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다녀왔어?2022.01.17.
하지만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모래가 씹힐 만큼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신경 쓰지 않아서 모르겠군.”
그레타는 그 답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화려한 미소를 피워냈다.
“그렇겠죠. 그러셨겠죠. 당신은 고작 인간 따위에 신경을 쓴 적이 없으니까.”
노래하듯 중얼거린 그레타는 그의 팔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죽음에서 신의 의지로 부활한 당신의 눈에 그런 하찮은 것이 들어 올 리가 없죠.”
원하지 않은 부활과 절대 원하지 않은 노예 낙인을 찍은 장본인의 주절거림에도 크라이어는 분노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내뱉는 말에서 무언가 신경을 긁는 부분에 집중했을 뿐. 하지만 그의 신경을 갉작거리며 툭툭 건드리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 낼 수가 없었다. 매번 그레타가 주절거리던 미친 소리와 별다를 것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이리도……. 하지만 그는 생각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쨌든 지금 당장 그것을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올리비아를 죽여버리자는 말이, 아니 죽음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하게 만들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가 싹둑 잘라냈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둬.”
“네?”
“황녀 말이야. 내버려 두라고 했다.”
눈을 깜박이던 그레타는 천천히 그의 팔을 휘감았던 팔을 풀어냈다. 크라이어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버려 두라고요? 어째서요? 거슬리는 건 빨리 정리하는 편이 낫잖아요.”
끊임없이 올리비아를 제거하자고 부추기는 그레타의 말에 크라이어는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타의 시야 사각에 있는 그의 손은 주먹을 지나치게 꽉 쥔 탓에 손등으로 핏줄이 불거지고 있었다.
“황녀 때문에 제국에 묶여 계시잖아요? 당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인데.”
그레타가 아예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의 얼굴 반 틈을 그림자가 먹어 치웠다.
“그것을 치워버리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당신께서는 제 곁이 아닌 머나먼 곳에서…….”
“내가 제국에 머무는 이유는 황녀 때문이 아니야.”
크라이어는 거짓을 토하지 않았다. 자신이 제국에 머무는 이유는 올리비아 때문이 아니라 올리비아와 한 거래 때문이니까. 그의 답에 그레타는 방금 전까지, 그토록 절절한 재회의 감정을 토해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대단히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러면 제국에 계속 머무실 거라는 이야기죠?”
“그래.”
크라이어의 답에 그레타는 양손을 모으며 공손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신의 답을 기다리는 신도처럼.
“왜 그리하시는지 가르침을 내려주실 건가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검붉은 눈동자는 지극히 고요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처럼. 그리고 그 눈을 마주한 그레타의 얼굴이 점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바로 저 눈이다.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어떤 것도 담지 않으며, 모든 것을 관조하는…….
“아니.”
그레타의 생각을 자른 크라이어는 부정에도 그녀는 답을 조르거나 캐내려 들지 않았다. 그의 뜻이 곧 신의 뜻일 테니까. 고대신의 첫 번째 노예이자, 그의 기사이며, 그의 현신과도 같은 자. 신의 의지를 행사하는, 아니 행사해야만 하는 그의 의도다. 뼈아프게 그립고, 보지 못해 서러워도 참아 내는 수밖에.
“그래요. 인고의 세월을 거쳐야 달콤한 과실을 얻을 수 있는 법이겠죠.”
대단히 정상적인 말에 기괴하게 뒤틀리고 미쳐버린 의미를 담은 그레타가 한걸음 물러났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의 입매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그가 그레타를 따라 이곳까지 순순히 온 이유는 왕세자 따위의 부름 때문이 아니라,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왕궁에 도착하기 직전. 올리비아는 그를 마차 안으로 불러들인 후, 정신없이 쏟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보야! 정보가 필요해! 물론 아이작도 정보수집을 할 테지만, 당신이 제일 가까이서 제일 은밀한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잖아!’
하지만 이내 올리비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알아.’
마차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묻은 채 다리를 꼬고 있던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그 미친 마법사 부녀와 결코 같은 노선을 걷는 동지 따위가 아니라는 거. 그렇지만 그들에게 당신은 누구보다도 내부인이잖아.’
단순히 내부인일 리도 없다. 그가 아니라면 고대신의 정화인지 나발인지를 할 수 없으니 사실상 크라이어가 미친 마법사 부녀의 모든 것이리라. 그들이 무엇을 하건 나머지는 부가적인 것일 뿐.
‘그러니까 내 말은……. 음, 아니야. 역시 아닌 거 같아. 당신이 굳이 그 빌어먹을 마법사를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지.’
하지만 올리비아는 곧 고개를 휙휙 저었다. 정보? 중요하다. 수집? 말했듯이 크라이어가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기밀을 알아낼 수 있겠지. 하나, 그런 것들은 결코 내키지 않아 하는 그를 마법사와 그의 딸의 면전으로 밀어버릴 가치는 없다. 아암, 절대 없지. 격하게 고개를 흔드는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이어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다, 부지불식간에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하지.’
