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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지나치게 가까워서. (54/146)

#54. 지나치게 가까워서.2022.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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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이어는 참지 못하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이제 정신을 좀 차린 올리비아는 황당함과 의아함이 뒤섞인 눈으로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아 내리려 애썼지만, 그녀의 입술을 가린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의 손목을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올리비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그가 다시 먼 곳을 바라보자 혹시 사용인이 돌아오는 건가 싶어 일단 가만히 있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냐는 뜻을 담뿍 담은 올리비아의 시선에 크라이어는 다른 말 하지 않고 제 손바닥을 떼어냈다.

16549713998199.jpg“후아아아. 뭐야 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올리비아는 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녀 자신의 손으로 입술을 막아버렸으니까. 가까워. 지나치게 가깝다고. 만약 입술 위를 제 손으로 덮어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마르고 뜨거운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을 거리였다. 그 상태로 크라이어가 속삭였다.

16549713998205.jpg“지나치게 가까워서.”

깊은 우물 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에 올리비아의 뽀얀 솜털이 일시에 곤두섰다. 가……깝지. 맞아. 너무 가까워.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그의 가슴에 제 콧날이 뭉개질 듯했으니까. 대체 왜 이렇게 가깝게……. 그가 눈을 감았다 뜨는 모습이 지독하게 느리게 보였고, 그가 다시 입을 떼는 건 그보다 더 느릿하게 보였다. 이어 다시 그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16549713998205.jpg“들킬 뻔했다만.”

일 초가 천추 같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올리비아는 뒤늦게 그의 뒷말의 의미를 헤아리고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목소리를 냈다. 아니, 내려고 했지만 제 손바닥에 막혔다. 크라이어는 입꼬리를 당겨 웃더니 그녀의 입술을 막고 있던 작은 손을 잡아 내렸다. 그제야 올리비아의 입술 사이로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16549713998199.jpg“들……켜?”

16549713998205.jpg“들키지 않고 지나갔지.”

여전히 머리가 굳었는지 그가 한 말의 이해가 한 박자 느렸다. 지나갔다고? 들키지 않고? 그러니까 그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한테 말이지? 아니, 그러니까 지금은 지나갔다는 말이잖아. 지나갔는데 왜 아직도 이러고 있는…….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조각조각 난 채 이리저리 흩어지기만 했다. 혼란으로 물들어 탁해진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에 검붉은 크라이어의 눈동자가 호수에 방울방울 떨어져 오염시키는 핏방울처럼 번져 들어갔다. 서로가 서로만을 오롯이 담은 채 눈 한번 깜박하지 못하는 시간은 또 얼마나 흐른 건지. 어, 어쩐지 더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 올리비아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이마와 크라이어의 이마가 맞닿았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16549713998205.jpg“올리비아.”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자 참을 수 없어져 눈을 반짝 뜬 올리비아는 눈가를 길게 접어 웃는 크라이어와 다시 눈을 마주했다. 눈가를 길게 접어 웃은 크라이어의 날카로운 콧날이 비스듬히 기울어진다고 느낀 순간. 그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 바로 옆에,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벌어진 거리에 내려앉았다.

16549713998205.jpg“그 사용인은 몸이 좋지 않다고 숙소로 돌아갔으니 오늘은 이만할까.”

솜털을 간지럽히는 더운 숨에 올리비아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16549713998199.jpg“끝! 끝이야!”

목소리를 크게 낸 덕분인지 얼어붙었던 몸도 움직일 수 있었기에 그녀는 크라이어의 가슴을 강하게 밀쳐냈다. 물론 올리비아가 민다고 밀릴 그가 아니었지만, 그는 순순히 그녀를 풀어주며 물러났다.

16549713998199.jpg“돌아갈래.”

적당히 거리가 벌어지자 그녀는 크라이어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올리비아의 뒤를 따랐고, 올리비아는 크라이어보다 한 발자국 앞서 걸었다. 아니, 조금 더 다리를 재게 놀려 두 발자국 정도 앞서 걸었다. 궁의 복도에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그건 그와 멀어지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지나치게,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크라이어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 번의 삶을 살고, 다섯 번째 시작하는 삶이었건만. 이런 감정을 품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국 유일의 황녀이자 차기 황제인 그녀는 결혼에 관해 막연한 상상이나 바람이 아닌 확신을 갖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는 결혼.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실 사랑의 아름다움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이들이 바로 볼셰이크가 아니던가. 하지만 사랑하지 않더라도 제국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을 가장 아래에서 떠받치며 가장 위에서 다스리는 이의 의무였기에 올리비아는 ‘결혼’은 확신하면서도 ‘사랑’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운명처럼 누군가 나타나거나, 혹은 누군가와 사소한 시간이 쌓여 그 사람이 유일한 사람이 된다, 라는 것을 조상들의 기록에서 읽었을 뿐. 그리고 지금. 운명이라면 운명적으로 만나, 사소한 시간까지 쌓아버린 남자가……. 맙소사. 지난번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건가?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올리비아에게 크라이어는 단지 정복자이자 학살자이며 그녀의 숨을 거두는 남자였을 뿐인데. 대체 언제부터? 아니, 왜? 정말로 왜? 왜 하필? 의문의 다음에 밀려온 건 부정이었다. 안돼. 절대 안 돼. 그는 사악한 마법사를 함께 물리칠 동료이자, 고대신에 묶인 노예 계약을 끊어줘야 하는 관계일 뿐. ……어라? 어디서 많이 본 관계 아니야? 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한 생각은 어느새 동화 속에서나 통할 사악한 자에게 잡힌 크라이어와 그를 구할 올리비아로 뻗어 나갔다. 제 생각인데도 경악한 나머지 올리비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건 아니야. 첫 사…… 끝까지 생각하기도 소름이 끼쳐 대충 처음 느끼는 감정으로 밀어버린 올리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이지만 아직 뭐 죽고 못 살 만큼, 너밖에 안 보여! 할 만큼 깊은 감정은 아니다. 그러니 누를 수 있을 터.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을 무의식중에 떠올린 그녀는 다리를 재게 놀렸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작은 머리통에서 휘몰아치는 생각 전부를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을 크라이어는 짐승 같은 감으로 알아차렸다. 마치 쫓기듯 종종 걷는 그녀의 작은 등이 어찌나 단호하던지. 크라이어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않고 아주 느긋하게 올리비아를 뒤쫓았다. 먹잇감의 꼬리를 잡는 포식자처럼. 올리비아가 아무리 빠르게 걸어도 크라이어는 일정 거리를 두고 그녀를 차분하게 뒤쫓았다. 그리하여 해를 등진 그의 그림자가 그녀의 등을 서서히 삼키고 있었다. *** 리본 색이 특이했던 사용인의 뒤를 밟으며 한 탐문은 큰 수확 없이 끝났다. 애초부터 큰 성과를 기대하고 나간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별다를 것이 없을 줄이야. 건진 거라고는 안색이 좋지 않았고, 아프다며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뿐. 집무실에서 피해자, 그러니까 살인자의 조사 기록과 리본 색이 특이했던 사용인의 기록을 다시 대조하던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16549713998199.jpg“일단 그녀는 자신이 죽을 뻔한 것도 모르는 것 같았어.”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16549713998205.jpg“그래. 공포에 질렸다기보다는 초조함이나 불안함에 짓눌린 듯 보였다.”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13998199.jpg“맞아. 이건 좀 확대 해석한 것 같지만 슬픈 것 같기도 했고. 어쨌건 얼굴이 그늘지긴 했지. 아파서 그랬던가?”

