이어는 돌아서서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리다 멈칫했다.
“응. 혹시 그 낙인이.”
-똑똑.
올리비아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들려온 노크 소리에 둘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크라이어는 사용인이 가져다준 셔츠로 갈아입었고, 올리비아는 예비용 셔츠를 정갈하게 집무실 안쪽에 두고 가는 사용인의 뒷모습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았다.
딱 필요한 일만 정확하고 우아하게 처리한 사용인이 사라진 자리.
“저 예비용 셔츠 정말…… 후우,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올리비아가 단숨에 가라앉은 표정으로 차분하게 물었다.
“낙인을 가진 사람 말이야. 일단, 마법사는 낙인을 찍은 장본인이고 그 딸도 참여했으니 없을 테고.”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는 비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고 하더군. 정확히 말하면 ‘전사’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게 무슨 말이야, 전사만 낙인을 찍는다고? 그리고 전사가 아니고 뭔데, 그것들은.”
“신전에 비유하면 사제라고 할 수 있겠군.”
“아…… 중앙 신전에서 대륙의 안위만을 기원하며 정진하는 사제들이 다 뛰어나올 소리네.”
올리비아는 소름이 돋은 양팔을 문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 낙인이 있는 사람은 당신뿐인 거지?”
“현재로서는.”
“뭐?”
“말 그대로다. 현재로서는 내가 고대신의 유일한 ‘전사’라고 하더군. 하지만 내가 첫 번째라고 말한 적도 있으니 향후에는 노예가 몇 명 더 생길 수도 있겠지.”
크라이어가 입을 다물기 무섭게 올리비아의 미간에 아주 깊은 계곡이 세 줄 생겼다.
그녀는 뭔가 아주 끔찍한 것을 떠올렸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크라이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할 말이 많은 것 같은 얼굴인데.”
“많은 건 아니고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얼마든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크라이어는 읽고 있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았다.
“전에 당신이 그랬잖아. 낙인으로 인해 강해지는 건 아니라고. 그럼 그냥 당신 자체가 강한 것뿐이니까, 같은 낙인이 찍힌 사람이 나타나도 설마 당신만큼 괴물은 아니겠지?”
크라이어는 질문을 질문으로 답해주었다.
“그건 네 쪽이 더 잘 알지 않나?”
“내가 어떻게 알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를 향해 목을 빼는 올리비아의 이마를 눌러준 크라이어가 답했다.
“회귀 전에 나보다 더 강하거나 나와 동등하게 강한 놈이 있었나?”
“아…….”
그의 말에 그제야 지난 네 번의 생을 되감아 본 올리비아는 급격히 편안한 얼굴이 되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없었어. 당신이 유일무이했지. 전쟁터에서 올라오는 보고에서 당신 이름 외에는 딱히 끔찍하게 압도적인 것을 본 기억은 없거든.”
“끔찍할 정도였나.”
결코 진지하지 않은, 약간의 웃음기가 섞인 말에 매우 진지한 답이 돌아왔다.
“내가 이제까지 당신 성과를 황궁 성벽을 단칼에 무너뜨린 것만 앵무새처럼 반복만 해서, 잘 실감이 나지 않나 본데.”
올리비아는 첫 번째 삶의 대륙 전쟁에서 그가 전장에 등장했던 날을 절대 잊지 못 한다.
‘전쟁을 일으킨 자라고 했었지. 노르덴 국의 기사라고?’
‘네. 폐하.’
‘절대 용서할 수 없다. 필히 죽여 없애야 할 자가 아닌가! 전력을 다해 죽여라!’
황제의 노호성에 전장으로 나서는 이들은 비장하게 나섰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물론이거니와 제국민, 아니 전쟁을 일으킨 이들을 제외한 대륙 사람들은 모두 믿고 있었다.
전장의 승리는 물론이거니와 황제의 명으로 출전한 제국의 가장 뛰어난 기사단이 그의 목을 잘라 오리라는 것을.
하지만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엉망진창이 된 채 돌아온 전령의 입에서 내뱉어진 건 승전보가 아니었다.
‘커, 커헉. 폐……하. 졌, 습니다. 졌어요. 다 죽었…….’
마지막 말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전령은 그대로 고꾸라져 숨이 끊어졌고, 그 자리에는 무덤 같은 적막이 들어찼다.
당연하게도 제국은 한 번 패했다고 항복을 고려하지 않았다.
올리비아 역시 첫 번째 삶이었기에 전쟁을 포기하지 않고, 승리를 위해, 제국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크라이어를 처단하려 의욕을 불태웠었다.
하지만 그 의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연이어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크라이어 단 한 사람이 전장 전체를 폭풍처럼, 어느 때는 해일처럼, 또 어느 때는 모든 것을 살라 먹는 불길처럼 모조리 씹어 먹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니까.
“그러고서는 뭐, 말했다시피 곧바로 제국의 황궁이 한 번에 펑!”
입 모양과 함께 손바닥을 오므렸다 활짝 편 올리비아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생에서 크라이어가 벌였던 어마어마한 일들을 줄줄 쏟아냈다.
“그만.”
한창 이야기를 하던 올리비아의 미간을 톡 두드린 크라이어가 말했다.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과거 회상은 그만하고, 이제 날 좀 봐.”
“어? 아.”
흐릿한 하늘처럼 뿌옇게 물들었던 푸른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그 안에 온전히 자신의 모습이 담기는 것을 확인한 크라이어의 입매가 풀어졌지만, 올리비아는 아직 과거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그의 팔을 퍽퍽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만약 당신 같은 괴물이 한 명만 더 있었다면 대륙 전쟁은 시작과 동시에 끝났을 거야. 뭐…… 당신 하나만으로도 거의 그런 꼴이긴 했지만.”
“대륙 전쟁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몸이 열 개도 아니고 나 하나만으로 전쟁이 그리 빨리 끝났을 것 같지 않은데.”
지극히 상식적인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는 그를 때리는 주먹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물론, 크라이어에게는 솜방망이로 톡톡 두드리는 정도로 느껴졌을 뿐.
“그런 상식이 통했다면, 제국이 당신 한 명한테 멸망을 했겠어? 당신 정말 뭐 하던 인간이야! 역사 학자들이 아무리 뒤져도 당신하고 비슷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고!”
“그런 걸 알아보고 있었나.”
“과거를 알 수 있다면, 고대신 강림인지 정화인지 나발인지 마법사, 는 죽었으니 마법사의 딸이 뭔가 하기 전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나잖아. 심지어 당신의 과거니까.”
말을 와르르 쏟아낸 올리비아가 헉헉거리자,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온 것이 없어 실망했겠군.”
올리비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실망하다 마다. 실망했다 뿐이겠어? 너무 수상해서 폐기된 기록이 있는지 샅샅이 뒤져보라고 명령했지.”
“폐기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