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그저 네 이름을 부른 것 뿐인데.2022.02.17.
크라이어의 속삭임이 동그란 정수리를 타고 흘러 내리는 순간, 올리비아의 어깨가 파드득 떨렸다. 지금 방금, 분명히……. 황녀가 아니라 올리비아라고, 이름으로 불렀……잖아? 아니지. 잘 못 들었나? 잘 못 들은 거겠지? 곧이어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크라이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더는 잘 못 들었다고 할 수도 없는 너무나도 선연한 그 부름에 올리비아는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들지 않아서 눈앞이 캄캄했지만, 그래서인지 다른 감각은 훨씬 예민해져 있었다. 코끝으로 낡은 종이 서책 냄새와 함께 서늘한 바람을 닮은 그의 향기가 스치자, 올리비아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크라이어가 그녀의 코앞에 있는 것 그리 드문 일도, 놀랄 일도 아닐 텐데. 분명 그럴 텐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가슴이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는 걸까. 이름? 이름으로 불러서? 왜? 왜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는 건데?
“왜 여기에서…….”
“가, 갑자기 이름으로 왜 불러?”
크라이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먼저 외쳤다. 여전히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기에 목소리는 뒤집어 졌고, 말이 다 뭉그러졌지만, 크라이어는 그녀의 말을 정확히 알아 들었다. 하나, 그는 바로 답하지 않고 올리비아의 마른 어깨에 흐드러진 새빨간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웃었을 뿐. 사위를 둘러싼 거대한 책장에서 새어나오는 햇살에 바짝 마른 나무 향기가 고요히 가라앉은 가운데 침묵이 더해졌다. 몇 초가 지난 걸까, 아니 몇 분이나 지난 걸까. 올리비아는 돌아오지 않는 답에 조바심이 나서 풍성한 치맛자락에 숨은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렇다고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전혀 뜻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훔쳐보다 들킨 꼴이니 황녀 체면이 말이 아니다. 뭐…… 애초부터 크라이어에 한정해서 ‘황녀’나 ‘체면’이라는 건 없었던 거 같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수치심인지 부끄러움인지는 살아 남아 올리비아의 얼굴을 홧홧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지. 지금 이 생각도 그저 명분일 뿐. 진실은 알고 있지 않나.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황녀나 너, 당신 따위의 명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단지 그 뿐인데 얼굴이 뜨거워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다.
“부르지 마. 그러지 말라고. 그냥 매번 부르던 것처럼 황녀라고 하면 되잖아.”
왜 이렇게 된 건지, 또 어찌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이리된 원인을 막아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기에 보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굶주림과 포만감이 동시에 혼재하는 크라이어의 표정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올리비아.”
하지만 그는 올리비아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올리비아.”
“그렇게 부르지 말…….”
“올리비아.”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움찔거리던 올리비아의 둥근 이마가 이윽고 무릎 사이로 빼꼼 솟았다. 그 동그란 이마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기에 크라이어는 그 자신도 잘 알 수 없을 만큼 만족감이 들었다. 기실 크라이어는 올리비아가 이 곳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처럼 숨소리나 심장 뛰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올리비아가 걷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으니까. 다른 이들도 제각기 다른 발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가 기억하는 발소리는 하나 뿐이었다. 올리비아 볼셰이크의 것. 왼쪽 다리가 오른쪽보다 더 긴건지 왼쪽 발끝을 살짝 끄는 듯한 특유의 소리. 단지 발소리 뿐만이 아니었다. 올리비아가 크라이어에게 익숙해진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에게 익숙해졌다. 그리고 떠올리면 놀랄 만큼 그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올리비아는,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부분들을. 물론 누구에게도 그런 것들을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뭐, 말을 해도 믿지 않을 테지만. 오롯이 그만이 아는 올리비아라니. 나쁘지 않은 울림이다. 그리고 지금도 나쁘지 않았다. 올리비아를 아는척하지 않았던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녀가 제 곁으로 다가와 종알대리라 예상했기에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그를 부르지 않았기에 그 예상은 빗나갔지만, 크라이어는 그때까지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초면 다 읽을 책을 마무리하고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한데, 올리비아는 그를 부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가서지도 않았다. 그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숨어서, 그래…… 딴에는 ‘숨어서’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뭘 하는 건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지만, 책장 뒤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행동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져 그만 웃어 버렸다. 그래서 크라이어는 기다렸다. 올리비아를 부르지도,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않고 모르는척했다. 하나, 그렇게 숨어서 혼자 부산하던 올리비아가 결국 자신에게 오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 앉는 순간. 크라이어는 참지 않고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그가 올리비아를 이름으로 부른 것도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인 그녀를 발견한 순간, 저절로 흘러나왔을 뿐. 그 뒤에도 계속 이름으로 부른 건 그녀가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지만. 동그란 이마가 보이자 이젠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고개 들지 않으면 계속 부를 거다. 올리비…….”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불러!”
