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참지 말고 나에게 말해.2022.03.28.
“바지는 챙겨 입었잖아.”
“위에도 챙겨 입으라고!”
숨 쉴 틈도 없이 따박따박 돌아오는 답에 정말로 숨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크라이어가 입을 다물었다. 내려앉은 침묵 때문인지 분명히 천 너머로 닿는대도 그의 맨살이 느껴지는 것 같아 올리비아는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에게 허리가 잡혀 있었기에 시도는 시도로 끝났을 뿐.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라.”
오히려 배를 감싼 팔에 힘이 더 들어가며 그가 더 바짝 다가섰다.
“당신이야말로 움직이지 말아 봐.”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지는 게 아니라 표백된 듯 하얗게 질린 올리비아가 이마와 눈가를 제 손으로 덮으며 아연한 숨을 흘렸다. 물기에 젖은 그의 머리칼 끝에서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때문에 그녀의 둥근 어깨는 이미 물 얼룩이 든 지 오래였다. 축축해진 그 부분의 감촉에 신경을 집중하면서 올리비아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당신…… 설마 평소에 이러고 궁을 돌아다니는 건…… 아니지?”
“내가 네 곁에 있지 않은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네가 보는 게 내 평소 모습이다.”
“그건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올리비아의 귀가 별안간 빨갛게 물들었다. 그의 맨가슴에 코를 박고도 빨개지지 않았건만, 그의 ‘일상’이 전부 자신과 함께라는 사실을 입에 올리자 귀는 물론이고 뺨까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말 그대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던 크라이어는 뭐라 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맨몸과 더운 체온이 닿은 건 기겁하면서 고작 말 한마디에 심장 고동이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고 귀가 붉어지다니. 올리비아는 달아오른 뺨을 식히려 짧게 숨을 끊어 쉬며 다른 것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그래, 아픔. 차라리 뒤꿈치 통증에 신경을 쓰자. 하지만 그가 제 허리를 잡고 지탱하면서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뒤꿈치의 고통이 현저히 줄어들어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이리저리 정처 없이 헤매던 푸른 시선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에 닿았다. 제 배를 감싸 당긴 크라이어의 쇠를 두드리듯 단단한 팔에 불거진 핏줄을 멍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핏줄 중간을 꾹 눌렀다. 손끝을 경계로 핏줄이 갈라지기 무섭게 머리꼭지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뭐 하는 거야.”
그와 맞닿아 있어 진동이 고스란히 올리비아의 몸에도 전해지자 어쩐지 속이 간질거리고 울렁거리는 느낌에 그녀는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린애도 안 할 짓을 한 스스로를 향한 자괴감과 여전히 뒤쪽에서 전해지는 선연한 온기에 올리비아는 널린 이불처럼 그의 팔에서 축 늘어졌다. 배가 한껏 눌린 상태에서 입을 연 그녀는 한 것도 없이 진이 다 빠졌다. 아니, 한 건 있었지. 망할 산책을 아주 조금.
“나 좀 데려다줘.”
크라이어는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올리비아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고요한 궁의 복도를 가로지르며, 멍하니 딴생각을 하던 올리비아의 귓가로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왜 나와 있던 거지?”
“아, 산책을 좀 하려고 했지.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부터 어깨까지 쑤시기 시작…… 음…… 아무튼 산책을.”
별다른 생각 없이 답을 꺼내고 보니 구태여 남들에게 할 만한 말은 또 아니라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자신이 입을 다물고 찾아온 찰나의 침묵에 어쩐지 견딜 수 없게 된 올리비아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고, 검술 수업도 아예 쉬고 있으니까…….”
“발이 나을 때까지 산책하고 싶으면.”
“으응, 참아 볼게.”
크라이어의 말의 중간을 싹 자르고 고개를 끄덕이던 올리비아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멈칫했다.
“참지 말고 나에게 말해.”
