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대륙 전쟁이 일어나야 하니까.2022.03.17.
정작 그는 크라이어의 수하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크라이어가 시킨 일도 없었지만, 아이작은 아켄델로 살아오면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생존 본능을 통해 거의 사실에 근접한 평가를 도출해냈다.
“일을 하고 싶다는데 굳이 쉬라고 강권할 필요는 없겠지. 좋아. 그 사용인은 아프다고 숙소로 돌아갔어.”
“그렇다면 아프다는 핑계로 허튼짓을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보다 그 사용인과 가까운 이들의 이야기를 수집해 봐.”
“이미 조사관이 다 돌아본 것 아니었습니까?”
“조사관은 네가 아니잖아.”
단호한 올리비아의 말에 아이작은 이번에도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헤맸지만, 본능으로 그녀에게 가는 시선만큼은 깔끔하게 돌리고 있었다. 여우 눈을 반쯤 찌푸린 그가 볼을 긁적이다 곧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아이작은 자리를 떠났지만, 앙브흐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둔 앙브흐가 입을 열었다.
“그 신전이요. 저 역시 문양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 고대신의 신전인 거죠?”
“그래. 새삼스럽게 다른 신을 위한 신전을 지을 리도 없을 테니까.”
벽이 무너지기 전에 신전을 꼼꼼히 훑어봤던 앙브흐는 곧바로 신전의 형태를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전의 대략적인 형태가 드러났고, 그중 한 부분을 짚은 앙브흐가 말했다.
“아까 그분이 지하에 제단이 있다고 했었잖아요. 이곳이 지하로 통하는 입구였어요. 그리고 벽이 무너졌으니까 좀 더 알아볼 기회가 남았…….”
“아니. 신전과 제단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면 충분해.”
“네? 그렇지만.”
앙브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에서 뭘 하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신전에 제단이 있다면 뻔하지.”
올리비아는 앙브흐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직접 겪기도 했잖아.”
“아! 맞아요! 제물! 신에게 바친다고 했었죠! 같은 신이니까! 아아!”
납치되어 제물로 바쳐질 뻔했던 기억을 떠올린 앙브흐는 환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으응…….”
태양처럼 밝게 웃는 앙브흐를 마주한 올리비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죽을 뻔한 기억을 태연하게 떠들면서 지나치게 밝은 거 아닌가. 평범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앙브흐.”
“네?”
“괜찮아?”
“물론이죠!”
“아니, 그러니까 그때 일로 악몽을 꾼다던가하는 후유증이…….”
“전혀 없어요!”
왜 없는 건데. 라고 차마 묻지는 못했지만, 어쨌건 없다니 다행이었다.
“걱정해주신 거예요?”
반짝반짝 빛나는 앙브흐의 눈을 보고 있자니, 이상해서 물었다는 말은 그냥 삼키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말없이 입가에 황녀다운 고아한 미소를 건 올리비아를 감격에 차 바라보던 앙브흐가 벌떡 일어났다.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이만 실례해도 될까요?!”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늘 조심해야만 해. 아이작에게도 당부했지만, 이번에 마법사를 봤으니 다음에도 마주치면 바로 도망쳐.”
“네! 명심할게요.”
시원하게 답을 한 앙브흐가 눈을 깜박거리다 앗차, 하는 표정과 함께 덧붙였다.
“그 마법사가 왕세자, 아니 이제 노르덴국의 왕과 늘 함께 있어서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제 노르덴 국에는 가지 말라는 말이야.”
“아…….”
그렇지만 열심히 하려면 노르덴 국에 가서 ‘타렌’의 후계자만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아야 하는데. 올리비아는 우물쭈물하며 답을 머뭇거리는 앙브흐를 향해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닌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실종된 사용인에 대해 알아 봐주겠어?”
사람이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 아니겠는가. 이럴 때는 차라리 다른 곳에 관심을 돌리는 편이 나았다. 과연 올리비아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는지 앙브흐는 양손으로 주먹을 꼭 쥐며 결연히 외쳤다.
“네! 최선을 다할게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기사님도 다음에 또 봬요!”
아이작과는 다르게 크라이어를 향해 이보다 더 발랄할 수 없을 만큼 발랄하게 인사를 남긴 앙브흐가 떠나고 둘만 남은 자리. 닫힌 문에 시선을 둔 올리비아가 입술을 뗐다.
“신전, 조사해 볼 가치가 있을까?”
앙브흐에게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고, 실제로도 안에서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은 가지만.
“아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마법사가 떠든 적이 있다.”
“지금은 마법사의 딸만 남았는데, 전과 같을까?”
“신전 가지고 할 만한 일은 강림뿐이니까.”
툭, 흘러나온 ‘강림’이란 단어에 올리비아는 깊은 속에서 끌어올린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대단하신 강림 전까지 반드시 일을 끝내야겠네.”
“반드시 그래야만 하지. 고대신이 강림하려면.”
느릿하게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 크라이어가 올리비아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륙 전쟁이 일어나야 하니까.”
*** 노르덴 국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숨 쉴 틈도 없이 새로운 일을 맡아 길을 나선 아이작은 머지않아 황녀 궁의 사용인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에 스며들었다. 그는 이전처럼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사용인들의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듣고 걸러내며 차근차근 오늘 아파서 일을 쉬고 있다는 사용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원하는 이야기가 한 조각 흘러나왔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걔가 안 보이네?”
