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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가만히 있어 (55/146)

#55. 가만히 있어2022.03.10.

16549714237976.jpg“당신 힘 말이야, 고대신한테서 받고 그런 건 아니지?”

16549714237982.jpg“뭐?”

16549714237976.jpg“그러니까 당신 몸에 고대신이 강림한다거나, 당신 피에 고대신의 힘이 흐른다거나. 뭐 그래서 강해지고 그런.”

말을 하면서도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제가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확인해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생각 난 김에 이야기를 꺼내긴 했는데……. 이어지는 크라이어의 반응에 올리비아는 그런 말을 꺼낸 몇 초전 과거의 자신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그는 한순간 깊이 침잠한 듯 보였다. 검붉은 눈동자가 거의 검은 빛으로 보일 만큼 낮게 가라앉았고, 일자로 다물렸던 입술이 벌어지며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보다 더 낮은 곳을 기고 있었다.

16549714237982.jpg“노예 낙인 외에 고대신이 내게 준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크라이어가 강해지는 만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그의 강함은 고대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그만의 것이었으니까. 하나, 딱 그만큼 고대신을 추종하는 마법사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리라. 그는 여전히 고대신의 노예였으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습관처럼 낙인을 긁어내렸다. 그런 그의 손끝을 시선으로 기민하게 따라가던 올리비아가 벌떡 일어나 크라이어를 향해 바짝 다가섰다. 조금 전 그와의 사이에 있던 미묘하고 일렁거리던 공기 때문에 일정 거리 이상은 다가서지 않는다고 결심했건만. 그런 건 당장이라도 허물어지려는 그의 표정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지 오래였다. 올리비아는 쇄골 부근을 잡아 뜯을 듯 거칠게 긁는 크라이어의 손을 잡아 내렸다. 너무나도 쉽게 딸려 내려온 그의 손을 꼭 쥔 그녀는 반대쪽 손으로 낙인을 꾹 눌렀다.

16549714237976.jpg“없앨 거야. 말했잖아. 신을 어쩌지는 못해도 이 낙인만은 반드시 지워버릴 거라고.”

그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찬 확신을 들으면서 말도 안 된다는 비소보다 희망이라는 이름을 달고 빛나는 조각을 보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그녀가 대회의에서 저를 끌고 밀실로 들어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단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의 앞에 있는 저보다 한참이나 작은 여자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16549714237982.jpg“그래. 그럴 거라 했지.”

올리비아의 손이 닿는 낙인에서 불에 지진 듯 강렬한 통증이 내달렸지만, 크라이어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 위를 덮은 제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을 뿐. 올리비아가 낙인을 매만질 때나 바라볼 때 여러 번 이런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 고통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저를 구해주겠다고 말한 그녀이기에 마치 각인한 것처럼 느끼는 심리적인 문제인지. 혹은 그녀가 낙인과 무언가 관련이라도 있는 것인지. 전자라면 올리비아에게 절대 말할 수 없으리라. 아니, 언젠가 말을 하게 된다면 그녀도 그를 유일하다고 느낄 때가 되겠지. 그리고 후자라면……. 그는 이제 반 정도 읽은 볼셰이크가의 역사서를 떠올렸다. 부디 그곳에서 낙인이나 볼셰이크 핏줄에 관한 단서가 부스러기라도 나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당장 이 사실을 올리비아와 공유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참기 힘든 통증을 느낀다고 말을 꺼내는 순간, 다시는 그녀가 제 낙인을 바라보거나 손대지 않을 테니까. 지긋지긋하고 당장이라도 파내고 싶은 낙인이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거기에 닿는 그녀의 온기마저 없애고 싶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손에 잡히지 않은 그의 손이 낙인을 누른 그녀의 손 위를 덮었다. 그가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숨을 내쉬자 올리비아는 발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이런 젠장, 결심이고 결정이고 이렇게나 쉽게 무너지다니. 올리비아는 전혀 황녀답지 않지만, 네 번의 전쟁을 거쳐 익숙해진 거친 욕을 짓씹었다. 거리를 두겠다고 했지 않나. 한데, 금붕어도 아니고 조금 전 일을 이렇게 쉽게 잊고 그에게 바짝 다가서? 올리비아는 삐걱삐걱 목을 움츠리며 제 딴에는 한없이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아니,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발뒤꿈치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16549714237976.jpg“아얏!”

소파에 앉아 주춤주춤 멀어지는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던 크라이어가 그야말로 훌쩍 그녀와 가까워졌다. 그에게서 드리운 그림자가 그녀의 몸 전체를 그대로 삼킨 순간.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올리비아를 그가 온전히 받아냈다. 한팔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체를 받친 크라이어는 그녀의 왼쪽 발을 바라보다 올리비아가 무어라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어어? 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벌린 올리비아는 어느새 그가 늘 앉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크라이어가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각인이라도 시키듯 소파에서는 그의 서늘한 향기와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마치 그에게 휘감긴 듯 소파에 푹 기대게 된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세웠다. 하지만 크라이어가 발을 잡아 들었기에 몸이 뒤로 기울었고, 재차 소파에 파묻혔다. 다음 순간 발을 옥죄고 있던 딱딱한 구두가 헐거워짐을 느낀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49714237976.jpg“잠깐! 뭐 하는!”

