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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나에게 거짓말하지 마. (44/146)

#44. 나에게 거짓말하지 마.2022.01.31.

그는 어디서 찾았는지 보드라운 담요를 집어 덮어주었다. 몸을 감싸는 마른 햇살 냄새에 아예 몸이 풀려버린 올리비아가 흐물거리며 소파에 늘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일자로 다물려 있던 크라이어의 입술이 열렸다.

1654971223601.jpg“암살자는 아니다.”

앞뒤가 다 빠진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올리비아는 익숙하게 받았다.

16549712236014.jpg“응. 그렇게 허접한 실력의 암살자가 황궁을 돌아다닐 수가 없을 테니까. 애초에 무기도 과도였고…….”

올리비아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16549712236014.jpg“근래 황궁에서 미친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보고는 없었어. 갑자기 미쳐서 길 가던 사람을 죽이려고 드는 병도 보고 받은 바 없고.”

거기까지 말한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16549712236014.jpg“이러면 결국 남은 건.”

그녀는 풀물과 먼지로 엉망이 된 이름 모를 사용인의 치맛자락을 내려다보다 이윽고 다른 옷들과 색이 다른 리본 끝을 걸머쥐었다.

16549712236014.jpg“사적인 원한이네.”

그것도 작정하고 죽이려고 달려들 만큼 깊은 것이었다.

16549712236014.jpg“그곳에 숨어 있다가 이 옷을 보고 달려든 모양이야. 리본이 어쩌고 그랬거든.”

리본 끝을 만지작거리던 올리비아가 문득 떠오른 의문에 입을 열었다.

16549712236014.jpg“당신, 나 어떻게 찾은 거야?”

그녀의 질문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기에 사용인의 옷을 입고 머리카락 색도 감췄다. 어디로 간다고 그에게 전갈을 주기는커녕 메모조차 남기지 않았을 텐데. 그에 크라이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1654971223601.jpg“마침 네가 나가는 것을 봤거든.”

누가 들어도 꽤 그럴듯한 답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럴듯한 답에 넘어가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그녀는 비틀거리며 크라이어를 향해 다가섰다.

16549712236014.jpg“아니잖아.”

그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에 불티가 하늘하늘 솟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와 이 정도 거리까지 오면 심장이 쿵쾅거렸건만, 지금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16549712236014.jpg“나에게 거짓말하지 마.”

올리비아의 푸른 불꽃이 크라이어의 검붉은 늪을 가르며 불타올랐다.

16549712236014.jpg“크라이어.”

붉은 입술 사이로 그의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그녀가 그를 부른 그 순간. 크라이어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가슴을 가르고 진심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1654971223601.jpg“장미……향기가 맴돌아서 그 궤적을 따라…….”

그는 답지 않게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올리비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와는 달리 입을 벌린 채 굳었을 뿐. 장…… 뭐? 장미 향기라면 분명 제게서 나는……. 저도 모르게 제 팔을 들어 코로 가져다 대려는데 크라이어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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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그와 그녀 사이에 서늘한 바람 냄새와 희미한 장미 향이 뒤엉켰다. 가……까워. 그리 느낀 순간. 크라이어는 훌쩍 멀어져 있었다.

1654971223601.jpg“오늘은 일단 쉬어라. 답을 찾는 건 내일이라도 늦지 않겠지.”

올리비아가 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홀로 남은 그녀는 제 뺨을 마구 문질렀다. 뺨이 이렇게 뜨거운 건 제가 심하게 문지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되뇌면서. *** 올리비아의 신선한 산책이 망해버린 다음 날. 막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여느 때와 같이 집무실에서 서류에 파묻혀 있던 황제는 뜻밖의 방문자를 맞았다.

16549712264079.jpg“하인데르 후작이?”

16549712264079.jpg“네. 폐하.”

16549712264079.jpg“선약이 있던가?”

피로한 낯빛에 떠오른 의아함은 시종장의 답에 조금 더 깊어졌다.

16549712264079.jpg“아니요.”

16549712264079.jpg“흐음. 그 하인데르 후작이 선약도 없이 찾아 왔다라.”

고민은 길지 않았다. 황제는 펜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12264079.jpg“들라해.”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체구지만 강직하다 못해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인상의 중년 여인이 황제 앞에 섰다.

16549712292698.jpg“제국에 무궁한 영광을. 폐하를 뵙습니다.”

정중히 허리를 굽히는 이를 향해 황제가 손을 휘저었다.

16549712264079.jpg“새벽부터 기나긴 예는 되었네.”

16549712292698.jpg“이른 아침부터 송구합니다.”

16549712264079.jpg“괘념치 말게. 후작이라면 반드시 필요해서 한 일일 테니.”

신뢰만이 듬뿍 묻어나는 황제의 말에 보니타는 그저 고개를 깊이 숙일 뿐. 제국에서 가장 큰 세력인 하인데르 후작가의 전성기를 이끈 장본인이면서도, 황제와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 충성하는 이. 보니타 하인데르. 그런 그녀가 선약 없이 방문한다고 해서 황제가 내칠리가 없지 않은가.

16549712264079.jpg“그래. 이 새벽부터 무슨 일인가. 급한 일이 아니라면 후작이 이리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곧 보름이 된다. 제국에 가문의 이름을 올린 귀족들이 모이는 회의가 열릴 터. 귀족파의 수장이지만, 황실을 위해 그들을 잘 조율해오던 하인데르 후작이 이리 방문하는 이유라면.

