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날 봐.2022.02.03.
보니타가 입을 다물기 무섭게 올리비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요. 나의 기사라고 했어요.”
“전하, 그는 노르덴 국에 속한…….”
올리비아는 보니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랐다.
“곧 바뀔 겁니다.”
그건 바람도, 예언도 아니었다. 노르덴 국에서는 아직 알지 못하는 통보였을 뿐. 보니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올리비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그런 시선을 능숙하게 흘리며 말했다.
“후작과의 기세 싸움으로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겠지.”
가느다란 손가락이 각설탕을 집어 들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지 않나.”
올리비아는 적당히 식은 차가 걸쭉해지도록 각설탕을 넣으며 말을 이었다.
“황녀의 손님으로 있는 기사의 의지를 존중하겠다.”
보니타는 굳은 얼굴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러니 날 찾아왔겠지.”
황녀가 손님이라 공개적으로 천명한 이를 후작이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없을 터. 물론 타국에서 온 그냥 ‘손님’이라면 얼마든지 후작이 선약을 잡고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이 경우는 황녀가 그 손님을 특별하게 여긴다고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황이니 그리하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되었어. 후작은 무투 대회때 자리하지 않았으니 그를 처음 보겠군.”
올리비아의 말에 보니타는 별다른 답 없이 티스푼을 집어 들었다. 그녀와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올리비아는 구태여 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을 올렸다.
“이리 급한 걸음으로 왔으니 더 지체할 수야 없겠지.”
올리비아가 설렁줄을 당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소리 없이 열린 문 뒤로 기척도 없이 크라이어가 나타났다. 지극히 정중하게 황녀를 향한 예를 취하는 크라이어를 바라보던 올리비아의 팔에는 소름이 돋았다. 지금의 크라이어를 백 명이 본다면, 백 명 다 ‘기사’를 떠올릴 것이다. 굳건하고 탄탄한 몸, 꼿꼿한 기상, 절도 있는 몸짓과 진중하기 그지없는 표정까지. 그야말로 어느 소설이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사’의 표본이 아닌가. 그래. 지나치게 기사다워서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할 만큼……. 올리비아는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눈짓했다.
“보니타 하인데르 후작. 그리고 이쪽은 크라이어.”
일부러 한번 말을 끊고 뜸을 들인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나의 기사다.”
그에 보니타의 강퍅한 광대가 미미하게 떨렸지만, 찰나였을 뿐. 크라이어가 보니타를 향해 예를 취했지만, 보니타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그저 티스푼을 내려두었을 뿐. 그런 둘을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할 필요 없겠지. 각자 바쁜 사람들이니까.”
그녀가 무언으로 동의를 구하자 무겁게도 닫혀 있던 보니타의 입술이 벌어졌다.
“네.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요.”
보니타가 입을 다물기 무섭게 올리비아가 크라이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묻겠어.”
올리비아는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깊숙이 묻었다.
“제국에 남겠나, 노르덴 국으로 돌아가겠나?”
군더더기 없는 질문이었다. 그를 잡기 위해 제국에 남으면 무언가를 손에 쥐여주겠다는 약속도, 노르덴 국으로 돌아가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압박도 없는 단순한 물음. 일자로 다물려 있던 크라이어의 입이 열렸다.
“제국에 남겠습니다.”
지나치게 간결했던 질문만큼이나 대단히 짧고 명료한 답이었다. 크라이어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올리비아가 보니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후작. 논쟁할 거리가 더 남았나.”
그에 보니타는 올리비아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충분합니다. 전하.”
고저 없는 그녀의 목소리와 차분한 답까지. 이른 아침의 뜻밖의 방문은 이렇게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올리비아가 축객령을 내리기도 전에 보니타는 몸을 일으켰고, 끝까지 크라이어를 눈에 담지 않고 그대로 황녀 궁을 나섰다. 보니타가 사라진 후 얼마나 지났을까.
“이상해.”
올리비아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반쯤 빈 보니타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이?”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맞은편에 앉으며 한쪽 다리를 꼬았다. 보니타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사의 기자도 찾을 수 없는 불손한 태도였지만 올리비아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래. 크라이어는 이래야지. 아깐 너무 소름끼쳤…….”
“속마음이 흘러나오는 거 같다만.”
피식 웃는 크라이어를 향해 올리비아는 진지하게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내 진심이야. 아까 진짜 소름 끼쳤어.”
어느새 다리를 풀고 손을 뻗어 그런 올리비아의 콧잔등을 가볍게 튕긴 크라이어가 다시 물었다.
“흰소리는 그만하고, 무엇이 이상하지?”
“아. 음. 저런 사람이 아니거든.”
밑도 끝도 없이 나온 말이었지만, 크라이어는 익숙하게 말을 받았다.
“날 없는 사람 취급하던데, 원래는 그러지 않았다?”
그 말처럼 보니타는 크라이어를 아예 보지도 않았다. 마치 천한 것들은 바라볼 가치도 없다는 듯, 그를 외면하는 모양새로. 그러고 보니 딱히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크라이어가 나타난 이후부터 그녀 자신이 사라질 때까지 한 번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지. 아주, 아주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랬지. 그게 너무 이상하단 말이야.”
하인데르 후작과 공적인 자리에서 꽤 많이 만났었지만, 사람을 급으로 나눠서 대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으니까.
“후작이 가문이나 지위고하, 하물며 신분에 따라서 구분 지어서 응대한 적은 없었어.”
“이제까지 몰랐을 가능성은?”
