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또 보지.2022.02.24.
“저, 전하.”
절대 이곳에서 마주치지 않아야 할 왕세자가 나타났으니까. 재무대신은 본능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으려 입을 열었지만, 그대로 굳어버렸다. 두려움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졌다. 왕세자는 그런 재무대신을 보지도 않고 앙브흐를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왜 이곳에 있느냐 물었다.”
무표정한 왕세자의 메마른 추궁에도 앙브흐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타렌의 이름으로 공급된 돌이 어디에 쓰이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역시나 흠잡을 데 없는 명분이었지만, 왕세자 곁에 있던 그레타의 입매가 비틀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왕궁을 휘젓고 다닌다고? 타렌이라는 이름은 그레타도 알고 있다. 아니, 제국에 대해 알고 있다는 편이 정확하리라. 신을 위해 바다같이 울렁거리는 피를 보기 위해서는 대륙을 전쟁으로 밀어 넣어야 하고, 그러려면 대륙의 중심이자 기둥인 제국을 흔들어 전쟁의 겁화로 밀어 넣어야 하니까. 타렌이라면 그 제국에서도 한손에 꼽히는 가문이 아닌가. 게다가 분명 저 여자는…….
‘마지막 제물이 타렌 영애였기에 황녀가 개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황녀, 황녀, 황녀. 크라이어의 곁에 있던 올리비아를 떠올린 그레타의 입매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황녀가 살린 여자란 말이지. 타렌가의 여자가 내놓은 답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상관없다. 신을 경배하는 제단에 바칠 피가 한 사람 분량 늘어났을 뿐이니.
“확인은 다 한 건가?”
왕세자의 입을 빌린 그레타의 말에 앙브흐는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만, 이제 막 도착한 터라. 이제부터 살펴보려 합니다.”
그 답에 뒤틀렸던 그레타의 입매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타렌가의 후계자라더니 머리가 나쁜 건가. 저 머저리같은 재무대신의 지금 반응이나 왕세자의 질문에 담긴 축객령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타렌에 저 여자 외의 후계자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처리해 버린 후, 마법으로 무마할 수야 있겠지만 상당한 귀찮음을 감수해야 할 터. 그리고 그레타는 그런 번거로움까지 감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황녀가 구한 여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귀도 어두운 것이 앞으로의 일에 방해가 될 거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 있지 않나. 그레타는 신전, 아니 지하의 제단이 완성되는 즉시 제국으로 떠나야만 했으니까. 그녀는 크라이어 곁으로 가야만 했다. 그를 부활시킨 이후 이토록 오래 떨어져 있던 적은 처음이 아닌가. 차라리 떠나버린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조금 더 참고 인내하며 기다렸을 테지만……. 잠시간의 재회가 그녀의 애간장을 아예 녹여버렸다. 게다가 제국에 있는 그녀의 충실한 종, 아니 신의 종인 보니타가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타렌이라……. 앙브흐의 죽음과 삶을 가늠하던 그레타는 뱀처럼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늦건 빠르건 어차피 죽을 여자가 아닌가. 이 여자뿐만이 아니라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대륙의 모든 인간이 다 죽을 테지. 그리고 오롯이 크라이어와 자신만이 남으리라. 그레타의 눈가가 붉어지며 뺨에 홍조가 돌았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그레타의 입술이 속살거리자 왕세자의 입이 똑같이 움직였다.
“타렌 영애, 나와 함께 가…….”
-콰드드득! 하지만 왕세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콰쾅!
“으아아악!”
“허억! 뭐, 무슨!”
“피해! 피하라고!”
비명 소리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한데 엉켰지만, 굉음이 잦아들 때까지 누구도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그극.
“멈……췄나?”
“신이시여.”
간신히 잦아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에 겁에 질린 이들이 하나둘 눈을 굴리기 시작했고, 누군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 저기. 저기가.”
말을 잇지 못하는 이의 손끝을 시선으로 따라간 이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거대한 벽의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으니까. 귀가 먹을 듯 큰 소리가 울렸던 조금 전과 달리 사위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완성을 앞둔 건축물의 벽에 느닷없이 엄청나게 큰 구멍이 뚫렸다. 그것도 아무런 전조도 없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 사람들이 넋을 놓은 사이, 이 광경을 만들어낸 아이작은 기척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아이작이 거대한 돌벽의 한 가운데를 크라이어처럼 뚫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단지 네모반듯하게 깎인 돌의 아래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끼워 넣었던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를 빼냈을 뿐. 혹여 위험한 상황이 되었을 때 몸을 빼기 위해 일부러 해둔 장치였건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아니, 어쨌든 지금 위급 상황이긴 하지……. 마법사가 보이면 반드시 도망쳐야만 하니까. 황녀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마법사의 인상착의와 완전히 똑같은 여자. 왕세자와 함께 있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법사를 본 순간 구역질이 날 만큼 기분이 더러워졌다. 본능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보내는 것과는 별개로 생리적으로 혐오감이 치솟았다. 크라이어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짓눌리는 듯한 느낌과 어딘가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아이작은 제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지만 착실히 움직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곳에서도 그림자를 따라 누구도 알지 못하게 움직인 그는 곧 다른 사람들처럼 눈을 크게 뜨고 무너진 벽을 바라보는 앙브흐 곁에 다다랐다.