“아, 몸이 좋지 않아서 오늘 하루 쉬겠대.”
“그래?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더니, 많이 아프대?”
걱정 어린 누군가의 말에 또 다른 누군가가 뾰족하게 답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겠지.”
그리고 찾아오는 침묵. 간식을 쥔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만 볼 뿐. 그렇게 숨 막히는 적막이 얼마나 흘렀을까. 쿠키가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가 울리는 순간.
“마음이 아프다니, 참 안됐네.”
어딘가 낯선 목소리가 울렸고, 그게 기폭제라도 된 듯 뾰족한 답을 내놓았던 사용인이 재차 빈정거렸다.
“참으로 안됐지 뭐야. 친구에게서 빼앗은 남자가 하루아침에 증발했으니까. 아, 친구도 증발했다고 했던가?”
목소리에 담긴 시커먼 적의가 언뜻 들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거기까지 들은 아이작의 머릿속에 조금 전 타렌가의 아가씨가 꺼냈던 말이 훅 솟아 올랐다.
‘아 참, 그리고 가문에서 사용인 하나가 사라졌어요.’
‘정상적으로 그만뒀다거나 해고된 게 아니라 실종됐거든요.’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 그녀의 친구. 실종된 타렌가의 사용인. 그리고 삼각관계.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이 친구의 연인을 빼앗았다면, 그 ‘친구’가 사용인을 오밤중에 죽이려 덤빌 이유가 충분하다. 애초부터 황녀님을 노리고 달려든 건 아니라는 건 윤곽이 나와 있지만, 확실히 해야겠지. 그리고 실종된 사용인이 아마도 그 ‘연인’ 같은데. 이쪽은 왜 이런 공교로운 시기에 실종된 건지 아직 단서가 부족하다. 순식간에 생각을 거미줄처럼 뻗어 그럴듯한 그림 하나를 그려낸 아이작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숙소에 있다는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의 위치만 확인된다면, 사라졌다는 친구와 실종된 타렌가의 사용인을 살펴야겠어. 단숨에 조사할 방향을 정한 아이작은 그림자 속에서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법사라는 괴이한, 그야말로 동화 속에나 존재할 것 같던 존재가 없다면 자신은 꽤 능력 있는 놈이다.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둔중한 빛을 발하던 검붉은 눈동자를 떠올린 아이작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 아이작이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의 삼각관계를 파악하고 있을 무렵, 앙브흐는 타렌저로 돌아가 집사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응. 전에 말했던 그 사용인 말이야.”
“혹시 갑자기 사라진 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사의 말에 앙브흐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실종 아니었어? 혹여 연유를 남기고 사라진 거야?”
“아닙니다. 하룻밤 사이에 증발했으니 실종……이라고 봐야겠지요.”
집사가 말을 하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은 듯 말을 중간에 흐렸기에 앙브흐는 지체없이 되물었다.
“뭐가 걸리는 거야? 사용인들에 관한 거라면 집사만큼 신뢰할 수 있는 이가 없으니 기탄 없이 말해 봐.”
동그란 눈에서 숨김없이 드러나는 믿음에 집사는 태어날 때부터 봐온 아가씨를 잠시 감회에 젖은 듯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 사용인이 이전부터 사소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너무 사소해서 주의를 주고 넘어갈 만한 것들이었고, 종류도 다양해서 한 번 들켰다고 내보내기에도 애매한 것이었지요.”
약한 한숨을 삼킨 집사가 흰 장갑을 낀 손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런 문제들이 있어서 실종인지 그냥 잠적해버린 것인지 확언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
집사는 모시는 분에게 신뢰받는 만큼 보답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정작 앙브흐는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 진상을 알아봐야겠네!”
실종 사건이라면 무조건 알리라고 하셨기에 전한 것이었건만, 뭔가 속사정이 있다면 황녀님께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먼저 그 사용인이 머물렀던 곳부터 시작을…….”
한껏 의욕적인 앙브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아가씨, 긴급 서류입니다만.”
문 너머로 들린,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에도 앙브흐는 습관적으로 집사를 향해 눈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허리를 숙인 집사가 문을 나섬과 동시에 서류 뭉치를 잔뜩 안은 타렌 후작의 막내 보좌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앙브흐는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으며 볼을 부풀렸다.
“아버님이 또 나에게 미루셨어?”
“하하……. 아가씨를 믿고 맡기시는 거죠.”
늘 두던 곳에 익숙하게 서류를 내려둔 막내 보좌관이 어설프게 웃으며 타렌 후작이 떠넘긴 서류를 포장했지만, 앙브흐는 그녀답지 않게 순순히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타렌 후작이 은근슬쩍 그녀에게 일을 미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타렌가의 후계자인 앙브흐의 역량으로 충분히 처리 가능하고, 때때로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일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의 7할 정도는 그저 타렌 후작이 일을 떠넘기는 것이었기에, 후작의 보좌관들이 일을 가져올 때 하는 말은 입에 발린 말조차 의심하지 않는 앙브흐에게도 믿음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녀는 한껏 미간을 모으고 오리 입을 한 채 물었다.
“아버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