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숨을 쉬어야지.2022.03.03.
황녀 궁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심지어 올리비아는 암살당할 뻔한 당사자이니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뭉갤 수 있었다. 뭐, 그 당시 크라이어가 흔적을 남기지 않기도 했지만. 허나 이런 뒷사정을 알 수 없는 보니타는 제 명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건을 맡고 있는 수사관을 바꿀 정보를 가지고 오세요.”
“네.”
짧은 대답 후 여자는 사라졌고, 보니타도 걸음을 옮겼다. 지하에서 빠져나온 보니타는 지체 없이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섰다. 거울을 꺼내든 그녀의 시야로 주홍빛이 일렁인다 싶더니 그레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레타 님.”
“아, 보니타. 아무래도 이쪽 일이 예정보다 지체될 거 같아.”
앞뒤 없이 불쑥 나온 본론에도 보니타는 익숙한 듯 되물었다.
“제단의 완성이 늦어졌습니까? 혹여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건 제가 직접…….”
“아니,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야. 시일이 조금 더 걸릴 뿐이지.”
완성 직전의 신전 벽에 큰 구멍이 뚫렸지만, 누군가 일부러 한 게 아니라 괴었던 작은 돌이 사라진 사고였다. 그사이 타렌가의 여자가 어영부영 사라져 버렸지만, 어차피 처리하려고 했던 건축가들 중 불길하다며 떠들던 놈도 죽여 없앴으니 찜찜한 것들 중 하나는 치운 셈이다.
“그보다 황녀 궁 쪽 일은?”
“죄송합니다.”
한마디 변명도 없이 보니타가 고개를 숙이자 그레타의 얼굴 반쪽에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레타가 말했다.
“이쪽에도 일이 생긴 걸 감사히 여겨야겠네.”
실패를 비꼬는 말에도 보니타는 묵묵히 고개를 더 깊이 숙였을 뿐.
“감사드립니다.”
그에 그레타는 흥이 식었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되었어. 내가 제국으로 가는 일정도 미뤄졌으니 가기 전까지만 황녀 궁에 확실히 사람을 심도록 해.”
“네. 그런데 한 가지.”
“응?”
“황녀 궁에 사람을 심는 건 정화를 위한 작업입니까?”
일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보니타 역시 이번 일의 목적을 알지 못했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답지 않게 질문을 하네?”
“밀어 넣을 사람을 신중히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황녀 궁에 심을 애는 성실하고 신뢰가 가는 애로 골라. 처음부터 황녀 옆에 붙을 필요 없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토대를 쌓아서 마지막에 쓰일 비수가 되어야 하니까.”
“마지막이라면…….”
“가질 수 없는 것에 손을 대려고 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알려줘야지. 아, 물론 정화 작업에도 필요한 일이야. 어쨌건 제국은 가장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 곳이니까.”
그레타는 화려한 꽃처럼 웃으며 눈앞에 없는 크라이어를 그리듯 시선이 먼 곳에 가 있었지만, 목소리는 비수같이 날카로웠다. 그레타의 모호한 말에도 보니타는 별다른 답 없이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따르는 건 고대 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마법사’이지 그레타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그레타가 무슨 생각을 하건 고대 신을 소환하여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큰 목표가 변하지 않는다면, 보니타는 그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성실하게 그레타를 보필하리라. 이윽고 크라이어를 떠올리며 꿈꾸듯 몽롱하게 풀렸던 그레타의 초점이 돌아왔다.
“아, 그리고 신을 섬기는 자가 곧 탄생할 거야.”
마치 오늘 먹을 저녁에 대한 이야기를 하듯 일상적인 어조였지만, 내용은 범상치 않았다.
“그건…… 낙인을 찍은 자가 새로이 나타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해. 뭐, 크라이어 님 대용품 정도는 되겠지.”
그레타는 심드렁하게 덧붙이며 연결을 끊었다. 어둑한 방에 홀로 남겨진 보니타는 거울을 쓰다듬으며 이 더러운 세상이 정화될 날을 더듬었다. *** 의욕적으로 집무실을 나선 올리비아는 곧 사용인들 중에서 리본 색이 특이한 복장을 한 이를 찾아냈다. 그녀가 움직이는 동선을 이미 보고 받은 바가 있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자고로 염탐이라고 하면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이던가. 넓게 보면 대상을 살피는 일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그 대상이 가는 곳, 하는 행동, 말, 그때의 몸짓, 목소리, 상대하는 사람 등등을 알아보는 것이지 않나. 그중 하는 행동이나 상대하는 사람은 수월히 알 수 있었다. 황녀 궁의 사용인이니 휴가를 받거나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일과는 정해져 있으니까. 하나, 대상이 나누는 대화가 문제였다. 몸짓과 표정으로 어느 정도 분위기를 파악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으니. 이래서야 기껏 나온 의미가 없지 않나. 크라이어와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빠져나오려 기세 좋게 나왔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정말로 제가 그런 미묘한 공기, 정확히 말하면 저만 느끼는 것 같은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도망쳤다는 것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 같았으니까. 이 자리에서 성과를 얻으려면 결국 크라이어에게……. 그래. 이건 일이니까, 여기에 집중하자. 아까처럼 부정맥이 오듯 심장이 뛰진 않을 거야. 뛰어도 부정맥이라고 생각하자. 올리비아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느새 제 곁에 바짝 붙어선 크라이어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들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물음이었지만, 크라이어는 정확한 답을 꺼냈다.
