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왜 벗고 있어!2022.03.24.
그는 기감을 단숨에 확장시켜 한 사람의 기척을 더듬었다. 저보다 한참이나 작고, 가볍지만 그 걸음걸음이 흔들림 없는 이 궁의 주인. 그의 시선이 과거를 헤맬 때와는 달리 잘 갈려진 검날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순간, 그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
“아…… 아아, 괜히 나왔네.”
저절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혀끝으로 누른 올리비아는 한 발을 질질 끌고 간신히 벽에 기댔다. 고목 나무에 매미처럼 차가운 벽에 딱 붙은 그녀는 찡, 하고 올라오는 뒤꿈치부터 시작된 통증에 신음을 흘리다 마른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왜 나온 걸까. 아니,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납득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움직였을 뿐이다. 뒤꿈치가 아주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다 새카맣게 변했지만, 어쨌건 치료도 했고 진통제도 삼킬 만큼 삼켜 고통도 거의 없었으니까. 본래 일을 하면서 적어도 한 시간에 한 번쯤은 일어나 책상 주위를 서성거리기라도 했다. 그러지 않으면 어깨부터 시작된 통증이 뒷머리로 번져 지독한 두통을 유발했으니까. 하지만 발을 다친 탓에 계속 앉아만 있었더니 슬슬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엉덩이가 아팠다. 잠시 고민하던 올리비아는 결국 소파 암레스트를 잡고 신중하게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데?’
전처럼 몸을 일으키지도 못할 만큼 아프지 않았다. 아니, 아예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질린 눈으로 붕대가 감긴 제 발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거짓말은 하지 않네…….’
몇 시간 전 삼킨 진통제는 궁의가 만들고 크라이어가 조금 손을 댄 것이었다. 올리비아가 발뒤꿈치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다리에 쥐까지 나서 끙끙거리자 크라이어는 궁의가 놓고 간 진통제를 손아귀에서 굴리며 입을 열었다.
‘전쟁을 네 번이나 겪었다면 고통에는 익숙해졌을 텐데.’
‘그럴 리가. 아픈 건 아픈 거야. 그리고 네 번이나 전쟁을 해도 말이지. 내가 잡혀서 고문당한 적은 한 번도 없어. 뭐, 그때는 왜 포로로 잡지도 않는가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럴 만해. 정화 시킨답시고 대륙 사람들을 다 죽이는데 뭐하러 시간 들여 나 하나 고문을 하나 싶네.’
이어 올리비아는 딱 짚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죽을 때도 늘 당신이 단칼에 보내줬고.’
그런 연유로 올리비아가 고통에는 내성이 거의 없고 역치도 한없이 낮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진통제 말인데.’
그는 궁의가 상세하게 복용 설명을 늘어놓고 간 진통제를 하나 더 집어 들고 손안에서 굴렸다.
‘조금 더 효과 좋게 만들어 줄까?’
대단히 수상하다 못해 평범하게 생각하면 절대 수락하면 안 될 제안이었지만, 올리비아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이어가 자신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으니까. 낯간지러운 맹세도 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모를, 당사자 단 두 사람만이 기억할 맹세. 불현듯 손등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아 올리비아는 얼른 입술을 뗐다.
‘좋아. 효과가 더 좋아진다면 사양하지 않을게.’
선뜻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올리비아는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가 의사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은가. 혹시 의사였다면, 지나치고 쓸데없이 대륙을 정벌할 만큼 강한 의사였겠지. 과연 크라이어는 진통제를 샅샅이 살피더니 별다른 고민 없이 슥슥 몇 가지를 섞고 흔들었다. 기묘하게도 여러 가지 색으로 불투명한 빛깔을 띠고 끈적거리던 진통제 몇 개가 그의 손을 몇 번 거치자 곧 투명하고 맑게 변했다. 그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물었다.
‘알고 하는 거 맞지?’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나는 대로 조합한 거다.’
언뜻 말이 안 되는 그의 말에 함축된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어차피 믿기로 한 거 망설임이 없으니 좀 더 믿음이 간다고나 할까.
‘자, 마셔 봐.’
작은 병에 압축된 것처럼 담긴 맑고 투명한 진통제를 받아든 올리비아는 지체없이 쭉 들이켰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크라이어가 오히려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조금쯤은 의심할 수 있지 않나. 뭘 믿고 그렇게 대책 없이 막 들이켜는 거지.’
‘뭘 믿긴.’
올리비아는 살짝 쌉싸름한 진통제의 뒷맛에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핥으며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손가락질했다.
‘당신이지.’
크라이어를 향해. 작고 매끄러운 손톱 끝이 그의 가슴팍에 닿을 듯 흔들거리자 크라이어의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한 치의 의심 없이 티끌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과 뭐가 그리 자신만만한 건지 모를 위로 치솟은 도톰한 붉은 입술 끝까지. 아아, 당장이라도 저 손끝부터 잘근잘근 물어보고 싶은데. 혀뿌리 쪽에 침이 고이기 무섭게 그는 제 욕망을 내리눌렀다. 진실로 저 자그마한 황녀를 뼈 채로 씹을 수도 있을 테니까. 게다가 그녀는 지금 한껏 경계하는 토끼와 같지 않은가. 뒤돌아보지 않고 그를 외면한 채 빠르게 걷던 작은 등을 떠올린 크라이어는 검붉은 눈동자에서 부글거리는 것들을 능숙하게 감췄다. 그 변화가 어찌나 빠른지, 제국의 유일한 황녀로 태어나 차기 황제로 훌륭하게 성장한 올리비아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에 크라이어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비틀렸다. 올리비아와 함께 있다 보면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자신의 흔적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하곤 했으니까.
