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아슬아슬했군.2022.02.21.
역시 도망갔어야 했나. 아니, 잡혔을 거잖아. 아니, 왜 잡는데? 이름 부르지 말라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 없잖아? 그냥 안 부르면 안되나? 왜 부르는 건데? 놀리는 건가? 그 크라이어가 날 놀려? 그럴 수가 있나?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온갖 생각이 휘몰아치다 못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던 크라이어가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표정이 그렇게 휙휙 바뀌는 거지?”
“몰라.”
그 답은 지금 그가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고, 조금 전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라고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불퉁하게 툭 하고 답을 입 밖으로 내뱉은 직후 올리비아는 불현 듯 깨달았다. 모르기 때문에, 답을 알 수도 없고, 답을 낼 수도 없기 때문에 두근 거렸던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올리비아는 문득 그런 감정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바로 공포.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공포가 아니던가. 심지어 공포를 느끼면 심장도 미친 듯이 빠르게 두방망이질 치지. 맙소사 공포와 맞닿아 있는 설렘이라니.
“뭐 이런 엉망진창이 다 있어.”
올리비아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다 이내 눈썹 끝을 축 내렸다.
“엉망진창?”
물론 거의 들리지도 않는 그녀의 중얼거림을 크라이어는 아주 정확히 들었다.
“그래. 엉망진창이라고.”
올리비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양뺨을 잡은 그의 손을 콱 쥐었다. 물론 그녀 입장에서야 있는 힘껏 쥔 것이지만, 크라이어가 느끼기로는 뭔가 솜방망이 같은 것이 손위를 덮었다 정도였을 뿐. 올리비아는 그의 손을 떼어내려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문제야. 늘 그랬지.”
처음 삶에서도, 두 번째, 세 번째를 거쳐 바로 전의 삶인 네 번째에서도 올리비아에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자, 답이 없는 난제는 크라이어였다.
“엉망진창이라는게 나 때문이었나?”
“그럼 누구 때문이겠어.”
숨 쉴 틈도 없이 답을 돌려준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뭐가?”
“뭐냐고, 그 표정.”
그의 손을 떼어내려던 올리비아는 반대로 손을 풀어버리고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표정이라니.”
“당신 때문에 엉망진창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의 표정은 아니잖아.”
“그런 사람의 표정이 따로 있는 건가.”
“방금 당신 표정은 일단 아니라는 건 확실해.”
시답지 않은 것으로 대거리를 하는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지나치게……. 그 사실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깨달은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검붉은 눈과 푸른 눈이 금방이라도 부딪칠 듯 가까워지자, 서로의 눈 안에 오롯이 그녀만이, 그만이 들어찼다. 눈을 마주한 채 서로를 향해 녹아 들어갈 듯 숨결마저 뒤섞이는 순간. 올리비아가 고개를 확 뒤로 젖혔고 그 탓에 뒷머리를 책장의 모서리에 부딪칠 뻔했다.
“아슬아슬했군.”
크라이어가 그녀를 당겨 안지 않았다면. 멀어지려 했건만, 전보다 더 가까워진 거리에 올리비아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이윽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녀의 머리 위로 닿을 듯 말 듯 입술을 내린 크라이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지만, 올리비아는 듣지 못했다. *** 시간을 조금 되돌려 올리비아가 앙브흐를 황궁으로 불러들이기 전. 당사자인 앙브흐는 노르덴 국의 왕궁을 거닐고 있었다.
“……렇게 거래가 원할히 되어…….”
노르덴 국의 재무대신이 그녀의 곁에서 입이 마르도록 떠들고 있었지만, 앙브흐는 그런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타렌가의 차기 후작인 그녀가 제국의 재무대신도 아닌 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애초에 타렌 가문에서 노르덴 국의 왕가와 거래를 시작한 이유도 ‘이윤’이나 혹은 ‘명예’때문이 아니었다. 앙브흐가 타렌 후작에게 노르덴 국과의 거래를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후작이 의아하게 되물었지 않나.
‘노르덴 국? 제국과 가깝기도 하고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혹여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는 것이냐?’
‘아니요.’
고개를 흔든 앙브흐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황녀 전하께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맑은 웃음과는 달리 진지한 해석이 필요한 답이었지만, 타렌 후작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허락했다. 황녀는 하나뿐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으니까. 물론 차기 황제인 황녀와 딸의 사이가 돈독해지리라는 계산도 잊지 않았고. 아비의 바람과는 달리 앙브흐는 특별히 이 일을 계기로 올리비아와 친근한 관계가 되어야겠다는 계산 따윈 하지 않았다. 단지 노르덴 국의, 특히 왕궁 내부의 상황을 살필 수 있다면 황녀 전하와 전하의 기사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을 뿐. 하지만 제국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들어오는 소식은 지나치게 한정적이었다. 그저 왕궁으로 들어가는 식량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돌과 건축 자재들이 대량으로 납품되고 있다는 것 뿐. 그렇기에 앙브흐는 주저없이 노르덴 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타렌’의 후계자다운 대접을 받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인데도 왕세자를 알현했고, 선약 없이 재무대신을 만났다. 앙브흐는 그에게 더 좋은 거래 조건을 내밀며 말했다.
