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예상보다 더 크잖아.2022.02.10.
해가 서쪽을 향해 기울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입맛이 없어 점심도 거른 올리비아의 손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펜이 종이 위를 넘나드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얼마나 흘렀을까. -찌, 지지직. 검은 잉크가 고인 서류의 종단 부분이 찢어지는 소리가 길게도 이어졌다. 이윽고 핏기가 가신 입술 사이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고 싶으면 다 하는 거냐고.”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올리비아의 눈 밑은 심하게 그늘졌다. 기분상 턱 끝까지 내려온 눈 아래 검은 그림자를 문지르며 올리비아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으니까.’
귓가에 선명하게도 울리는 나지막한 속삭임에 올리비아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어깨를 떨다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뭐 이마 맞댄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이참에 언제 어느 때건 그 쓸데없이 잘난 얼굴이 가까워져도 정신 놓지 않도록 익숙해지면 좋지.”
꽤나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자기 합리화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올리비아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빈자리를 시선으로 더듬고 있었다. 저 자리에 그가 앉은 지 얼마나 된 걸까. 새삼스럽게 그와의 만남을 떠올리던 올리비아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지나치게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크라이어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정말이지 예상보다 더 크잖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에 올리비아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이게 이럴 일인가? 분명 크라이어라는 남자의 존재가 살아남으려는 그녀에게 이 세상 누구보다도 크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비어 있는 자리처럼 텅 빈 제 가슴께를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고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상실감을 참지 못한 올리비아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 -똑똑.
“전하, 조사관이…….”
노크 소리와 함께 울린 사용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했다.
“들라 해.”
곧 문이 열리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의 인영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길을 걷다 보면 열에 열은 그냥 어디서 본 얼굴이려니, 옆집 삼촌 얼굴이려니 할 남자가 올리비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
“되었어. 그보다 조사한 건?”
조사관의 인사를 잘라버린 올리비아는 다시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다행스럽게도 무작정 크라이어를 찾아 나서기 전에 할 일이 생겼다. 아니…… 다행인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행 아닌가? 그가 없다. 그가 곁에 없다. 크라이어가 제 옆에 없다. 단지 그뿐. 그래서?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 그리 넘어갔어야 했다. 아니, 그렇게 넘어갈 것도 없이 신경조차 쓰지 말아야 하는데……. 다른 일이 생겼다며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다시 이곳에 있지도 않은 크라이어에게 골몰한 올리비아는 몰랐다. 그녀 앞에서 조사한 바를 차근차근 조리 있게 보고하던 조사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오랫동안 황실 정보부에서 일한 베테랑답게 조사관은 이미 자신이 입을 열 때부터 황녀 전하의 신경이 콩밭에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감히 황녀 전하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거나 옥체에 손을 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제 할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하여, 원한을 가질만한 특별한 일은 없다고 사료됩니다.”
그가 입을 다물자 황녀의 집무실에는 기가 막힌 정적이 내렸다. 그러기를 한참, 이대로 있다가는 언제까지고 침묵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든 조사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황녀 전하?”
이전보다 조금 크고 강하게 목소리를 내자 그제야 올리비아의 초점이 돌아왔다.
“전하?”
“아, 그래.”
올리비아가 손을 휘젓자 조사관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아니, 자네는 할 일을 했을 뿐이지. 보고서는?”
올리비아가 고갯짓하자 조사관은 즉시 서류 뭉치를 공손히 건넸다. 조사관이 한 보고를 모조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탓에 올리비아가 보고서를 훑는 시간은 꽤 길었다.
“결국 죽은 사용인은 특별한 원한 관계도 없고, 빚도 없고, 주변 사람들이 얽힐 만한 더러운 과거도 없었다?”
“네. 황궁에서 일하던 사용인이니 애초에 그런 것이 있으면 들어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황궁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걸릴 만한 일은.”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황궁에 더는 발을 붙이지 못했을 테니까.
“으음.”
올리비아는 서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이 사람을 하나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심지어 황궁의 사용인이라면 보통 사람보다 몇 배의 부동심을 강요받지 않나. 그런데도 그 정도로 감정을 폭발시키려면 어지간한 사연이 있어야 할 터. 한데 조사 결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이거 더 찜찜한걸. 스스로가 생각해도 과민반응에 강박증 같았지만, 혹시? 설마? 하면서 넘어가는 건 회귀 4회차인 올리비아 사전에 없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밝혀진다 해도 결과론적인 일일 뿐. 그녀는 찜찜함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달밤에 그녀를 한껏 뛰게 만들었던 습격. 암살자도 아니요, 황녀인 자신을 노린 것도 아니지만 어쨌건 찜찜한 사건이다. 신경을 갉작거리는 이 사건을 그대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제 감을 그다지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대륙 전체의 인간들을 다 죽여 없애고 ‘정화’ 시키려는 고대신을 상대로 그 ‘정화’를 위한 전쟁을 막아야만 한다. 그러니 돌다리도 한 번, 아니 몇 번이고 두들겨 건너는 편이 낫겠지.
“조금 더 파봐.”
