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나를 구해주겠다고 했었지.2022.02.28.
서늘한 목을 매만진 올리비아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지.”
하인데르라는 이름 때문에 함부로 휙 던져 버리기 힘든 사안을 일단 넘겨두고 곧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집어 든 서류는 일전에 일어났던 황녀 암살 미수, 아니 누군가를 향한 살인 미수 사건에 관한 조사 보고서였다. 다시 한번 조사를 보낸 후 추가된 내용은 역시나 많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다시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던 중. 서류 위로 드리운 그녀의 그림자를 그보다 훨씬 큰 그림자가 낼름 삼켰다.
“그때 그 여자에 관한 건가.”
귀가 아니라 피부를 통해 울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서류를 쥔 올리비아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곧바로 손아귀 힘을 풀어낸 올리비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응. 혹시 몰라서 한 번 더 조사를 명했는데 역시나 특별한 건 없었어.”
올리비아는 도서관에서의 일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세상엔 들추지 않고 덮어 놓아야만 하는 문제도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크라이어 역시 구태여 그때의 일을 꺼내지 않았다. 단지 지금 올리비아가 집중하려는 일에 손을 보탤 뿐.
“그럴 리가. 이유도 없이 그 밤중에 죽이려고 달려들지는 않을 텐데.”
“그렇지. 조사관의 실력을 의심해버리는 모양새가 되겠지만.”
“직접 알아보겠다는 거군.”
올리비아의 의중을 정확히 짚어내며 조사관의 보고서를 살피는 크라이어의 베일 듯 날카로운 콧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손톱 밑에 작은 가시가 박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엉망진창이었던 시간을 그 역시 입에 올리지 않는다. 크라이어라면 자신이 그 이야기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어째서. 고개를 숙여버린 올리비아는 괜히 따끔거리고 거슬리는 손끝을 매만졌다. 그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한편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건지 모를 섭섭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오긴, 저를 네 번이나 죽인 남자를 향해 뛰는 이 미친 가슴에서 오는 거겠지. 그녀는 심장께를 꾹 누르며 숨을 골랐다. 미친 거겠지. 그래. 미친 게 분명해. 스스로를 향해 욕을 쏟아내던 올리비아는 삐죽 솟은 뾰족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 일을 꺼내지 않는 편이 좋기는 한데.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나? 그때 뭐라고 한 거냐고 물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결국 그가 속삭인 말을 듣지 못했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때 일을 다시 꺼내기 싫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올리비아는 그러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결국 흘긋 크라이어를 곁눈질하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움직인 건지 기척도 없이 그녀에게서 멀어진 그는 늘 앉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왼쪽 팔꿈치를 암레스트에 괴고 비스듬히 앉아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어느샌가 익숙해져 버린 일상의 모습. 분명 익숙해져서 이젠 그가 없으면 반사적으로 시선으로 찾아 헤매는 지경까지 이르렀건만, 새삼스럽게 왜 이리 손이 꼬이고 발끝으로 땅을 쿡쿡 찍게 되는 건지. 역시, 엉망진창이야. 그의 주변에 느른하게 흐르는 공기에 올리비아는 미간에 더해서 콧잔등까지 잔뜩 찡그렸다. 심지어 크라이어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나만 엉망진창이잖아. 서류에 집중하려 애를 썼지만,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는 수준으로 내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 신경이 크라이어가 있는 방향으로 몰려 있었으니까. 기밀이라고 적힌 서류가 펜에서 흐른 잉크로 얼룩지길 몇 번째. 차라리 나가야겠어. 이대로 둘만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다가는 조만간 뭔 일이 나도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올리비아는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가자.”
“간다니?”
책을 비스듬히 기울인 크라이어를 향해 올리비아가 척척 다가섰다.
“직접 살펴보겠다고 했잖아. 조사관의 보고서에 나온 사용인들을 보러 가야겠어.”
“궁에서 일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텐데.”
“일단은 궁만 둘러보고. 사실 회귀 전에 내 궁에서 이런 종류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적은 없었거든.”
그와 대화를 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편안해진 올리비아의 태연한 말에 크라이어가 피식 웃었다.
“이런 종류가 아니라면 다른 종류의 사건은 있었다는 말이군.”
“황궁이잖아. 대륙에서 가장 안전하면서, 비할 바 없이 위험한 곳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올리비아가 기척도 없이 몸을 일으키는 크라이어를 향해 혀를 찼다.
“뭐, 대륙 전쟁 당시 황궁이 얼마나 빨리 무너졌는지 생각하면 안전하다는 말도 못 하겠지만.”
“아, 그거 말인데.”
“그거?”
“궁의 성벽을 무너뜨렸다고 했잖아.”
“맞……아. 당신이 검을 한 번 휘두르니까 그대로 박살 났지.”
한 사람이 고작 검 한 번 그었다고 대륙 유일의 제국을 굳건하게 지키던 황궁의 성벽이 무너지다니. 연극으로도 올리지 못할 허황된 소리 같겠지만, 올리비아는 그 광경을 무려 네 번이나 봤다. 정확히 말하면 두 번은 실제로 목격했고, 두 번은 벽이 통째로 날아갈 때 울린 굉음만 들었다.
“뭐, 과히 장엄한 광경이긴 했어.”
아득해지는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녀가 보는 광경을 그는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보는 광경에는 분명 자신이 있을 테지. 분명 ‘자신’일 텐데.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올라 그의 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가 모르는 그를 그리는 흐릿한 시선이 지극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크라이어의 목울대를 타고 느른한 진동이 울렸다.
