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특별한 동작이나 말로 시작되는 건 아니고.2022.03.21.
“집무실에 계시죠.”
정색하는 보좌관의 답에 앙브흐의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던 입이 조금은 들어갔다. 그나마 아버지가 일을 떠넘기고 휙 떠난 것이 아니라 정말 쏟아지는 서류의 홍수에 함께 갇히기라도 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앙브흐가 정작 하고 싶었던 실종된 사용인에 대한 조사는 미뤄둔 채 서류에 파묻혀 있기를 한참. -똑똑. 노크 소리에 앙브흐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들고 문을 향해 외쳤다.
“들어와!”
하지만 금방 열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앙브흐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뺐다.
“실례합니다. 타렌가의 아가씨.”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린 전혀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쾅! 아니, 일어나려다 책상에 무릎을 거하게 박았다. 만약 올리비아의 발에 감긴 붕대가 방금 전 그녀가 겪은 것처럼 어딘가에 심하게 박아서 생긴 멍을 가리려는 용도임을 알았다면, 앙브흐는 황녀님과 공통점이 생겼다며 눈물 맺힌 웃음을 보였으리라. 하지만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뜻하지 않은 쪼개지는 듯한 고통만 받은 앙브흐는 그대로 서류에 고개를 박고 신음했다.
“어, 저기…… 괜찮으십니까?”
앙브흐가 그 물음에 답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치맛자락을 구겨 잡고 다리를 바들바들 떨던 앙브흐가 간신히 고개를 들고 집무실에 들어온 낯선 이를 확인했다. 노르덴 국에서 저를 끌고 도망치자던 남자. 황녀님을 모시는 이라던, 분명 이름이…….
“아이작?”
“아켄델입니다만, 뭐 아이작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 그가 어깨를 으쓱이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앙브흐가 눈물방울을 매단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앙브흐라고 해도 돼요. 타렌가의 아가씨는 너무 기니까. 그보다…….”
그녀는 아이작이 등진, 감쪽같이 닫혀 있는 창문을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로 들어온 거예요.”
“저쪽으로 왔습니다.”
아이작이 제 등 뒤를 엄지로 가리키는 것을 확인한 앙브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나 했더니, 정말로요?”
“타렌가의 후계자와 정식으로 선약을 잡을 수가 없는 신분이라서요. 부득이하게 이렇게 방문했습니다.”
최대한 상대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했지만, 사실상 무단침입이나 다름없었기에 아이작이 허리를 깊이 숙이고 사죄를 하려던 찰나.
“굉장하네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심지어 앙브흐는 입으로 감탄한 것에 멈추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한 건지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들어올 수 있다면 나갈 수도 있다는 거죠? 타렌저를 이렇게 드나들 수 있다면 웬만한 곳은 다 가능할 텐데! 저도 배우면 가능할…….”
“아니요. 절대 안 됩니다.”
앙브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작은 단칼에 뒷말을 잘랐다. 그는 눈앞의 이 귀하게 나고 자란 높으신 분이 ‘안된다.’라는 것에 대해 무슨 억지를 부리건 받아칠 수 있게 다음 말을 준비했지만, 앙브흐는 산뜻하게 물러났다.
“그렇군요.”
연속으로 예상치 못한 반응에 아이작은 잠시 말을 잃었고, 앙브흐는 아무렇지도 않게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죠?”
심지어 그녀의 질문에는 그의 무단침입을 향한 비난이나 의심도 없었다. 그렇다고 잘못한 사람이 나서서 왜 죄를 지적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제가 모시게 된 분이나 황녀님, 그리고 그분을 모시는 타렌가의 후계자까지 참 이상한 사람들이고, 끼리끼리 모인다는 옛말은 역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 아이작은 앙브흐의 질문에 충실히 답하기로 했다. 정작 그 ‘끼리끼리’에 저 자신도 끼어 있다는 사실은 살짝 덮어둔 채.
“실종된 사용인이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아이작의 설명을 흥미진진한 얼굴로 들은 앙브흐가 서류를 탁탁 내려치며 외쳤다.
“삼각관계인 사람 셋 중 둘이 사라지거나 죽었다니! 이건…… 어라? 이건…….”
앙브흐는 말을 하다 말고 기가 팍 죽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지은 죄가 있는 아이작은 기민하게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마른 입가를 혀로 한번 쓴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걸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이번에야말로 무단침입의 ‘무’자라도 나올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남녀가 여러 명 묶인 사건으로 살인이라니. 이런 일로 고대신이 얽히지는 않을 거 같아요.”
거기까지 들은 아이작은 이제 무단침입에 대해서는 자신도 신경 끄기로 하며 답했다.
“그 편이 낫지 않습니까? 황녀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건이니 암살 가능성도 완전히 지워지고. 평범하게 지나갈 사건이니.”
지극히 상식적인 아이작의 말에 앙브흐는 고개를 저었다.
“황녀님께 도움이 되고 싶었단 말이에요. 신이나 마법사나, 솔직히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도 까마득하고. 마법사만 보면 도망가라고 단단히 당부하셨으니 어디선가 꼬리를 잡을 수 있어야 할 텐데.”
“아…….”
지극히 논리적인 앙브흐의 말에 이번에는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한 이야기는 제 추측일 뿐이고, 사건이 끝난 것은 아니니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그럴듯한걸요.”