‘타렌의 이름 아래 거래된 물건들이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그녀의 말에 재무대신은 대단히 기뻐하며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왕궁 곳곳에 비치되어 쓰이고 있는 고가의 사치품 및 일상에 쓰이는 사소한 물건들까지 앙브흐는 일일이 확인했다.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과연 타렌이군요. 거래 후에도 잊지 않고 이렇게…….”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아,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죠.”
앙브흐는 타렌에서 제공했을 것이 분명한, 재무대신의 집무실에 놓인 희귀한 장식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 가문에서 납품한 것들 중 하나가 빠졌군요.”
그녀의 말에 재무대신은 그럴 링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전부 확인했습니다만.”
“아니요. 돌이 빠졌잖아요. 어마어마한 양의 품질 좋은 돌이요.”
“그……그랬나. 뭐 돌이니 정원에 잘 쓰이고 있을 겁니다. 하나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마무리까지 잘 해야죠.”
순진할 얼굴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직접 봐야겠다고 말하는 앙브흐의 말에 재무대신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타렌 영애라 하여도 이 이상은 안 됩니다.”
그에 앙브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된다니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단지 제대로 된 물품이 알맞은 장소에서 적절히 쓰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에요.”
한 군데 어긋남 없는 정론을 들이밀었지만, 재무대신은 요지부동으로 고개만 흔들 뿐. 그도 그럴 것이 그 ‘돌’이 쓰이는 곳은 왕궁 내에서도 몇몇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으니까. 왕궁 한쪽에 궁을 허물고 새로운 건축물을 올리는데 비밀이라니 웃기는 말이었지만, 재무대신은 그것이 비밀이라는 사실을 마법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개만 흔드는 재무대신을 향해 앙브흐는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노르덴 국과의 거래는 이것으로 끝내죠.”
너무나도 가볍게 떨어진 말이라 재무대신은 눈만 껌벅였지만, 이윽고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버럭 고함쳤다.
“무, 무슨! 거래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렇게 마음대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소!”
하지만 재무대신의 귀여운 반발은 타렌의 이름앞에 모조리 묵살되었다. 결국 그는 구겨진 휴지같은 얼굴을 하고 앙브흐를 데리고 비밀이어야만 하는 건축현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아이작은 손을 흔들며 떠나가려는 어이를 일단 잡았다. 제 눈이 잘 못 된 것이 아니라면 저 여자는 분명 타렌 영애다. 황녀를 사로잡으라는 터무니 없는 임부를 받고 제국으로 향했으니 당연히 제국의 주요 인사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당연하게도 타렌 영애는 그 주요 인사에 해당하는 사람이고. 그래.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심지어 얼마 전 죽을 고비까지 넘긴 사람이 갑자기 노르덴 국에서 나타나다니? 앙브흐를 발견한 아이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갑자기 그림자속에서 튀어나오는 짓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의 말이 어렴풋이 떠오르긴 했다.
‘타렌에서도 거래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대략적인 것밖에 파악하지 못했어.’
설마…… 대략적인 정보가 아닌 구체적인 정보를 찾기 위해 온건 아니겠지. 자신처럼 정보 수집과 교란에 전문적인 기술이 없는 타렌가의 차기 후작이 그런 이유로 냅다 적지 한가운데에 들어오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이미 들어왔잖아? 아이작은 더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지하로 내려가겠다는 계획을 즉시 폐기했다. 그는 숨쉬듯 자연스럽게 원래 일하던 자리로 복귀했고, 그 탓에 아이작의 바로 뒤에서 돌을 나르던 인부가 덜컥 멈춰섰다.
“으응? 왜 갑자기 멈춘 거야?”
돌에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던 인부는 돌아오는 답이 없어 결국 고개를 한껏 꺾어 돌덩이 너머를 봐야만 했다. 그렇게 그녀를 처음 발견한 아이작을 시작으로 그 곳에서 일하던 이들 전부가 하나 둘 손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갑작스러운 손님을. 바람에 흩날리는 매끄러운 분홍빛 머리와 하얗다 못해 뽀얀 얼굴에서 빛나는 더없이 환한 미소까지. 땀내와 먼지가 진동하는 곳에서는 절대 볼 일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인부들과 건축가 그리고 아이작까지 혼란스럽게 만든 앙브흐였지만, 등장과 함께 퇴장을 종용당했다.
“여깁니다. 이제 확인하셨으니 돌아가시죠.”
재무대신은 불안한 얼굴로 초조하게 주변을 흘긋거렸다. 거래를 모조리 중지하겠다는 협박에 데려오긴 했지만, 혹시라도 왕세자 전하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다음 순간, 재무대신은 그 작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떠야만 했다.
“왜 이곳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