“올리비아.”
나직하게 부르는 그녀의 이름이 기꺼웠다. 그리고 제 부름에 입술 끝을 바들바들 떨면서 붉어지는 귀 끝을 문지르는 올리비아의 반응 하나하나가 전부 기껍기 그지없었다. 기껍다 뿐일까. 지금 당장이라도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저 작은 귀를 아작아작 씹어대고 싶었다. 크라이어는 천천히 제 입을 가렸다.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다. 기억나지 않는 제 과거가 그리 정의롭거나 빛으로 가득 찬 삶은 아니었으리라는. 그는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웃고 있었지만, 그의 손 뒤로 모두 가려졌다.
이윽고 드러난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이 진득하게 이글거렸다.
“나를 구해주겠다고 했었지.”
귓가를 타고 굴러들어온 그의 말에 한들한들 흔들리던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고 했었어.”
구해주긴 누가 누굴 구해줘. 옛 볼셰이크 조상들의 말을 빌면 내 코가 석자다. 너한테서 대륙은커녕 나를 구하는 것도 아등바등 하다가 네 번이나 실패했는데! 간질거리던 심장과 쭈뼛 섰던 솜털 따윈 일시에 잊을 만큼 차가운 현실이었다. 잘라내는 듯한, 아니 정확히 선을 그어 밀어버리는 그녀의 말에 크라이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부가 따가울 만큼 불편한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올리비아는 먼저 그에게서 등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황녀 궁부터 둘러 볼 거야.”
문을 나서는 올리비아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이어의 검붉은 눈동자가 일렁이며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 어스름한 노을이 지는 시각, 하인데르 저택 지하에 마련된 공간에서 보니타는 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실패했군요.”
사막보다 마른 목소리가 끝을 고하자 남자는 주저 없이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콰득.
“죄송합니다!”
딱딱한 나뭇 바닥에 이마가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남자의 사죄 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깨진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대리석 문양에 번지기 시작하자 보니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리한 것을 바랐나요.”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무엇을 해야만 했나요.”
“황녀궁 시녀 한 명을 무작위로 제거하는 일입니다.”
“잘 알고 있었군요. 무작위에 단 한 명이었죠. 그러기 위한 계획과 재료도 전부 준비해 건넸었죠.”
물론 남자는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런 것은 남자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남자가 보니타에게 명을 받았고, 실패했다는 사실 뿐. 얼굴을 바닥에 처박은 남자는 덜덜 떨리는 턱을 억지로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벌어진 입에서는 볼썽사나운 숨소리만 새어 나왔을 뿐.
“누군가 죽기는 죽었더군요.”
“네…… 네.”
“그 일에 관해서는?”
“죄송합니다.”
쓸모가 없군. 꽤 적합한 놈을 골랐는데도 실패하다니. 이 계획은 일단 멈춰야겠어. 눈을 두 번 깜박이는 사이, 보니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치우기로 결정했다. 살아 숨 쉬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면 죽어 정화되는 편이 그에게도 훨씬 나을 터.
“치워요.”
“아, 아아아! 기회를,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시면!”
남자는 울부짖으며 끌려나갔지만, 보니타의 머릿속에서 남자는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런 보니타 곁에 얼굴이 그림자로 반쯤 가려진 여자가 붙어섰다.
“일을 재진행할까요.”
“아니, 일단 보류해요.”
여자는 보니타의 답에도 선뜻 물러나지 않고 물었다.
“황녀 궁에 사람을 심기 위해 사용인을 반드시 죽여야 합니까? 무작위로 한 명쯤은 일을 그만두게 하고, 멀리 보낼 수 있습니다만.”
꼭 죽여야만 하는 이유라니,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비밀은 죽어야 무덤에 함께 묻히죠.”
무덤으로 보내지 못한 비밀에 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지 않았던가. 모래가 씹히듯 삭막한 목소리에 여자는 재차 무어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내 다물었다. 고용인의 의향이 그렇다면 거기에 더 입을 댈 필요는 없으리라. 명확히 원하는 일을 정확히 지시한 대로, 콕 짚은 사람이 움직여주길 원하는 고용주. 게다가 일의 성패 여부와 관계없이 한 번 일을 마칠 때마다 돈을 지급하니 이보다 더 좋은 고용주가 있을까. 다만 후작의 의뢰가 끝난 후 사냥을 마친 사냥개처럼 삶아지느냐 마느냐가 문제겠지. 보니타의 마른 목소리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던 여자의 의식을 현실로 끌어 올렸다.
“황녀 궁에서 일어난 일의 수사 현황은 어때요?”
“피해자는 밝혀졌습니다만, 살인자에 대한 단서는 전혀 없습니다.”
“피해자가 살인자였죠?”
“네. 계획대로라면 그녀가 살인자가 되었어야 합니다.”
보니타는 가면을 쓴 듯 무표정한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제국 유일의 적통 황녀의 궁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실마리조차 잡지 못 했다? 수사관이 문제인 건가. 조만간 황궁에 들러 수사관을 갈아치워야 할 수도 있겠네. 물론 사건 해결에 진전이 없는 이유는 보니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제국 황궁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데 감히 허투루 일을 처리할 만큼 간이 큰 수사관은 없었다. 하나, 아무리 수사관이 열과 성을 다해 일이 있던 그날 밤을 살피고 뒤엎어도 살인자의 꼬리는커녕 꼬리털도 찾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