16549712264079.jpg“회의 전에 무언가 긴밀히 협의할 것이라도 있는 겐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현안들을 되짚은 황제는 보던 서류를 한쪽에 치워두며 하인데르 후작을 향해 눈짓했다. 하지만 후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황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16549712292698.jpg“노르덴 국의 기사가 황녀 전하와 함께 귀환했다고 들었습니다.”

16549712264079.jpg“음?”

생각지도 못한 논제였기에 황제는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지만, 후작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16549712292698.jpg“아무리 황녀 전하라 할지라도 타국의 기사를 동의도 없이 이리 오래 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건조한 목소리는 원리원칙을 꼬장꼬장 따지고 있었다.

16549712292698.jpg“그렇지 않아도 노르덴 국에서 기사의 귀환을 원했다고…….”

후작의 이야기를 듣던 황제의 푸른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노르덴 국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이 아니다. 누구나 다 듣고 볼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 황녀가 노르덴 왕세자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했다는 사실을 눈앞에 있는 후작이 알아도 그리 이상하진 않으리라. 게다가 그녀가 주장하는 말은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법한 것이 아닌가. 타국의 기사는 타국에 돌려 보내라.

16549712292698.jpg“……하여 다른 기사들은 전부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무투 대회에서 보여준 노르덴 국 기사의 위용이 있다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타국의…….”

하지만 위화감이 느껴졌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확실히 신경을 건드리는 어떤 위화감. 볼셰이크 제국의 가장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황제는 성군이나 폭군이 아니었다. 단지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매일매일 피로에 찌들어 이 거대한 제국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떠받치고 있을 뿐. 하나, 그는 황제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아버지이기도 했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위화감이었지만, 제 딸과 관련된 이상 순순히 넘어 갈 순 없으리라.

16549712264079.jpg“그만.”

한 손을 들어 후작의 입을 막은 황제는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그는 한동안 후작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꺾이지 않는 눈동자를 한 후작은 처음과 같이 강건하게 서 있을 뿐.

16549712264079.jpg“흐음. 후작의 말은 아주 잘 알겠어.”

16549712292698.jpg“폐하 그렇다면 조속히…….”

16549712264079.jpg“하나.”

황제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16549712264079.jpg“황녀의 손님을 황녀의 허락도 없이 보내버릴 수는 없지 않겠나. 유일무이한 내 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 말이야.”

황제는 주름진 눈가를 휘며 더없이 가볍게 말했지만, 후작의 턱에는 힘이 들어갔다. 결국 황제는 후작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16549712292698.jpg“폐하. 이런 선례는 아주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노르덴 국과는 아주 오랜 협력 관계가 아닙니까. 내부적으로 불안할 때 제국에서 힘을 실어주지는 못할망정.”

16549712264079.jpg“아아, 너무 그렇게 앞서 나가지 말게나.”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무투 대회때의 일은 전부 보고 받았다. 심지어 제국의 기사단장들도 전부 혀를 내둘렀다고 하지 않나. 그 정도 실력을 가진 기사가 노르덴국에서 이름도 없이 썩어가고 있었다니. 제 딸이지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탁월하단 말이지. 게다가 후작에게 말한 이유도 진심이었다. 어느새 그리 자랐는지 푸른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을 담은 딸에게 미움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황제는 펜을 다시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16549712264079.jpg“일단 황녀는 손님을 이대로 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후작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이리 하세나.”

황제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하인데르 후작, 보니타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 몇 시간 후, 황녀궁.

16549712292698.jpg“제국에 무궁한 영광을…….”

16549712236014.jpg“거창한 인사는 생략하죠.”

황제와 똑같이 손을 휘젓는 황녀를 향해 보니타가 고개를 숙였다.

16549712292698.jpg“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에 올리비아도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12236014.jpg“하인데르 후작.”

16549712292698.jpg“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16549712236014.jpg“괘념치 말아요. 폐하께서도 미리 언질을 주셨으니까.”

올리비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무의식적으로 누르며 눈앞에 있는 보니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인데르 후작이라……. 이 여자는 솔직히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제국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도 황실과 대립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귀족. 단신으로 하인데르 후작가를 이만큼 일으켜 전성기로 이끈 여장부.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네 번의 생에서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이 여자는 전쟁 직전에 제국에서 자취를 감췄다.

16549712264079.jpg‘뭐? 그게 무슨 소리더냐! 하인데르 후작이 사라져?’

16549712264079.jpg‘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날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외출했고,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첫 번째 생에서는 황제 곁에서 실종된 그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만약 하인데르 후작이 적국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제국에는 큰 손실이 될 테니까. 뭐, 결국 황궁이 무너지고 크라이어가 들이닥칠 때까지도 저 여자는 실종상태였지. 그건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하인데르 후작이 전쟁에 필요한 능력인 무력, 혹은 전략 전술쪽으로 두각을 나타냈다면 올리비아는 그녀를 찾기 위해 무슨 수든 썼으리라. 하지만 하인데르 후작이 뛰어난 부분은 정치와 외교 부분이었기에 전쟁이 터진 시점에서 적국의 포로만 아니라면 그녀를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었다. 비록 사라져서 적국의 조력자로 나타난 건 아니지만, 어쨌건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찜찜했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을 보낸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16549712236014.jpg“나의 기사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요.”

-달그락. 다음 순간, 보니타의 손에 있던 찻잔이 크게 요동쳤다. 그녀의 삭막한 얼굴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손등이 희게 질릴 정도로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건 보였다. 보니타는 올리비아가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며 물었다.

16549712292698.jpg“전하, 방금 ‘나의’ 기사라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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