“단서를 기반으로 사실을 도출해내야 하지, 예측을 기반으로 사실을 끼워 맞추면 안 되는 법이지요. 제 예측은 그저 예측일 뿐이고, 단서를 찾기 위해 조사할 목표의 우선순위를 추리기 위한 것입니다.”
아이작은 이런 긴 설명을 구구절절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무룩해 하던 앙브흐의 얼굴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오자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조사를 시작해서 이어나가다 보면, 예측이 빗나가고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일단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청을 하나 드리려고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왔…….”
“실종된 사용인부터 조사하는 거죠? 같이 하죠!”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치고 들어온 앙브흐에게 아이작이 거절의 뜻을 전하려는 순간.
“그러면 저택에 무단 침입한 것과 그 방법은 그냥 넘어가 드릴게요.”
순진하게 웃는 얼굴로 천진하게 단언하는 앙브흐와 마주한 아이작은 얼얼한 뒤통수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후으.”
낮은 한숨을 흘린 크라이어는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목을 꺾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지랑이로 천장을 덮은 뿌연 김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부지불식간에 올리비아의 질색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대륙 전쟁?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말 이제 하지 마. 당신 입에서 나오면 정말로.’
진저리를 치던 동그란 어깨에서 흔들리던 붉은 머리칼이 아득하게 감은 눈꺼풀을 스치듯 지나자 그는 피식 웃으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이윽고 뜨거운 물이 일렁이는 경계면에서 잔물결을 따라 일그러진 쇄골의 낙인을 내려다본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는 손을 들었지만, 낙인 주변만 맴돌 뿐 낙인 자체를 건들지는 않았다. 낙인은 정확한 모양이 어그러지진 않았지만, 주변의 거친 흉터가 겹겹이 엉망진창으로 쌓여 언뜻 보면 전체적인 형태를 알기 힘들었다. 노예의 징표가 제 몸에 새겨진 후, 한동안 크라이어는 그 부분을 긁어내고, 또 긁어냈다. 하지만 빌어먹을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작은 칼로 그 부근을 파내려고 했다. 그런 시도를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셀 수 없을 만큼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이 노예 낙인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낙인을 시선으로 따라 그리던 검붉은 눈동자가 흐릿하게 과거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치이익. 처음 떠오른 건 살을 타는 소리. 마치 달궈진 인두로 가죽을 지지는 것 같은 소리가 마법사의 역겨운 목소리와 함께 이지러졌다. 물론 이 낙인은 강철로 된 벌건 인두 따위로 새겨지지 않았다. 만약 그런 물리적인 것으로 만들어졌다면 낙인이 박힌 부분을 파내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했겠지. 두 번째는 코끝을 찌르는 냄새. 사방이 벽으로 막힌 지하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 살과 피가 타오르는 고약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실제로 살이 타지는 않았으니 그런 냄새가 날 리 없을 텐데, 단번에 그런 냄새라고 알아차렸다. 세 번째는 어둠이었다. 눈이 가려져 있으니 보이는 건 오로지 컴컴한 어둠뿐. 과거를 기억하진 못하지만, 어둠은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의 어둠 역시 두려움보다는 분노로 덧칠되었다. 마지막은 입에 물린 재갈에서 느껴지던 그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기 그지없는 최고급 천의 감촉.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간 그의 뺨을 뱀처럼 쓸어내린 마법사의 딸, 그레타가 속삭였다.
“조금이라도 상하면 안 된다, 고 했던가.”
수증기 가득한 욕실 바닥을 기는 목소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레타의 열렬한 마음과는 달리 크라이어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게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았으니까. 마주했을 때 그의 감정 표면에 살짝 일어난 거스러미 같은 것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짜증이리라.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둔 그가 더운 숨과 함께 낙인이 찍혔던 순간을 털어냈다. 그때의 기억이 부상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낙인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올리비아와 만나기 전까지, 낙인이 찍혔던 순간 외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으니까.
“특별한 동작이나 말로 시작되는 건 아니고.”
낙인에서 불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질 때의 공통점은 올리비아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곁에 있다고 해서 늘 그런 고통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낙인이 뜨거워질 때의 기억을 더듬었지만, 딱히 건질 만한 것이 없었다.
“이럴 때는 마법사의 모가지를 잡고 답을 토해내라고 하고 싶군.”
이미 죽어 나자빠진 염소 수염의 마법사를 입에 담은 크라이어는 비소를 흘렸다. 그의 자리를 차지한 그레타라면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여자에게 물을 마음은 병아리 눈물만큼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죽을 정도의 고통도 아니거니와 통증이 느껴진다고 낙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니.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올리비아가 원인이라면……. -촤아악. 욕조 밖으로 물이 넘치는 소리와 함께 크라이어가 몸을 일으켰다. 욕실을 가득 채운 희뿌연 김을 헤치며 나서는 그의 회색빛 머리카락에서 잿가루처럼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집히는 대로 수건을 잡고 머리를 대충 문지른 그는 몸을 식히려 준비된 바지만 입고 느릿하게 책상으로 다가섰다.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 중에서 한 권을 뽑아낸 그의 머리칼 끝에서 뚝뚝 흐르는 물방울이 책의 가장자리에 얼룩을 만들자 옅은 한숨을 삼키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얼음 때문에 술잔 밖에 맺힌 물방울이 책에 떨어지는 바람에 올리비아가 한동안 그가 책을 집기만 하면 흰 눈을 뜨곤 했다. 새초롬한 눈을 하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그녀를 떠올린 크라이어의 눈매는 그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다음 순간, 크라이어는 별안간 고개를 휙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