“그야 그런 얄팍한 인간일 가능성이야 있지.”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필 지금 그런 바닥을 기는 인성을 내 앞에서 내보인다고? 제국의 황녀를 아침부터 싫은 소리 할 요량으로 불러놓고?”
심지어 자신뿐만이 아니라 더 일찍 황제까지 알현하고 오지 않았나.
“하인데르 후작의 인성이 땅을 뚫고 내려가건 아니건, 그녀의 유능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러니까.”
“후작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거군.”
크라이어가 올리비아의 말을 받자, 그녀는 단숨에 미간을 좁혔다.
“그래. 그것도 그렇고. 너무 빨리 수긍하고 갔어.”
이른 아침, 선약도 없이 황제를 알현하고 황녀 궁까지 쫓아 온 것 치고는 너무나도 싱거운 반응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후작의 말이 맞잖아.”
그에 크라이어는 입매가 뒤틀렸다.
“뭐, 지금은 노르덴 국에 속해 있으니까.”
“그래. 사실 노르덴 국에 갔을 때 왕세자가 직접 당신의 귀환을 입에 담았는데 내가 묵살해 버렸잖아. 그거 꽤 큰 문제야.”
거기까지 말한 올리비아는 턱을 치켜들고 거만하게 덧붙였다.
“내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못 할 짓이지. 국가 간의 자존심 문제로 번질 테니까.”
“그것참.”
크라이어는 암레스트에 팔꿈치를 괸 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횡포가 따로 없군.”
“힘의 차이란 그러…….”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흐리게 뜬 올리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제국을 단신으로 무너뜨린, 홀로 대륙 전쟁을 일으키고 끝내버린 괴물을 앞에 두고 힘이니 뭐니. 치켜올렸던 턱을 얌전히 내린 올리비아는 이내 불만스럽게 내뱉었다.
“그 횡포 덕분에 당신이 제국에 있는 거잖아. 횡포라고 하지 마, 듣는 횡포 부린 내가 기분이 별로니까.”
그 말을 하는 당사자가 횡포를 몇 번씩이나 말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미 틀린 것 같았지만, 크라이어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으스대던 올리비아가 매우 귀여웠으니까.
“아무튼 후작은 맞는 말을 했고, 내가 억지를 부리는 상황이었어. 노르덴 국의 왕세자라면 몰라도 하인데르 후작 정도면 입바른 소리 하면서 더 압박할 수 있었단 말이야.”
“황제의 명이 있었고, 그에 따라 내가 선택했는데도?”
“명분은 후작에게 있으니까. 당신 기사잖아. 기사는.”
크라이어가 올리비아의 말을 받았다.
“소속된 주인의 명에 따라야만 하지. 나는 기사도 아니거니와 노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지독하게 깊어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우물 저편에서 흘러나온 낮은 목소리였다. 텅 빈 검붉은 눈동자는 눈앞이 아닌 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노르덴 국, 아니,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겠지. 그 유리알 같은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벌떡 일어났다. 이런 순간이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다. 그가 그 스스로의 안으로 침잠하며, 분노와 증오, 체념과 절망마저 사라진 곳에서 홀로 서 있는 순간이. 크라이어 주변이 일그러져 보이는 건 결코 기분 탓이 아니겠지.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의 살의가 희미한 아지랑이처럼 그의 몸 전체에서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평범한, 아니 대륙에서 한 손에 꼽는 강한 자라도 저 살기에 닿는 순간 미칠듯한 공포를 느낄 것이다. 아마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절명할 테고. 하지만 신체 능력으로 따지자면 평범보다 조금 아래인 올리비아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크라이어.”
양손으로 그의 뺨을 쥔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에서 피어오른 불이 비어 있던 검붉은 대지에 하나둘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날 봐.”
낙인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통증과 함께 홀린 듯 크라이어는 그 작은 손길, 거의 들리지도 않는 속삭임에 집중했다.
“나는 살 거야. 그리고 당신은 자유가 될 거고.”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올리비아는 확언했다. 그녀의 목소리,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피부 한 겹 아래로 스며드는 장미 향, 자신과는 전혀 다른 보드라운 손. 그의 모든 감각이 오롯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오로지 그녀만이 그의 세상이 되었다. 크라이어는 이런 감각이 사랑인지 아닌지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잃어버린 과거에서도 사랑을 알지 못했으니까. 다만 그녀는 벼락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잊지 못하게 그를 꿰뚫는 푸른 벼락이 되어 크라이어의 가슴에 내리꽂혔다. 크라이어에게는 일 초가 억겁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올리비아는 그의 뺨을 놓아주며 뒤로 물러났다.
“좋아, 정신 차린 거 같으니까.”
그녀에게는 고작 그것뿐이었을 거다. 정신을 놓은 듯한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할 의도였을 뿐. 하지만……. 제게서 등을 돌려 멀어지는 그녀의 작은 등을 보는 크라이어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고작 두 어 걸음이었을 뿐이다. 그 정도 거리인데도 그녀와 멀어지자 그의 입안이 타는 듯이 말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붉은 눈동자가 깊이, 지독하게 깊이 가라앉았다. 그에게서 등을 돌린 올리비아는 당연히 그런 크라이어의 눈을 보지 못했고, 그녀가 소파에 앉아 그와 마주했을 때, 그는 이미 평소와 다름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일단 하인데르 후작이 수상하다는 건 유념해두도록 하고. 어제 그 사건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올리비아는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로 가자. 그렇지 않아도 어제 일에 관한 서류가 올라와 있으니까.”
평이하게 문으로 향하던 올리비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갑자기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