말하면 뭐? 이렇게 안고 다닐 생각인가? 안고 다니면 무슨 산책이야? 아니, 산책은 맞지만 내가 필요한 건 그런 용도의 산책이 아니잖아? 내 다리로 움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데? 아니, 바깥바람을 쐬는 것으로도 충분한가? 그거야 창문을 열면 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집무실 공기랑은 다르……. 삽시간에 난장판이 된 그녀의 머릿속과는 달리 올리비아의 입술은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꾹 다물려 있었다. ***
“늘 가족에게 돈을 보내느라 돈에 쪼들렸다고?”
타렌저에서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춘 사용인을 추적하던 앙브흐와 아이작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의 조사는 거창하거나 대단히 비밀스럽지 않았다. 타렌저에서 일하던 사용인을 타렌저의 차기 주인이 알아보고자 하니, 거칠 것이 없었으니까. 기실 앙브흐는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저택의 사용인들을 불러들여 편하게 조사할 수 있었지만, 단호하게 발로 뛰겠다고 선언했다.
‘집무실에서 나가고 싶어요!’
참으로 단순하지만, 그녀 주변을 둘러싼 서류 더미를 보니 꽤 절박한 이유라 아이작은 군말 없이 그녀와 함께 저택을 휘젓고 다녔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진, 불성실하다는 인상이 강했던 사용인의 조사는 지극히 순조로웠기에 금방 끝이 났다. 앙브흐는 사용인이 돈 문제에 시달렸다는 다른 이들의 말에 볼을 부풀렸다.
“타렌저의 봉급이 그리 박정하지는 않을 텐데요!”
“일정한 수입원이 있으면서 빚에 깔리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작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첫째로 도박이고 둘째로는 주변에 빈대가 많은 것이지요.”
“둘 다인 경우는 없나요?”
착한 학생처럼 손을 번쩍 든 앙브흐의 질문에 아이작은 여우 눈을 휘며 웃었다.
“그렇다면 안정된 수입을 받기 전에 죽어 없어졌을 겁니다.”
“과연 그렇군요!”
차갑다 못해 따가운 현실을 웃으며 말하는 아이작이나, 그에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앙브흐나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끼리끼리 논다. 라는 감상이 절로 흘러나오게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사용인 사정이 간단하면서도 복잡하군요.”
삼각관계에 의한 치정 문제에 돈, 아니 빚 문제까지.
“이건 잠적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 같은데요.”
아이작이 이제껏 수집하여 정리한 실종된 사용인에 관한 자료를 휙휙 넘겨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새 그의 팔 한쪽에 달라붙어 어깨너머로 그 자료를 같이 보던 앙브흐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실종인지 잠적인지 결론 내리지 않고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조사하라! 맞죠?”
“네, 뭐 그런 겁니다.”
“좋아요! 이제 사용인들의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 제일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에게로 가죠.”
앙브흐가 앞장서자 아이작은 능숙하게 그녀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이제껏 사용인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녀의 그림자에 녹아들어 이런저런 질문을 첨가했었다. 그가 대놓고 앙브흐와 붙어서 저택을 돌아다니려면,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정문을 거치지 않고 차기 타렌 후작의 집무실에 들어간 손님’이라는 아이작의 정체라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와 마주한 앙브흐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그 사용인이 돈 문제를 겪고 있다고 들었어. 사소하게 일으켰던 문제들도 돈에 관한 것이었어?”
“아, 아니요. 돈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돈에 쪼들리고 있었다면 사람 자체에 여유가 없었을 테니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부딪친 이유는 알겠군요.”
“도박 문제는?”
“그런 쪽은 철저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중독된 이들은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니까요.”