기겁한 올리비아가 몸을 팍 숙이며 그의 팔을 제지하려 했지만, 크라이어의 손길은 세심하면서도 거침없었다.

16549714237982.jpg“가만히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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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굽의 구두는 물론이거니와 비단 양말도 순식간에 벗겨낸 그의 거칠고 약간은 차가운 손이 올리비아의 맨발에 닿았다.

16549714237976.jpg“흐잇!”

반사적으로 이상한 소리를 낸 올리비아의 어깨가 크게 튀어 오르고 잡힌 발을 빼려 다리에 힘을 줬지만, 크라이어는 잡은 발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제 한 손에 다 들어오는 작고 하얀 발을 이리저리 살피다 한숨을 내쉬었다. 눈썹 한쪽을 비죽 올린 그가 입을 열려는데 그의 잿빛 머리 위로 붉은 머리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올리비아는 몸을 푹 숙여 그의 팔을 밀어내려 애쓰면서 외쳤다.

16549714237976.jpg“손 떼! 차갑다고! 대체 뭘 하는 거야!”

흔들리는 붉은 머리칼 사이로 그보다 훨씬 진한 색의 검붉은 눈동자가 깜박거렸다.

16549714237982.jpg“이렇게까지 될 동안 느끼지도 못했나.”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해 꼼짝도 하지 않는 크라이어의 손을 거의 할퀴려던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그가 약간 비튼 제 뒤꿈치 상태가 이제야 시야에 들어왔으니까. 이제껏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붉다 못해 검붉어지기 시작한 뒤꿈치를 보고 올리비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16549714237976.jpg“아니, 이게 왜…….”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그녀가 오만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시커먼 멍이 들면서 부어오른 부분을 인식하자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한 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신음을 삼키며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을 택하며 몸을 일으킨 올리비아는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앓는 소리가 안으로 맴돌았지만, 간헐적으로 잘게 떨리는 그녀의 발을 손 전체로 느낀 크라이어가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16549714237976.jpg“으악!”

올리비아는 그야말로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를 기세로 비명을 질렀지만, 당연하게도 크라이어에게 잡힌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16549714237982.jpg“닿지도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는 시커멓게 부어오른 발뒤꿈치를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발목과 복사뼈 부근을 문지르고 있을 뿐. 까끌한 손끝과 바짝 깎은 손톱 끝이 뼈 주변을 미묘하게 긁어내리는 듯한 감촉에 올리비아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16549714237976.jpg“거기 닿지 않은 건 나……도 알아. 그게 아니라 왜.”

몰려오는 통증 때문에 하얗게 질렸던 올리비아의 뺨이 잘 익은 사과 색으로 입혀지기까지 단 몇 초. 그런 의미를 담고 매만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제발 좀 놓아 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 들 손길이 아닌가. 아예 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린 올리비아를 알면서도 크라이어는 그녀의 발목을 놔주지 않았다.

16549714237982.jpg“긴장하고 있잖아. 이대로 근육이 놀라 피가 막히기라도 하면 죽을 만큼 아플 거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어딘가 전문적인 말이 발등 위로 톡 떨어졌건만 얼굴을 가린 올리비아의 손은 움직일 줄 몰랐다. 크라이어 역시 굳이 답을 바라지 않았기에 올리비아의 발에서 힘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 잔뜩 긴장했던 발등의 푸른 핏줄이 사라지고 작은 발에서 힘이 완전히 풀리자 올리비아가 슬그머니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16549714237976.jpg“이제 됐잖아.”

놔 달라는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크라이어는 그녀와 눈을 맞춘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을 뿐. 후에 일어날 일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상상할 수 없었던 올리비아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그와 눈을 맞춰야만 했다. 눈을 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니, 시선을 돌려야만 할 텐데. 올리비아는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그의 마른 입술이 기어이 제 발등 위에 내려앉는 모습을. 검붉은 눈동자에 제 모습이 선명하게도 비쳐 올리비아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크라이어는 그녀의 발등에 입술을 붙인 채 나지막히 웃었다. 올리비아의 심장이 발등으로 옮겨오기라도 한 듯 그곳에서 두근거리는 맥동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이를 조금만 내어 볼까 하는 욕심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크라이어는 그대로 입술을 떼며 여상하게 몸을 일으켰다.

16549714237982.jpg“잠깐 있어. 처치할 만한 걸 가져올 테니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의 발목을 놓아준 그가 집무실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올리비아는 앓는 소리를 냈다.

16549714237976.jpg“왜 당신이 처치하려고 하는 거야. 궁의를 부르면 되잖아.”

입 밖으로 내고서야 궁의를 부를 생각이 든 올리비아는 설렁줄을 찾았지만, 책상 옆에 있는 설렁줄이 이 소파에 앉은 채로 손이 닿을 리가 없었다. 일어나려고 다리에 힘을 줬지만,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좀처럼 일어설 수가 없었다. 결국 소파의 암레스트를 꽉 잡고 반쯤 엉덩이를 들기는 했지만, 허리를 관통하는 통증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소리라도 지를까 말까 수도 없이 고민하던 올리비아는 차라리 그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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