“으읍.”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앙브흐의 입을 막은 채 그대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타렌가의 차기 후작이 뜬금없이 노르덴 국에 와서 왕궁 내에서도 비밀리에 취급되고 있는 건설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아이작은 거의 확신했다. 설마 했던 그의 예상, 그러니까 앙브흐 타렌이 순전히 조사를 위해 몸소 움직였다는 것을. 지금 이 선택이 맞는지 틀린지 모르겠지만, 저 마법사를 보고 있자니 고민할 시간 따위도 없었다. 무조건 도망쳐야 해. 물론 갑작스럽게 제게 잡힌 타렌 영애가 좀 진정을 하면 설명도 하면서 빠져나가……. 왜 저항을 하지 않는 거지? 아이작은 제 품에서 소금기둥이 되어 굳어진 앙브흐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다 이내 속삭였다.
“황녀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마법사를 만나면 즉시 도망치라 하셨으니 그 명에 따라 이곳에서 곧장 빠져나가겠습니다.”
그리고 바짝 굳어 있던 앙브흐의 귓가에 ‘황녀’라는 단어가 들린 순간,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앙브흐가 안심했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전해지자 아이작의 여우 눈 끝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저항하지 않는 거야 심하게 겁에 질려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짧은 설명을 그냥 믿어버린다고?
“이렇게 쉽게 믿으셔도 되는 겁니까?”
낯선 속삭임에도 앙브흐는 다시 얼어붙거나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 않았다. 여전히 제 입을 막고 있는 그의 손등을 톡톡 가볍게 두드렸을 뿐. 아이작은 순순히 그녀의 입을 열어주었다.
“거짓말이었나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문제죠?”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둘 다라고 해야 할지. 아이작의 여우 눈이 생전 처음 보는 생물을 보는 것처럼 생경한 빛을 띠는 사이, 앙브흐는 ‘도망’이라는 그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이대로 사라지면 안 돼요. 왕궁을 헤집고 다닌 것도 모자라 사고 현장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추면 지나가던 원숭이라도 사고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지극히 정상적이다 못해 명민하기까지 한 앙브흐의 말에 아이작은 일단 고개만 끄덕였다.
“적어도 왕세자 전하께는 인사를 드려야죠. 뭐, 이런 일로 타렌의 발목을 잡지는 못할 테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앙브흐는 왕세자에게 이만 물러나겠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리다 멈칫했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줄 끊어진 인형처럼 무표정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피어오른 흙먼지에 눈을 찡그릴 만도 하건만, 그는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왕세자가 눈을 깜박인 적이 있던가? 불현듯 든 생각에 앙브흐는 어쩐지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어찌 이토록 오랫동안 눈을 깜박이지 않을 수가 있지? 시체도 아니거니와……. 하지만 그 기괴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가야만 한다는 아이작의 속삭임을 들은 앙브흐는 곧바로 왕세자를 향해 외쳤다.
“전하! 외람되오나 외부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외침에 반응한 건 왕세자가 아니라 그 옆의 그레타였다. 그녀의 눈알이 데굴 굴러 앙브흐를 바라보다 이내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리고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은 왕세자의 입술이 열렸다.
“또 보지.”
***
“하아.”
한숨을 푹 내쉰 올리비아는 팔꿈치 아래 구겨지고 있는 서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외교관 교체라니.”
타국의 요청에 의해 제국에 드나들거나 머무는 외교관이 바뀌는 경우는 그리 드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제국이 나서서 외교관을 교체하는 일은 드물다. 제국이 그럴 힘이 있더라도 구태여 타국의 자존심을 뭉개면서까지 그들의 귀족들의 거취를 결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찝찝해.”
결국 입 밖으로 낸 말에 올리비아는 이전보다 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타국의 외교관을 제국에서 교체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이전까지 하지 않았던 일이라도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 사안이 유독 눈에 띄고 꺼림칙한 이유는 다름 아닌 제안자가 보니타 하인데르였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근래 활동이 늘어나고 있는 거 같은데…….”
하인데르 후작이라면 그만한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휘두르지 않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휘두르기는커녕 거의 은둔하듯 꼭 해야만 하는 의무가 아니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두 번이나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황궁을 다녀갔다. 한 번은 크라이어가 노르덴 국의 기사이니 돌려보내야만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노르덴 국의 외교관을 교체해야 한다는 제안을 위해서.
“둘 다 노르덴국과 연관되어 있으니 이쯤 되면 너무 허술해서 연관이 있다고 의심하는 쪽이 바보 같을 지경인걸.”
그렇다고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노르덴’이 걸렸다.
“하인데르와 노르덴이라.”
회귀하기 전의 생을 통틀어봐도 둘 사이의 관계를 유추할 만한 것은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회귀 때마다 완전히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으니 이번에도 몸으로 굴러봐야 하는 건가.”
황녀답지 않은 말을 내뱉은 올리비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살아남기 위해 회귀 전과는 다른 미래를 꿈꿨다. 당연히 회귀 전과는 다른 일들을 벌였고, 그 결과 미래도 바뀌었다. 뭐…… 끝은 결국 똑같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