도박이건 술이건, 무언가에 눈이 먼 이들이 저택 내의 기물을 겁도 없이 빼돌리는 것으로 골치를 썩이던 귀족 가문들은 사용인들의 사생활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중독’에 관한 것은 엄격하게 막았다. 타렌 가문도 예외는 아니라 사용인을 뽑기 전이나, 그들이 일하는 기간 사이사이 정기적으로 그런 것들을 알아보고 있었다. 단호한 집사의 답에 앙브흐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림자 속의 아이작에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일까요?”
“네?”
“아냐, 도박이 아니라면 가족 관계는 어때?”
“그에게는 다른 가족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뭐? 그럴 리가.”
곧바로 나온 앙브흐의 강한 부정에 집사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침착하게 덧붙였다.
“사용인의 가족들을 최대한 배려하며 챙기고는 있지만, 숨기려고 하는 이들의 제반 사정까지 전부 캐내지는 않아서요. 그가 가족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면 제가 모를 수 있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집사의 말에도 앙브흐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런 그녀의 기색에 집사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비장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도 제가 누굽니까.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문의 사용인들에 관해서라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닙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뭐든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집사의 조금 훤한 정수리에 돋은 힘줄을 어둠 속에서 내려다보던 아이작은 조금 숙연한 기분이 되었다. 집사는 자의로 자신의 타의로 앙브흐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다는 동질감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잠깐 방심한 사이에 말려들어 꼼짝없이 앙브흐와 함께 조사를 하고 있지 않나. 순진한 얼굴과 천진한 목소리로 사람 부리는 게 아주 거칠기 짝이 없는 아가씨다. 역시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아이작의 여우 눈이 크라이어를 떠올리며 흐릿해질 무렵.
“아!”
뭔가 찾았다는 듯한 탄성과 함께 집사는 양팔로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두껍고 무거운 책을 질질 끌고 왔다.
“여기 보이십니까?”
“응. 이건 급료 명세서야?”
“네. 사용인들의 급료와 급료 외의 지급금을 기록한 책입니다. 여기를 보시면, 급료를 미리 가불해 간 적이 있군요. 그때의 사유가.”
집사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던 앙브흐의 시선이 반짝 빛났다.
“가족 사정이네. 그리고 그 사용인 귀족이었잖아?”
선명히 적힌 ‘르위르’라는 성에 타렌가의 후계자인 앙브흐의 머릿속 한쪽이 맹렬히 돌아갔다.
“아아, 우리 가문에 빚을 진 곳이었네.”
제국의 돈줄이라고 불리는 타렌가에 빚을 지고 있지 않은 가문을 찾기 힘들지만, 그중에서도 지나치게 많은 빚을 져 더는 가문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도 흔하진 않지만 분명 존재했다. 아마도 르위르 역시 그런 사정으로 가문이 공중 분해되는 대신, 껍데기만 남기고 타렌가에 일정 기간 묶여 노역을 제공하는 식으로 빚을 갚아 나가고 있었던 모양새였다. 앙브흐는 찰나에 장부에 적힌 ‘르위르’에 관한 것을 모조리 외웠고, 구부렸던 몸을 펴며 외쳤다.
“말한 대로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튀어나오네요! 가죠!”
“네?”
느닷없는 앙브흐의 말에 집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지만, 그녀는 해맑은 얼굴 그대로 어딘가를 보며 재차 외쳤다.
“거주지가 명확히 적혀 있지는 않지만, 그 가문의 근거지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리로 가면 될 거예요. 출발!”
그렇게 대체 누구와 대화하는지 모르게 허공에 대고 재잘재잘 떠든 앙브흐는 집사를 향해 밝게 미소했다.
“역시 집사야! 믿음직스럽다니까.”
군더더기 없는 치하에 반사적으로 올라간 입꼬리를 단속하며 허리를 숙였던 집사가 고개를 들자 앙브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가씨……. 대체 누구한테 가자고 하신 겁니까.”
홀로 남은 집사는 앙브흐의 혼잣말인지 뭔지 모를 것에 혼란과 걱정을 담은 얼굴로 활짝 열린 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