그리 크게 외치긴 했지만, 올리비아의 고개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새빨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까지 발긋발긋해서 크라이어는 괜시리 허기가 졌다. 천천히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이가 드러나기 직전, 올리비아의 고개가 꾸물꾸물 올라왔다.
달팽이보다 느린 속도로 고개를 든 올리비아는 눈을 꾹 감고 양손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진 뺨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아니, 뺨 뿐만이 아니라 코끝부터 귀 끝까지 전부 빨갛게 물들었으니 애초부터 가리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올리비아는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제게 꽂히는 크라이어의 시선을 선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때와는 달리 시원한 공기가 손가락 사이의 뺨을 간질었지만, 얼굴이 식기는커녕 점점 더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천만 다행으로 크라이어는 굳이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지 않았다. 대신 올리비이가 미처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왜 부르지 말라고 했지?”
“뭐?”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지 않나.”
크라이어는 느른한 시선으로 올리비아를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왜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지? 네가 그리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저 네 이름을 부른 것 뿐인데.”
그건 그랬다. 욕도 아니고, 이상한 별명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적절한 명칭도 아닌 올리비아가 태어난 날 받았던 이름. 크라이어는 단지 그 이름을 불렀을 뿐. 답은 물론이고 할 말마저 궁색해진 올리비아는 목이 막혀버렸고, 그 사이 크라이어는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저보다 한참이나 작고 보드라운 손을 아주 간단히 내려버렸다. 간신히 얼굴을 가려주고 있던, 아니 가려주는 느낌이라도 내주던 손이 사라지자 올리비아는 어쩐지 필사적으로 크라이어의 눈을 피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정처 없는 시선이 40년 전 볼셰이크의 역사가 담긴 책장에 달라 붙음과 동시에 귓바퀴를 살살 긁어내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 안되는 이유가 있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이름에 저주가 걸린 것도 아니거니와 신분 차이를 들먹이며 감히!라고 역정을 내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관계가 아닌가. 하나, 지금 입을 열지 않으면 또 그가 저를 부를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가까스로 입술을 열었다.
“모…….”
간신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숨처럼 목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제대로 된 말은 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기다리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으면 쏙 들어갈 듯 조그맣고 귀여운 토끼가 저를 피해 숨으면 쫓아가 손안에 쥐고 싶은 법이 아니던가. 물론 지금 그녀는 그의 코앞에 있어 쫓아갈 일은 없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눈을 보고 말해. 올리비아.”
빨간 얼굴을 한 채로는 그녀가 절대 그와 마주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크라이어는 그리 말했다. 그에 새빨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작은 귀가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도망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일초에도 수 십 번씩 들었지만, 도망가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지? 해결되는게 없기는 뭐가 없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최고의 해결이잖아! 올리비아가 마음을 굳히고 입구쪽으로 흘긋 시선을 주는 순간. 그녀의 시야가 차단되었고, 눈과 문 사이를 가린 것이 크라이어의 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도망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왜 도망을 못가게 하는 건데.”
“그러면 이름으로 계속 불러도 된다는 것으로 알겠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 자리를 빠져나갈 방법 같은 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는 건지. 입안을 잘근잘근 물던 올리비아는 결국 먼 곳만 바라보던 시선을 크라이어를 향해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한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올리비아의 눈을 가리고 있던 그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발간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뺨보다 더 빨간 귀 뒤로 넘겨준 그가 속삭였다.
“이제 말해 봐.”
검붉은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이 터질듯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어서 올리비아는 입을 앙다물었다. 다음 순간, 귓가로 낮은 웃음소리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심지어 어느새 제 뺨을 감싼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약한 진동까지 느껴지니, 그가 웃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하는 헛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올리비아는 해일처럼 밀려오던 연고를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던 조금 전보다 더 부끄러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이런 쓸데없는 거 깨닫고 싶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