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내가 이렇게 하고 싶으니까.2022.02.07.
크라이어가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 있었으니까. 올리비아가 한 걸음만, 아니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나면 그의 품에 안착할 만큼 가까이. 쓸데없이 날카로운 크라이어의 턱을 올려다보며 올리비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정말?”
“뭐가.”
너무 무심한 답이라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지만, 올리비아는 아예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가슴팍에 뒤통수를 기대며 다시 물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붙…… 어? 설마 암살자라도?”
“없다. 그보다, 간다.”
“어? 잠깐, 뭐…….”
올리비아가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크라이어는 그녀를 훌쩍 안아 올린 후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지난밤의 땅처럼 궁의 복도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갈라지지는 않았지만, 빠르기는 어젯밤 못지않았다.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 집무실에 도착한 크라이어는 멍한 얼굴을 한 올리비아를 아예 책상에 내려주었다. 얼떨결에 책상 위에 앉게 된 올리비아는 눈을 깜박이다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뭐냐고!”
“서류, 보여줄 거 있다며.”
대놓고 말을 돌리는 크라이어를 향해 씩씩거리던 올리비아는 이내 한숨을 팍 내쉬었다. 저렇게 그냥 넘기려고 드니 이상하긴 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냥 넘길 만큼 중요치 않은 일일 테니까. 고개를 저은 올리비아는 책상 위에 앉은 채로 양쪽에 기둥처럼 쌓인 서류를 더듬었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이건가? 아, 이거네.”
용케도 기둥을 무너뜨리지 않고 서류 뭉치 서너 개를 빼냈다 끼운 올리비아는 이내 뭉치라고 하기에는 얇은 서류를 꺼내 들었다.
“새벽에 길을 지나던 사용인이…… 이건 됐고, 죽은 여자도 궁의 사용인이었네. 그리고 범인에 대한 단서는 갈라진 땅과 한 번에 잘린…… 이것도 별로 필요 없는 정보고.”
서류를 단번에 훑은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범인을 잡기 위한 정보 위주로 취합했네. 피해자에 대한 건 꽤 오래 근무한 궁의 사용인이고, 특별한 원한 관계는 없다 정도밖에 없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보고서였다. 궁에서 사용인이 죽어 나갔고, 흉수는 불명. 당연히 범인을 잡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할 터. 하지만 그 범인은 올리비아의 눈앞에 있고, 피해자로 불리는 여자는 올리비아를 죽이려 들었던 자다.
“내가 했다고 알리면 곤란해지는 건가.”
“아니. 황족 시해는 즉결 처형이니 모든 경위를 밝히면, 이 사건은 그대로 묻힐 테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올리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으음.”
올리비아는 서류를 내려다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범인이니 뭐니 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자신을 습격하려다 죽은 여자의 사정.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 리본까지 가지고 있으면서어어어!’
그 여자는 증오와 악의가 폭발하는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그 정도 원한을 쌓으려면 대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올리비아는 문득 서류를 구겼다. 아니지. 꼭 알아야 하나? 이미 끝난 일인데. 이리저리 끼워 맞춰 봐도 사용인들 간의 사사로운 원한이 아닌가. 비록 그 원한이 평범한 건 아닌 거 같지만. 응? 평범하지 않다고? 올리비아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 미친 살인마 놈도 그냥 지나가는 사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올리비아의 눈앞으로 사람들을 정화 시킨 답 시고 개소리를 하던 놈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고뇌에 빠진 올리비아를 앞에 둔 크라이어의 미간에도 골이 파였다.
“안 보여.”
올리비아가 바로 눈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기는 하지만,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통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얼굴이라면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솜털 하나까지 정확하고 선명하게. 하지만 눈앞에 실물이 있는데 왜 그려야만 하지? 크라이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사락.
“응?”
올리비아의 이마 께로 흘러 내려온 새빨간 머리카락을 넘기는 딱딱한 손끝이 사라지기 무섭게 크라이어의 이마가 맞붙었다. 그렇게 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온기가 붙들릴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때. 빠르게 눈을 깜박이던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이미 어이는 짐을 싸 들고 가출한 지 오래. 크라이어의 이름이 아니라 대명사로 그를 지칭한 올리비아가 말했다.
“왜 이마를 맞대고 있는 거야?”
“고민하는 거 같기에. 함께하자고.”
너무나도 태연한 답에 올리비아는 잠시 수긍할 뻔하다가 얼른 정신을 다잡고 되물었다.
“뭐?”
“볼셰이크의 조상이 했던 말 중에 있더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아니, 그야 그렇지만.”
이걸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저 크라이어에게 뻔뻔이라는 단어를 붙이자니 위화감이 너무 심한데. 그보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돌발 행동을 하는…….
“작아서 그런가, 따끈하네.”