“커튼을 갈아야 하는데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군. 빈 시간에 다른 곳으로 가서 쉴지, 아니면 그냥 대기할지 고민하고 있다.”
물 흐르듯 술술 흘러나오는 사용인들의 대화에 올리비아는 되려 말문이 막혔다. 제가 묻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툭 답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눈을 빠르게 깜박이던 올리비아는 그만큼 빠르게 정신을 수습한 후 속닥거렸다.
“커튼 이야기를 하는 것 치고는 안색이 창백한 것 같은데?”
“지금은 오늘 아침에 궁의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마들렌 굽는 향기로 넘어갔다만.”
“마들렌 이야기하는 것 치고도 얼굴은 영…….”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의 창백한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올리비아의 신경 끝에 무언가 툭툭 걸렸다.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저들 중 누구도 꺼내지 않는다.”
“하긴,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 으음.”
무려 황녀 궁에서 살인이라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불안해하는 건가? 하나, 그들은 그런 것들을 티 내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받았을 텐데.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이 제 감정을 잘 추스르지 못한 걸까……. 뭔가 거슬리지만, 그 무언가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채 그 후에도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잡다한 이야기만 오갔을 뿐. 이윽고 사용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도 자리를 옮겼다.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이 한 명을 제외한 사용인들과 갈라지자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그들과 점점 더 가까이 그들과 다가섰다. 그러던 중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이 곁에 있던 사용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응? 왜 멈춘 거…….”
올리비아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크라이어의 강건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그대로 당겨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올리비아는 제 등에 차가운 벽이 닿은 후에야 제 처지를 깨달았다. 토끼 눈을 뜬 그녀가 숨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뭐, 뭐 하는…… 읍!”
하지만 올리비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 반절을 덮어 버려 그녀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들과 고작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을 지나치는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의 모습에 박혔다.
“으,으으읍!”
올리비아는 대체 뭐 하는 거냐며 읍읍 거리고는 있었지만,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가는 건 개미가 바위를 미는 것만큼이나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구태여 발버둥을 치지는 않았다. 이내 천천히 그녀를 향해 시선을 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쉬이.”
검지로 입술을 누르지는 않았지만, 그 말만으로 조용히 하라는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기에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빠르게 팔락거렸다. 일단 그가 조용히 하라는 말에 수긍하긴 했지만,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퍽 궁금해 눈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부산하게 굴렸지만, 그녀의 시야에 보이는 건 위아래 양옆 전부 크라이어 뿐. 그럴 수밖에. 강건하기가 강철같은 그의 몸이 벽을 사이에 두고 그녀를 완전히 가두고 있는 모양새였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올리비아는 단숨에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등이 벽에 딱 붙어 있었기에 뒤로 물러날 곳조차 찾지 못하고 그저 애꿎은 뒤꿈치만 벽에 세게 부딪쳤을 뿐. 크라이어는 잘게 흔들리는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리본 색이 다른 사용인이 멀어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느릿하게 끄는 듯한 그 사용인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리고 그의 품속에서 뒤로 물러나려다 실패한 올리비아는 눈썹 끝이 축 처졌다. 마른 손바닥과 입술이 닿은 감각이 지나치게 선연해서 올리비아의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고 있었으니까. 거칠고 메마른 손바닥의 감촉이 입술 전체에서 느껴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렇게 숨을 멈추고 눈만 깜박이는 올리비아의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챈 크라이어가 다시 그녀를 향해 눈을 돌리며 눈썹 끝을 구겼다. 올리비아는 제가 숨을 참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조금씩 얼굴이 달아오르는데도 여전히 내쉴 생각을 하질 않는다. 이래서야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지 않나.
“숨을 쉬어야지.”
웃음을 참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두드리자 올리비아는 그제야 제가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라이어의 손바닥이 아주 살짝 떨어졌고, 올리비아는 이제껏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내쉬었다.
“후으.”
숨을 쉬자 이제껏 안개라도 낀 듯 뿌옇던 머리가 한차례 싹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에 올리비아는 의식적으로 숨을 더 크게 들이쉬었다 느릿하게 내쉬었고, 눌렸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녀의 숨결이 거친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막혀있던 숨이 터져 나오며 폐부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그녀의 숨결이 제 손바닥을 간지럽히자, 크라이어의 목덜미를 타고 등줄기까지 오싹한 느낌이 내달렸고…….
“으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