‘어……라? 안 아파.’
조금 전까지 욱신욱신 거리던 통증이 마법처럼 씻은 듯이 가셨다. 결국 그가 대중없이 마구 섞은 것으로 보이던 진통제는 확연하게 궁의가 두고 간 것보다 성능이 좋았고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와 빈 진통제 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이렇게 붕대를 감는 것도 궁의가 처치한 것보다 당신이 한 게 더 편했던 거 같기도 하…… 아냐, 지금 다시 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다가와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가는 발목을 당기는 크라이어에게 올리비아는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순순히 자신의 발목을 놓고 몸을 일으키는 그를 올려다보며, 올리비아가 물었다.
‘당신 혹시 의사였던 거 아니야?’
그녀는 제가 말하고서도 이건 좀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했고, 크라이어 역시 피식 웃으며 부정했다.
‘글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는 죽이는 것에 재능이 있는 거 같은데.’
부정할 수 없는 살벌한 말을 하면서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벽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현실로 돌아온 올리비아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과거에 대체 뭘 한 거야.”
모르긴 몰라도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어쩌면 세상에서도 지워진 그의 과거가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렇게 쓸데없이 잘난 얼굴과 제국 하나를 단신으로 박살 낼 무력을 가진 인간을 뛰어넘는 남자의 기록이 없는 것도 이상하고. 아니, 그 점이 제일 수상하단 말이야. 볼셰이크의 기록은 대륙의 기록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그 방대한 자료를 모조리 다 읽거나 파악한 건 아니었지만, 가문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와 비스름한 이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크라이어가 볼셰이크의 기록을 파 내려가는 사이 올리비아도 가만히 놀고 있지 않았다. 대륙에서 날고 긴다는 역사 학자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였고, 그들에게 물었다.
‘단신으로 대륙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끝낼 수 있는 남자가 있었나?’
역사 학자들은 어렵지 않게 몇몇 전설적인 위인들과 정말로 전설에나 나올 법한 볼셰이크의 선조 몇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런 이들 중에서도 크라이어를 연상시키는 인물은 찾을 수 없었다. 다들 행적이 뚜렷했고, 크라이어 정도 되는 나이에 요절한 이가 없었으니까.
“아니, 요절이 아닌가. 그 정도 초인이라면 일정 나잇대에서 신체 노화가 멈춘다고 했었지.”
나이 차이가 몇백 살 난다는 말이 그가 과거의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실제 나이 차이가 그 정도일 수도 있는 거구나. 그 정도면 할아버지가 아니라 좀 더 먼 조상으로 불러야 하지 않나……. 실없는 생각으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조금이라도 통증이 가시길 기다리던 올리비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무게 중심이 아프지 않은 다리에 모조리 쏠린 탓에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는 제 발뒤꿈치를 확인하려 허리를 뒤틀었다. 하지만 만족스러울 만큼 허리가 돌아가지 않아 낑낑거리며 버둥거렸다.
“으앗!”
뻔하다면 뻔하게도 벽에 짚은 손이 미끄러지면서 올리비아는 중심을 잃었다. 매끄럽지만 더없이 딱딱한 바닥에 얼굴을 박는 것이, 아픈 다리를 더 아프게 만드는 것보다는 낫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한 그녀가 팔로 다리를 감싼 순간.
“정말이지, 눈을 못 떼겠다니까.”
납작한 배가 강건한 팔에 눌림과 동시에 올리비아의 등 뒤로 더운 열기와 익숙한 향기가 훅, 끼쳐왔다.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뜬 올리비아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톡, 토독. 갑작스럽게 목덜미 뒤로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에 그녀는 제대로 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으핫!”
뺨의 하얀 솜털이 바짝 선 올리비아는 마치 털을 세운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며 제 눈앞에 있는 탄탄한 벽, 그러니까 벽만큼이나 딱딱한 크라이어의 가슴께를 꾹 눌렀다. 마른 손바닥에 축축한 살결이 맞닿는 순간, 거의 경기를 일으킨 올리비아가 크게 숨을 들이켰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비명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진정해.”
그녀의 입을 막은 커다란 손 위로 흩어지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았으니까. 평소보다 더 낮은 그의 목소리에는 긁는 듯한 탁성이 섞여 있었고, 올리비아는 목으로 떨어진 물방울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을 선연히 느끼며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이윽고 옅은 한숨과 함께 크라이어가 올리비아를 제대로 세워주었다. 물론 그녀가 한쪽 다리를 거의 쓰지 못했기에 배를 감싸 당긴 팔은 풀지 않고 그대로였다.
“얌전히 집무실에 있는 것 같더니. 왜 나온 거지.”
그에 올리비아는 입을 뻐끔뻐끔거리다 버럭 외쳤다.
“왜 벗고 있어!”
“안 벗고 있다만.”
“벗고 있잖아!”
올리비아를 잡고 있지 않은 팔로 쨍한 귀를 누른 크라이어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