‘어?’
‘말했던 것처럼 내가 적임자일 테니.’
‘그건 그렇지만.’
올리비아는 머뭇거리다 입술을 달싹였다.
‘그…… 미친것들하고 부딪쳐도 괜찮아? 정보 수집을 하려면 이야기도 좀 나눠야 할 거고.’
토끼 눈을 뜬 채 그를 올려다보는 올리비아의 이마를 가볍게 밀어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그가 확답하자 곧 올리비아는 잔뜩 흥분해서 볼이 붉게 상기된 채 신나서 외쳤다.
‘가라! 내부의 적!’
그리 말하며 힘차게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던 올리비아는 금세 그의 팔을 꽉 붙잡으며 덧붙였다.
‘조금이라도 상대하기 역겹다는 느낌이 들면 중간에 그만둬. 알았지? 당신이 싫은 일을 할 필요 없어.’
물가에 애를 내놓은 것처럼 신신당부하던 자그마한 인영을 떠올린 크라이어의 눈가에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미소가 번지다 사라졌다. 그레타가 올리비아를 건드리려는 것을 눌러 놓았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겠지.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아예 무시하며 그레타를 지나쳐 문 쪽으로 향하던 크라이어가 건조하게 덧붙였다.
“제국으로 가기 전 마법사를 봐야겠다.”
이리 말해두면 국장이 끝나기 전에는 마법사를 볼 수 있으리라. 그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지. 크라이어가 궁금해하는 기색을 아주 조금이라도 보이면, 제가 앞으로 뭘 할지 줄줄 뱉어낼 테니까. 이제까지는 그놈이 하는 개소리를 전부 흘려들었지만, 이제는 그 개소리조차 파헤쳐 먼지 부스러기만 한 정보라도 캐내야만 한다. 그레타에게 간다는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문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그녀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는 제가 정화했어요.”
*** -똑똑. 노크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올리비아는 지극히 우아한 목소리로 명했다.
“혼자 있겠다고 했잖아. 물러가.”
그 말에 문고리를 잡아 돌리던 크라이어가 멈칫했다. 올리비아가 물러가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에게로 이렇게나 순순히 돌아온 까닭을 알지 못했을 뿐.
‘그를 돌려보내도록 해.’
제국의 황녀가 그리 말했기에 노르덴 국의 기사로서 돌아온 것은 아니다. 그녀가 그토록 고압적으로 명령한 이유도 구태여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고. 그렇다면 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레타가 올리비아를 입에 담은 이상, 그 그레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신이 올리비아 근처에서 서성이면 더 위험하지 않은가. 일단 막아두기는 했지만, 그가 계속 올리비아 곁에 머무는 이상 그레타는 언제건 올리비아를 노릴 터. 그런데도 크라이어는 그 어떤 망설임이나,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올리비아에게 돌아왔다. 그래.
“돌아……온 건가.”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자신은 올리비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이렇게 된 걸까. 아니, 왜 이렇게 된 걸까? 하지만 굳게 닫힌 문을 응시하던 크라이어는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 문고리를 잡았다. 방안에 고여 있던 공기가 흘러나오며 코끝으로 희미한 장미 향이 스쳤다.
‘나한테서 나는 냄새? 아아, 장미 향 말이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거야. 피를 타고 흐른다고 해야겠지. 볼셰이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니까.’
올리비아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타오르는 듯이 선명한 붉은 머리에 장미 향이라니. 지나치게 전형적인 조합이라 좀 부끄러울 지경이야.’
그리 말하며 제 팔을 킁킁거리던 올리비아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기에 방으로 들어서는 크라이어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이윽고 볼록 올라온 거대한 침대를 발견한 그가 한달음에 다가섰다.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지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불룩 튀어나온 작은 산의 모양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혼자 있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갈까.”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지자 올리비아가 눈을 반짝 떴다.
“크라이어!”
이불을 확 걷어낸 올리비아가 단숨에 몸을 일으키려다, 갑작스럽게 밀려온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당연히 크라이어가 그녀를 잡았고, 그의 팔에 상체를 반쯤 걸친 올리비아가 배슬배슬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그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누구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서 들려오는 일상적인 인사.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서로의 곁을 지키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일까. 올리비아는 크라이어가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리 인사를 건넸다. 다음 순간. 크라이어의 얼굴에 한순간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오르다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런 그를 보다 고개를 기울인 올리비아가 이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물었다.
“크라이어? 혹시 머리가 반대로 돌아버린 마법사의 딸이, 아니 그 여자도 마법사였지. 여하간 그 미친 자가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황녀가 쓰기에는, 아니 평범한 사람이라도 담지 않을 과격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푸른 눈동자에 크라이어만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그냥 돌아오라고 했잖아. 차라리 아까 내가 모르는 척 건방진 것이라고 머리채를 확 잡아 버릴걸!”
씩씩거리는 올리비아의 귀로 나지막하고 어딘가 조금 막힌 듯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다녀……왔다.”