이미 팔 건 다 판 것 같았지만, 조사관은 올리비아의 명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조사관이 집무실을 떠난 후에도 올리비아는 서류를 다시 꼼꼼히 살폈다.
“흐으으으음. 과도 들고 설치던 여자하고 교류가 있던 사용인들이 많지는 않은데.”
아마도 이 중에 그녀가 죽이려던, 올리비아가 옷을 잠시 빌렸던 사용인도 있으리라. 다른 옷과는 달리 리본이 좀 특이했던……. 그러고 보니 정작 그 옷의 주인을 찾으라는 명을 내리진 않았다. 구태여 명을 내릴 필요도 없으리라. 황녀 궁에서 일하는 사용인이니 복장 중 리본이 특이한 사용인을 불러오면 될 테니까.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녀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모을 수 있는 정보를 전부 모은 후 그녀에게 질문하면 좀 더 양질의, 진실에 가까운 정보를 뽑아낼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을 습격했던 여자는 분명 증오로 들끓는 목소리로 외치지 않았던가. 분명 황궁 조사관이 발견하지 못한 원한 관계가 있을 터. 그러니 그 밤, 올리비아가 빌려 입은 옷의 주인을 불러들이는 건 좀 더 지난 후가 되리라. 서류를 죽 긁어 읽던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어라?”
‘타렌’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피해자의 지인의 지인의 지인이라는 거의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긴 했지만, 어쨌건 타렌 가문의 사람이 보고서에 이름이 올라오다니.
“돌덩이 관련으로 조사를 부탁한 것도 있으니, 일단 만나 볼까.”
마음을 정한 올리비아는 시간 끌지 않고 곧바로 앙브흐 타렌을 불러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앙브흐가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타렌 영애가 노르덴 국에?”
“네. 타렌가에서 부름에 응하지 못해 송구하기 그지없다 하며 이것들을 진상했습니다.”
돌돌 말린 양피지가 야무지게 묶여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그것을 끌러 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을 뿐. 타렌 가문에서 올리비아의 명을 거부할 리가 없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타렌의 유일한 후계자는 실종되어 죽었을 테니까. 게다가 앙브흐는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결국 앙브흐가 노르덴 국에 갔다는 건 사실일 텐데.
“왜?”
돌에 관한 조사를 맡기긴 했지만 타렌 가문의 후계자가 구태여 노르덴 국에 갈 이유가 있을까? 고개를 기울이던 올리비아가 문득 중얼거렸다.
“노르덴 국이라면, 아이작이 있잖아? 두 사람, 만났으려나…….”
*** 노르덴 국 왕궁의 중심에 위치한 곳. 원래 있었던 노르덴국의 역사와 전통이 담긴 궁은 철거된 지 오래되었고 공터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어이! 이제 여긴 막아!”
“아, 아직! 아직! 거기 지지대는 치우면 무너지니까!”
원래는 없던 지하로 이어지는 입구 근처에서 인부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입구’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여러 사람이 목청껏 외치는 고함과 목재며 석재가 굴러다니면서 울리는 굉음까지. 먼지와 소음으로 엉망진창인 현장이었지만, 인부들의 얼굴은 꽤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뛰듯이 움직이는 인부들 사이에 섞인 아이작의 얼굴은 그들과 달리 어두웠다. 그간 잠잘 시간도 줄여가며 목이, 아니 눈이 빠지도록 완공되는 건물을 관찰했건만.
“대체 저게 뭐야.”
아이작은 여우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왕궁 밖에서 들어온 돌덩이들은 크게 비밀스럽지 않게 옮겨졌다. 그런데도 누구도 왕궁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게 정말이지 ‘마법’ 다웠지. 여하간 장정 몇 사람이 붙어야만 옮길 수 있는 돌이나 그보다 작은 돌들은 층층이 쌓여 하나의 건축물이 되었다.
“이건 뭐…… 너무 대놓고 제단이잖아. 아니, 겉모양만 제단이고 다른 용도인가? 아무리 봐도 제단 같은데. 제단이 아니라면 딴 걸로 쓸 수가 없는 건물인데?”
그렇기에 아이작은 혼란스러웠다. 아주 엉성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마법을 부렸는지 뭘 했는지 어쨌건 이 상황을 아는 이는 지극히 적었다. 마법까지 써가며 비밀을 유지했으면서 대체 왜 건축물은 대놓고 제단이란 말인가. 지나가던 원숭이가 봐도 지금 그의 눈앞에서 완성되기 직전인 제단은 대륙에서 흔히 모시는 신이 아닌 ‘전혀 다른 신’을 위한 것이지 않나. 처음에야 숨어서 살폈지만, 그것으로는 도통 정보를 모을 수가 없어 변장을 하고 인부에 섞여 들어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법의 영향인지 매일 같이 일하는 이들의 얼굴도 잘 구분하지 못했기에 쉽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는 했는데…….
“뭘 멍하니 있어! 얼른 그쪽 잡아!”
“아, 네.”
네모 반듯하게 깎인 돌덩이를 옮기던 아이작이 마치 내일 날씨를 물어보듯 여상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거의 완공인 거 같은데, 무슨 용도일까요? 평범한 궁은 아닌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