혼란에 빠져 있던 올리비아의 귓가로 웃음기 섞인 나지막한 속삭임과 함께 그의 숨결이 흘러들어왔다. 한순간 올리비아의 동공이 수축했다. 조금 전까지는 너무나도 황당한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왜…… 왜 이렇게 가까워. 진심으로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익숙한 얼굴이다. 눈감고도 선연히 그려낼 수 있을 만큼 많이 본 남자가 아닌가. 아니, 그렇게까지 많이 보지 않았더라도 일단 네 번이나 자신을 죽인 남자이니만큼 이미 그야말로 눈꺼풀에 각인될 만한 얼굴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것이라도 매일 보면 감흥이 흐려지는 법. 조금 전, 스스로 그의 뺨을 당겨 얼굴을 가까이 붙였을 때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왜 하필 지금 이 쓸데없이 잘난 얼굴이 새삼스럽게 다가와서는! 그를 향한 사사로운 감정 따위가 없어도 저따위 얼굴을 이렇게나 가까이 들이대면……. 의식하지 못했을 때야 당연히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한번 의식하고 나니 점점 귀 끝이 화끈거렸다. 조만간 얼굴 전체가 빨갛게 익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이마를 맞대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지극히 상식적인 설명을 변명처럼 늘어놓으며 슬그머니 머리를 뒤로 빼려는 순간, 크라이어가 답했다.
“아니.”
너무나도 짧은 답이라 올리비아는 목에서 힘을 빼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라고? 그럼 무슨 이유라도 있어?”
고민을 나눌 때 이마를 맞대면 머리가 좀 더 잘 돌아간다던가? 그러고 보니 저 괴물은 지난 네 번의 삶에서 겪었던 전쟁터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전쟁 초기에는 나름대로 전략 전을 펼치기도 했……. 막 과거로 빠지려던 올리비아의 정신이 크라이어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단숨에 현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이마를 맞댄 채 크라이어는 눈가를 길게 접으며 답했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으니까.”
***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풀리지 않은 두 가지, 아니 여러 가지 문제를 두고 이마를 맞대고 있을 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굳은 얼굴을 한 채 황궁을 나선 보니타는 곧장 하인데르 저택으로 향했다.
“후작님 돌아오셨…….”
“아무도 들이지 마.”
맞이하는 사용인들을 뒤로한 채 보니타는 곧장 후작 저의 안쪽, 그녀만의 방에 들어섰다. 낡은 가구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눅눅하게 고인 방의 중앙. 지금 쓰이는 것들보다 한참 전에 유행하던 물품들이 자리한 곳에서 후작은 거침없이 침대 곁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곧장 무릎을 꿇고 침대의 중앙에 정갈히 놓인 작은 손거울을 향해 기도했다.
“신이시여.”
그리고 기적처럼 작은 손거울이 그 기도에 반응해 빛나기 시작했다. 낡은 손거울이 기괴한 문양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직후. 거울 너머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보니타. 신의 종이여.”
그에 보니타는 경건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일은 어찌 되었지.”
마치 주인이 종을 부리듯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명령에도 제국에서 가장 세가 큰 귀족 중의 귀족, 보니타 하인데르는 목줄이 매인 개처럼 얌전히 답했다.
“말씀하셨던 대로 제국에 모실 명분은 마련했습니다.”
황제와 황녀에게 기사의 거취를 운운한 건 결국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노르덴 국에서 올 ‘또 다른 손님’이자 그녀가 진정으로 모시는 이를 위한.
“그래. 제단이 마무리되는 대로 제국으로 가도록 하지.”
“네. 오시기 편하도록 몇 가지 조치를 더 취하겠습니다.”
“너는 실망시키는 법이 없어.”
“과찬이십니다.”
사막의 모래바람보다 메마른 답에 손거울 너머의 목소리가 덧붙였다.
“두 번째 신의 종도 네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될 거야.”
“그렇다면.”
“그래. 정화의 때가 당겨질 수도 있다는 말이지. 이만 가봐야겠어. 곧 볼 수 있기를 바라지.”
“네. 그레타 님.”
핏기없는 보니타의 입술 사이로 노르덴 국의 왕세자 곁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마법사가 죽은 지금, 아니 마법사가 죽기 전부터 고대신과 가장 가까운 여자. 그렇기에 보니타는 거리낌 없이 그레타를 섬겼다. 보니타 하인데르. 하인데르 후작가의 정통 계승자이며 푸른 피가 흐르는 귀족. 그녀는 과거의 어느 날, 어떤 사건을 겪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아닐 거야.’
제정신이 아닌 듯 같은 말만 중얼거리며 침대보를 꽉 잡는 보니타의 어깨를 따뜻한 팔이 감싸 안았다.
‘딸아, 정신 차리거라. 제발 이 아비가 이렇게 비마.’
보니타의 아버지, 당시 하인데르 후작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딸을 감싸 안았다.
‘아니잖아요. 아버지. 아니죠?’
아비의 어깨에 기대, 아니 매달려 보니타는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그녀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놓아주거라. 세상에 나오지 못할…….’
거기까지 떠올린 보니타의 메마른 얼굴이 한순간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래. 보니타의 세상은 그날 끝나버렸다. 그런데도 세계는 여전히 평화로웠고 태양이 뜨고 졌으며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어렸다. 그날부터 보니타는 권력에 관심을 잃었다. 재물에도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후작의 권리에 관심이 없는 만큼 의무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오장육부를 뒤집고 애간장을 끊어지게 만드는 배신감과 증오, 그런데도 여전히 남은 미련에 말라갔을 뿐.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신이 도래했다. 고작 작은 손거울에서 그야말로 기적처럼. 그리하여 그레타의 목소리를 빌린 신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계는 정화되어야 한다.’
보니타는 정화가 무엇인지 정확히 들었지만, 신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보니타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총명해서 지독한 기억을 잊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알았다. 세계가 정화될 때 그녀도 정화되리라. 알면서도 그 순간부터 보니타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정화된 세계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