16549713998205.jpg“몸에는 이상 없었다.”

16549713998199.jpg“뭐?”

16549713998205.jpg“아프다고 돌아갔지만, 몸 상태 자체는 멀쩡했다고.”

16549713998199.jpg“꾀병이었단 말이야?”

16549713998205.jpg“일단 몸은 지극히 정상으로 보였다만.”

16549713998199.jpg“아니…… 그보다 그걸 그냥 겉으로만 봐서 알았다고?”

올리비아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자 크라이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16549713998205.jpg“숨소리에 잡음이 섞이지 않았고, 몸의 균형도 무너지지 않았으며 피부 상태로 봐서 열이 오르거나 지나치게 차가워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물 흐르듯 나오는 말에 올리비아는 말을 잃고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을 한 번 뻐끔거린 후 간신히 내뱉었다.

16549713998199.jpg“어…… 이제 심장 소리 같은 것도 들……리는 거야?”

16549713998205.jpg“뭐, 지하에 있는 심장 소리나 근육이 움직이는 소리까지는 듣지는 못하지만.”

지난 생에서 황궁 지하의 비밀 공간에서 올리비아를 찾아냈을 때만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정도는 다 들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럼 아까 그를 코앞에 두고 쿵쿵거렸던 제 심장 소리도……. 올리비아의 얼굴이 한순간에 확 붉어졌다. 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움찔거리긴 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뒤로 얼마만큼 물러나건 소용없다는 것을 방금 들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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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아무 서류나 집어 들고 고개를 박으며 수치스러움에 이를 박박 갈았다. 거리 확보를 해야 해. 다시는 그만큼 가까이 가지 않을 거야. 그렇게 몇 번이나 속으로 되네며 눈치 없이 지금도 크게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조그맣게 두드렸다. 크라이어는 금세 붉은 물이 떨어질 듯 익어버린 그녀의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올리비아에게 훌쩍 다가서는 대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금 이대로 그녀를 끌어당기면 저 작은 가슴속에서 귀가 아프도록 쿵쿵거리는 심장이 제 기능을 잃을 것 같았으니까. 올리비아가 달아오른 뺨을 감추려 일부러 서류를 크게 뒤적이는 사이, 크라이어가 말했다.

16549713998205.jpg“그 여자가 숙소로 돌아간 것까지는 확인했지만, 좀 더 알아볼까?”

16549713998199.jpg“좀 더?”

16549713998205.jpg“숙소에 들렀다가 다른 곳으로 빠졌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16549713998199.jpg“아프다고 해서 숙소로 갔으면서, 딴짓을 할 만큼 멍청해 보이진 않던데.”

규정된 복장에서 리본 색만 조금 다르게 바꿔 딱 걸리지 않을 선을 지킨 여자다.

16549713998199.jpg“그보다 당신도 할 수 있는 거야?”

16549713998205.jpg“할 수 있냐고?”

16549713998199.jpg“알아본다고 했잖아, 그럼 아이작처럼…….”

올리비아가 아이작의 이름을 입에 담기 무섭게 크라이어가 뒷말을 막았다.

16549713998205.jpg“그만큼 전문적이진 못하지만, 사용인들의 눈을 속일 정도는 된다.”

그가 부자연스럽게 말을 잘라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올리비아가 재차 물었다.

16549713998199.jpg“시간이 더 지나서 강해지면?”

16549713998205.jpg“글세. 그때가 되면 숨어서 무언갈 할 필요가 없겠지.”

16549713998199.jpg“그것 참…… 재수 없지만 정확한 자기 평가네.”

짧게 혀를 찬 올리비아는 곧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13998199.jpg“뭐, 강해져서 나쁠 건 없지. 할 수 있는 일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거니까. 음, 이건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16549713998205.jpg“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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